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 - 억만장자 코크는 어떻게 미국을 움직여왔는가
낸시 매클린 지음, 김승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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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민주주의가 될 것인가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가 될 것인가

 

 

'민주주의는 지속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약점은 무엇일까?', '민주주의는 건강한가?' 이런 고민들은 불필요하게 여겨진다. 또한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치부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간다.

'민주주의'하면 떠오르는 건, 투표이다. 선거 시즌이 되면 민주주의에 대해 잠깐 생각할 뿐, 그외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체제가 오래 되었고, 안정적이라 느끼지면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민주주의 약점은 없는지, 또한 민주주의가 완벽한 체제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민주주의는 과연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을 의미한다. 군사정권이나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가깝지 않은 북한을 제외하고 대다수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벼랑 끝에 선 민주주의》를 읽기에 앞서, 개념들이 있다.

우리는 현재 자유민주주의에 살고 있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자유주의 + 민주주의 = 자유민주주의'이다. 사실 뜯어보면, 민주주의 안에는 자유가 내포되어 있어서, 자유민주주의는 중복된 표현이다. 현실 정치에서 민주주의보다 자유를 앞세우면서 그 자유를 기업의 이익을 옹호할 목적으로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주의 정당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다. 결국,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표현인 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어울리는 조합일까?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 안에서 자본주의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심지어 하나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익숙하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무엇보다 대항마였던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발전하고 독재정권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다른 대안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혁을 꿈꾸는 사람 같이 치부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의심해봐야 한다. '과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잘 어울리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우파는 좌파에게 현실을 모른다고 말하며, 좌파는 자신들이 정의라고 생각한다'라고. 그렇다. 실제로 좌파성향을 띤 사람들은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에 뛰어나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공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의는 항상 승리하니까. 하지만, 이건 큰 착각이자 게으름이다. 진정으로 정의라고 말하고 싶다면, 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뷰캐넌의 큰 그림을 그리는 전략을 배워야 한다. 그가 어떻게 자유지상주의를 만연하게 만들었는지를. 어떤 성향이든 관계없이, 배울 것은 배워야 하지 않나 싶다. 특히, 유토피아를 꿈꾸는 좌파성향의 사람들은 분명 보고 배워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합리적 무지'를 경계해야 한다. 또한 전문가들은 이를 악용해서도 안 된다.

 

뷰캐넌과 코크의 만남과 그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을 읽어보면, 극우성향은 교만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위한 생각뿐이지 않은가. 자신들의 노력만으로 이루어냈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들이 쌓은 돈도 누군가의 돈이 아닌가. 무엇보다, 긍휼이 없는 언어들에 마음이 불편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들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렇게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돈은 왜 존재하는지를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자본주의는 좋다. 그러나 돈과 성과만 우선시 되는 것은 옳지 않다. 우월한 자와 자수성가한 가운데 교만한 자, 가난을 모르는 자만이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찬양한다. 이들에게는 긍휼함이 없다. 자신들이 영웅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여길 뿐이니 지출만 생각한다. 그리고 지출을 낭비라 여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결국 경제다. 그렇다면 경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단지 경제성장률이 높은 것을 의미하는가? 그렇지 않다. '경제'라는 말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줄인 표현이다. 다스릴 경(經), 세상 세(世), 건널 제(濟), 백성 민(民)으로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苦難(고난)에서 救濟(구제)함을 뜻하다. 그러나 극우든 극좌에는 이런 정신이 없다. 극좌는 독재주의로 나타났고, 극우는 엘리트주의(그들만의 리그)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소수만 누리고 나머지는 수단이자 희생자로 전락하고 마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 누구를 위한 경제체제인가. 누구를 위한 밥그릇 싸움인가. 누구를 위한 돈이여야 하는가. 돈은 수단이어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은 존재할 수 있지만, 돈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건강하지 않다.

"그 이후에도 진보주의자들은 민영화가 민주주의를 속박하는 족쇄로 전략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더 안 좋게는, 민영화 제안들이 단순히 공공 영역보다 민간 영역을 선호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얼마나 우파들은 치밀하고 좌파들은 게으른지 알 수 있다. 우파 성향 사람들이 좌파 성향 사람들에게 '현실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듯 싶다. 그들은 성실하다. 그리고 좌파 성향의 사람들은 막연하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생각의 차이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우파 성향이든, 좌파 성향이든 극단은 좋지 않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흑묘백묘론을 적용하지 않았는가. '흑묘백묘론은'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말이다. 결국,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이렇든 경제체제는 결국 사람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부유한 자든, 가난한 자든 특정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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