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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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에 초판이 나왔다니 30년도 더 되었다. 오래된 문장에 든 낭만적인 정조가 듬뿍하다. 보고나면 이 애달픈 로맨스에 폭 녹아있다 흩어지는 느낌이 든다. 이들의 사랑은 애틋하고 아쉽다. 그 시대라서, 지금은 없는 그 시대만의 미련이 있다. 서로가 그리워 주고 받는 편지라는 것은 현재 2016년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새벽 두시쯤 괜히 `자니?`하고 묻는 까톡이 대신하고 있는 거겠지. 2040년엔 그런 문자를 주고 받았던 연인들의 이야기가 무척 낭만적으로 들리는 날이 올지 모른다.

오래되어 아름답지만 같은 이유로 불편한 지점이 있다. 지나친 낭만은 케이크를 너무 많이 먹었을 때 처럼 속이 좀 부대낀다. 으 느끼해, 하고 고개를 젓는 순간이 생기는 것이다. 지나간 사랑에 대해 많은 연인들이 비슷한 태도를 취하겠지만, 주인공들은 지난 기억에서 너무 아름다운 것만 남겨 보여준다. 둘을 갈라서게 만들었던 끔찍했던 그날 밤의 일도, 그 밤이 있게 했던 유년시절의 추억도 모두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그야 그정도로 강렬한 어린시절의 순간이 있다면 나이들어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설사 이미 결혼을 한 몸이더라도, 너무나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남자 주인공인 아리마는 낭만적인 어린시절의 일화와 마치 운명같은 재회의 순간은 여러장에 걸쳐 꼼꼼히 정성들여 묘사하다가 갑자기 그 후에 `불륜`에 빠져드는 상황은 대충 얼버무리면서 넘어가 버린다. 더이상 설명하는 것이 `지긋지긋`하고 어디에나 있는 `흔해빠진 관계`를 떠올리면 된다면서. 아리마의 이런 태도에 여자주인공인 아키는 뭐라고 화답하는지 보자.

삼가 올립니다.
이미 수령이 퍽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던 뜰의 은엽아카시아가 올해도 노랗고 미세한 솜털 같은 꽃을 가득 피웠습니다. 가루 같은 그 꽃을 좋아해서 적당한 가지를 잘라 꽃꽂이를 하려고 가위를 들고 뜰로 나섰습니다. 살짝 닿기만 해도 부스스 꽃잎이 흩어지기에 자른 가지를 가만가만 조용히 옮겼는데 그래도 흩어져 떨어지는 바람에 서둘러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은엽아카시아 가지를 손에 들 때마다 저는 늘 순간적으로 애달픈 듯한, 서글픈 듯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설마 답장이 올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당신이 보낸 두툼한 편지를 손에 들었을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봉투를 뜯는 것조차 두려웠습니다. 다 읽고 나서는 마치 은엽아카시아 꽃이 흩어져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때와 같은 기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낭만적인 답장을 보내 줄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터라 이 편지를 쓴 이는 아리마 야스아키라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서글퍼지기도 하고 애달파 지기도 했습니다. 대체 당신은 그 편지로 저에게 뭘 알려 주고 싶었던 걸까요? 저는 그 편지로 뭘 알 수 있다는 걸까요? 당신은 기분 좋게 전주곡만 연주하고 앞으로 진짜 음악이 시작되려고 할 때 지쳤다면서 갑자기 피아노 덮개를 툭 닫아버렸습니다. 사람을 다소 바보로 만드는, 달콤한 선율의 긴 전주곡이었습니다.
p.69-70


아키의 이 다소곳하고도 아름다운 은엽아카시아에 대한 묘사는, 이 소설이 결국 남자의 시선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불륜의 전모를 들은 후, 당신의 애달픈 첫사랑을 저는 모두 이해한답니다, 어서 조금 더 이야기해 주세요, 라고 여자입장에서 응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마음이 아키의 이 꽃에 대한 묘사로 잘 포장되어 있다. 사실 이 소설은 비록 시작은 아키라는 여성에서 출발하지만 아리마가 겪은 사건, 그와 관련된 그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사건 이후의 무너진 삶 등 상당부분 아리마의 인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키가 사건 이 후 겪은 일들도 나오지만, 그 일들은 아리마의 사건을 뒷받침해주는 역할로서 존재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도 아리마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고, 심지어 현재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몸이 아픈것 마저, 과거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살짝 뒤틀려 생각한다면 작가가 하는 이야기는 아리마이고, 독자는 아키인 셈이다. 독자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반응이었으면 좋겠어, 라는 걸 아키에게 대입한 느낌이 좀 있다.

(일본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런 자존감없는 여성 캐릭터들에게서 나는 곧잘 화가 난다. 심지어 얼마전에 읽은 종이달에서도 여자들은 한없이 흐물거리는 존재였다. 당연한 것처럼 표현되는 이런 배경묘사, 인물묘사를 보고 있으면 일본에선 도대체 여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불륜에 대한 변명을 고급 포장지로 정성껏 감싼 듯한 느낌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 소설의 가치를 깎아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라시야마의 전통료칸에서 피흘린채 죽어가는 남녀, 라는 구심점에서 시작해 그 일의 원형이 되는 어린시절의 일화와, 사건 이후 무너졌지만 계속 이어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의 대비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이 흥미롭다. 남과 여가 있는데 어쩌면 둘 다 이렇게 명문일 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싱거운.. 의미없는 의문도 든다.
무엇보다도 `이만 총총`은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지 않나.. 싶다.

그럼 나도 20,000.... 총총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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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다 별점을 반드시 매겨야하는건가.
시험지에 정답 채점도 아니고 긍정의 별다섯개로 감상을 결론내리는 것이 좀 부담스럽다. 더구나 반개짜리 별은 있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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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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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글에는, 뭐랄까 운치같은게 있다. 시대 배경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데다 당시에 쓰였던 단어나 화법의 생소함이 만드는 여백을 나의 상상력으로 채우면서 이끌어오는 과거의 기억, 언뜻 들었던 것 같은 이야기들, 장면들에 의도치 않게 어떤 향수가 묻어나는 것 같다.
한마디로 오래된 글은 낯설지만 포근하다. 김승옥 소설의 첫문장처럼.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 -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드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軍用)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 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서울, 1964년, 겨울>


이런 오래된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온몸이 간질간질하면서 무엇인지도 모르게 그리움을 느끼곤 한다.


<설국>이 처음 출간되었다는 1937년의 일본을 나는 전혀 모른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어땠는지, 게이샤의 역할과 지위는 또 어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공과 고마코의 관계가 사회적인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몰라서 모르는 것들 뿐 아니라, 이 소설은 어느하나 제대로 설명된 부분이 없이 온통 모호함으로 채워져 있다. 고마코와 유키오, 유키오와 요코, 그리고 고마코와 요코로 이어지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중간중간 단서들이 나오지만 명확하지 않고 눈에 두텁게 뒤덮인 마을의 모습처럼 본래의 형태를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빛과 그림자의 모호함이 설국의 아름다움을 더욱 배가시키는 듯 하다. 손에 닿을 수 없어 아스라하고도 신비롭다.


거울 속에는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대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 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미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커다란 감정의 흐름이 남았다. 이는 물론 처녀의 얼굴이 그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창에 비치는 처녀의 윤곽 주위를 끊임없이 저녁 풍경이 움직이고 있어, 처녀의 얼굴도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말로 투명한지 어떤지는, 얼굴 뒤로 줄곧 흐르는 저녁 풍경이 얼굴 앞을 스쳐 지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제대로 확인할 기회가 잡히지 않았다.
기차 안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고 진짜 거울처럼 선명하지도 않았다. 반사가 없었다. 그래서 시마무라는 들여다보는 동안, 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잊어버리고 저녁 풍경의 흐름 속에 처녀가 떠 있는 듯 여기게 되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얼굴에 등불이 켜졌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밖의 등불을 끌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등불도 영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게 등불은 그녀의 얼굴을 흘러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빛으로 환히 밝혀 주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고 먼 불빛이었다. 작은 눈동자 둘레를 확 하고 밝히면서 바로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진 순간, 그냐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p.12-13
눈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리라, 일부러 도랑을 내어 목욕통에서 넘치는 뜨거운 물이 여관의 벽을 따라 흐르게 해놓았는데 현관 앞에서는 얕은 샘물처럼 퍼졌다. 검고 늠름한 아키타 개가 그 곳의 댓돌 위에 올라앉아 오래도록 그 물을 핥고 있었다. 창고에서 꺼내온 손님용 스키를 내다 말리느라 희미한 곰팡이 냄새가 더운 김으로 달착지근하고, 삼나무 가지에서 공동탕 지붕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덩이도 따스하게 모양이 일그러졌다.
p.44
나방이 알을 스는 계절이니까 양복을 옷걸이나 벽에 건 채로 두지 말라고, 도쿄의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말했다. 와보니 아니나다를까, 여관 방 처마 끝에 매단 장식등에는 옥수수 빛깔의 커다란 나방이 예닐곱 마리나 착 달라붙어 있었다. 옆방 옷걸이에도 작지만 몸집이 통통한 나방이 앉아 있었다.
창문에는 아직 여름용 방충망이 쳐져 있었다. 그 망에 나방 한 마리가 꼼짝도 않고 매달려 있었다. 노송나무 껍질 빛깔의 작은 깃털 같은 촉각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날개는 훤히 내비치는 엷은 녹색이었다. 여자 손가락 길이만한 날개였다. 맞은편에 펼쳐진 국경의 산들이 석양을 받아 이미 가을빛을 띠고 있어, 이 한 점 연녹색은 오히려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아뒤 날개가 서로 겹쳐진 부분만 짙은 녹색이다. 가을바람이 불자, 그 날개는 얇은 종이처럼 하늘하늘 흔들렸다.
p. 77-78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라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준 교토 산 옛 쇠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마음먹었다.
p.134



주인공 시마무라는 평생 한번도 본적없는 서양무용에 대해 비평하는 평론가이다. 온전히 다 알지 못할 때에만 가질수 있는 찬탄과 경이가 이 소설 속에 있다.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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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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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기는 내용은, 특히 심리적으로, 영화든 책이든 질색이다. 더구나 자신의 잘못이나 치부가 까발려지는 것은, 소심한 나에게 있어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공포 그 자체인데 굳이 간접체험까지는 사양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디션프로도 제대로 못보는 나다.

호기심에 집어들었다가 결국 내리 읽어버리고는 으악! 하고 혼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처음엔 깜빡 속았다. 종이달의 전개가 좀 특이했던 탓이다. 여자 주인공의 서사를 시간 순서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게 벌어지고 난 후 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괜찮을 줄 알았던 것이다. 역시나 전혀 괜찮지 않았고 마지막장을 덮고 잠이 들 때까지 알 수 없는 공포와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신문에 실린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쩌다가 그애가 그런 짓을 했을까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의 상황도 별다르지 않다. 돈이라는 허상에 머리칼을 휘어잡힌 채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낮에는 은행에 가 있었지만, 리카는 황금연휴 동안 줄곧 들떠 있었다. 손에 닿는 것도 폭신폭신하게 느껴지고, 발밑도 폭신폭신하고, 주위 사물의 색깔도 사랑스러웠다. 세상은 예전에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말캉거렸다. 그런가, 돈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세계를 보는건가, 리카는 생각했다.
레스토랑에서도 바에서도 백화점에서 부티크에서도, 리카 네를 맞이해주는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 끊이지 않았다. 아주 친절하게, 농담 한두 마디를 섞어서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해주었다. 거기에는 악의도 경멸도 오만불손함도 없고, 그저 포근한 선의만이 있었다. 리카는 은행에 거액의 정기 예금이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두가 그렇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통장을 리카에게 맡긴 나고 다마에, 야마노우치 부부 등. 해맑게 웃고, 목소리가 거칠어지지 않고, 사람들을 밀어내지 않고, 쉽게 사람들 믿고, 악의 같은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돈이라는 폭신폭신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리카는 그래서 출근을 위해 역에 갈 때나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붐비는 전철을 탈 때면, 주위에 자각 없이 뿌려진 채 방치된 악의에 새삼 놀랐다. 먼저 가기 위해 노인을 밀치고 가는 여자가 있고, 그 인간 뒈졌으면 좋겠어 하고 깔깔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금발의 여자아이들이 있고, 가방에 손을 찔러 넣고 정액권을 찾는 리카에게 혀를 차며 어깨를 부딪치고 가는 젊은 남자가 있고, 할머니를 밀어내고 빈자리에 앉는 중년 남자가 있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잔돈을 던지는 역내 매점의 판매원이 있었다. 전봇대 아래에 토사물이 펼쳐져 있고, 약국 계산대에는 긴 줄이 있고, 번화가 보도에는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 나왔다.

p.252-253

이때부터 그야말로 리카에게 금액을 적은 숫자는 뭔가 의미 있는 돈이 아니게 되었다. 단순한 덩어리가 되었다. 80만 엔을 매달 5만 엔씩 갚으면 이자가 얼마이고 언제 다 갚을 수 있는지, 리카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중한 안내를 받고 브랜드숍 예약회에 가서 거기서 사용한 28만 엔이 언제 계좌에서 이체되고, 그 계좌에는 지금 얼마 있으며 자동이체 된 뒤에는 얼마가 남는지 계산하는 일도 없었다. 딱 10만 엔만 빌려주면 좋겠다고 한 고타에게 건넨 10만 엔이, 거래처 자녀에게 부탁받았다며 게임기를 사 보내달라는 마사후미의 요청으로 사 보낸 게임기 값이, 어느 계좌에서 인출된 돈인지, 애초에 그 돈은 누구 것인지 생각하는 일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어느 은행, 어느 계좌의, 어떤 돈도 다 연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나고 다마에의 돈도 소비자금융 ATM에서 인출한 돈도. 돈이란 것은 마르지 않는 용수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마르는 일 없이 계속 샘솟아, 주위 사람들의 목을 적시는 생활을 돕는 것.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퍼다 쓰면 되는 것.

p.301

사람이 많은 장소는 피하려고 생각했는데, 리카는 밤이면 밤마다 흥청거리는 노천시장 근처를 돌아다녔다. 무엇을 봐도 마음이 설레지 않았다. 오더베이드의 실크 드레스도, 보석이 박힌 반지도, 하다못해 엽서 한 장조차도, 갖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복을 느끼면 눈에 띄는 포장마차에서 국수나 볶음밥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방콕에서 산 조악한 티셔츠와 싸구려 스커트는 빨아서 입는데도 어째선지 나날이 지저분했다.
쏟아지는 빛과 소음 속을 무엇 하나 보지 않고, 무엇 하나 동요하지 않고 걷고 있으면, 리카는 때때로 소리를 지르고 싶은 흥분을 느꼈다. 억눌러도 억눌러도, 그것은 모공에서 분출되는 땀처럼 끊임없이 흘러넘쳤다.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손에 넣었다. 아니, 갖고 싶은 것은 이미 모두 이 손 안에 있다. 커다란 자유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예전에 이른 아침 역의 플랫폼에서 느낀 행복감이 플라스틱 장난감으로 느껴질 만큼, 그 기분은 확고하고 강하고 거대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무엇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지금 내가 맛보고 있는 이 엄청나게 큰 자유는 스스로는 벌 수 없을 만큼의 큰돈을 쓰고 난 뒤에 얻은 것일까, 아니면 돌아갈 곳도 예금통장도 모두 놓아버린 지금이어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p.338-339



리카 이야기 말고도, 돈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들도 무척 흥미롭다.
물건을 사지 않고는 못배기는 여자, 지나치게 아끼느라 현실을 희생하는 여자, 세상에 돈이 전부인 아내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자 등. 사연은 다르지만 다들 돈이라는 것에 발목 잡혀 불행한 사람들이다.



돈이란거 참으로 무섭다. 웬만한 공포소설보다 더 무서운 소설을 읽은 것 같다.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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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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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빨리 읽어버리지만 않는다면 여행길에 하루키의 단편소설집은 아주 좋은 동행이 되어준다.

단편이라 장편보다는 감정소모가 적고, 무엇보다 하루키의 이야기들은 재미가 보장된다. 

보통 피로가 쌓여있는 여행중 기차나 버스 안에서, 어려운 책은 잠을 부를 뿐이다.

예전에 까페에 꽂혀있던 이 책을 우연히 집어들었다가 정신을 놓고 빠져들었던 기억이 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친구가 그만 가자고 할 때까지 코를 박고 읽었었다.  

읽다 만게 아쉬웠었는데 이번 짧은 여행 기회에 완독할 수 있었다.

하루키 플러스 오컬트라면 대환영이다.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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