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 - 제25회 시바타 렌자부로상 수상작 사건 3부작
가쿠타 미츠요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쫓기는 내용은, 특히 심리적으로, 영화든 책이든 질색이다. 더구나 자신의 잘못이나 치부가 까발려지는 것은, 소심한 나에게 있어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공포 그 자체인데 굳이 간접체험까지는 사양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디션프로도 제대로 못보는 나다.

호기심에 집어들었다가 결국 내리 읽어버리고는 으악! 하고 혼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처음엔 깜빡 속았다. 종이달의 전개가 좀 특이했던 탓이다. 여자 주인공의 서사를 시간 순서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게 벌어지고 난 후 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괜찮을 줄 알았던 것이다. 역시나 전혀 괜찮지 않았고 마지막장을 덮고 잠이 들 때까지 알 수 없는 공포와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신문에 실린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어쩌다가 그애가 그런 짓을 했을까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의 상황도 별다르지 않다. 돈이라는 허상에 머리칼을 휘어잡힌 채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모습이 그러하듯이.


낮에는 은행에 가 있었지만, 리카는 황금연휴 동안 줄곧 들떠 있었다. 손에 닿는 것도 폭신폭신하게 느껴지고, 발밑도 폭신폭신하고, 주위 사물의 색깔도 사랑스러웠다. 세상은 예전에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말캉거렸다. 그런가, 돈 있는 사람들은 이런 세계를 보는건가, 리카는 생각했다.
레스토랑에서도 바에서도 백화점에서 부티크에서도, 리카 네를 맞이해주는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 끊이지 않았다. 아주 친절하게, 농담 한두 마디를 섞어서 진심이 담긴 인사를 해주었다. 거기에는 악의도 경멸도 오만불손함도 없고, 그저 포근한 선의만이 있었다. 리카는 은행에 거액의 정기 예금이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모두가 그렇다고는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확실히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통장을 리카에게 맡긴 나고 다마에, 야마노우치 부부 등. 해맑게 웃고, 목소리가 거칠어지지 않고, 사람들을 밀어내지 않고, 쉽게 사람들 믿고, 악의 같은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이 누군가가 자신을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돈이라는 폭신폭신한 것에 둘러싸여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리카는 그래서 출근을 위해 역에 갈 때나 호텔로 돌아오기 위해 붐비는 전철을 탈 때면, 주위에 자각 없이 뿌려진 채 방치된 악의에 새삼 놀랐다. 먼저 가기 위해 노인을 밀치고 가는 여자가 있고, 그 인간 뒈졌으면 좋겠어 하고 깔깔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금발의 여자아이들이 있고, 가방에 손을 찔러 넣고 정액권을 찾는 리카에게 혀를 차며 어깨를 부딪치고 가는 젊은 남자가 있고, 할머니를 밀어내고 빈자리에 앉는 중년 남자가 있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잔돈을 던지는 역내 매점의 판매원이 있었다. 전봇대 아래에 토사물이 펼쳐져 있고, 약국 계산대에는 긴 줄이 있고, 번화가 보도에는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 나왔다.

p.252-253

이때부터 그야말로 리카에게 금액을 적은 숫자는 뭔가 의미 있는 돈이 아니게 되었다. 단순한 덩어리가 되었다. 80만 엔을 매달 5만 엔씩 갚으면 이자가 얼마이고 언제 다 갚을 수 있는지, 리카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중한 안내를 받고 브랜드숍 예약회에 가서 거기서 사용한 28만 엔이 언제 계좌에서 이체되고, 그 계좌에는 지금 얼마 있으며 자동이체 된 뒤에는 얼마가 남는지 계산하는 일도 없었다. 딱 10만 엔만 빌려주면 좋겠다고 한 고타에게 건넨 10만 엔이, 거래처 자녀에게 부탁받았다며 게임기를 사 보내달라는 마사후미의 요청으로 사 보낸 게임기 값이, 어느 계좌에서 인출된 돈인지, 애초에 그 돈은 누구 것인지 생각하는 일은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어느 은행, 어느 계좌의, 어떤 돈도 다 연결된 것처럼 느껴졌다. 나고 다마에의 돈도 소비자금융 ATM에서 인출한 돈도. 돈이란 것은 마르지 않는 용수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마르는 일 없이 계속 샘솟아, 주위 사람들의 목을 적시는 생활을 돕는 것.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퍼다 쓰면 되는 것.

p.301

사람이 많은 장소는 피하려고 생각했는데, 리카는 밤이면 밤마다 흥청거리는 노천시장 근처를 돌아다녔다. 무엇을 봐도 마음이 설레지 않았다. 오더베이드의 실크 드레스도, 보석이 박힌 반지도, 하다못해 엽서 한 장조차도, 갖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복을 느끼면 눈에 띄는 포장마차에서 국수나 볶음밥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방콕에서 산 조악한 티셔츠와 싸구려 스커트는 빨아서 입는데도 어째선지 나날이 지저분했다.
쏟아지는 빛과 소음 속을 무엇 하나 보지 않고, 무엇 하나 동요하지 않고 걷고 있으면, 리카는 때때로 소리를 지르고 싶은 흥분을 느꼈다. 억눌러도 억눌러도, 그것은 모공에서 분출되는 땀처럼 끊임없이 흘러넘쳤다.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갖고 싶은 것은 모두 손에 넣었다. 아니, 갖고 싶은 것은 이미 모두 이 손 안에 있다. 커다란 자유를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예전에 이른 아침 역의 플랫폼에서 느낀 행복감이 플라스틱 장난감으로 느껴질 만큼, 그 기분은 확고하고 강하고 거대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무엇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걸까? 지금 내가 맛보고 있는 이 엄청나게 큰 자유는 스스로는 벌 수 없을 만큼의 큰돈을 쓰고 난 뒤에 얻은 것일까, 아니면 돌아갈 곳도 예금통장도 모두 놓아버린 지금이어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p.338-339



리카 이야기 말고도, 돈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들도 무척 흥미롭다.
물건을 사지 않고는 못배기는 여자, 지나치게 아끼느라 현실을 희생하는 여자, 세상에 돈이 전부인 아내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자 등. 사연은 다르지만 다들 돈이라는 것에 발목 잡혀 불행한 사람들이다.



돈이란거 참으로 무섭다. 웬만한 공포소설보다 더 무서운 소설을 읽은 것 같다.


2015년 1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