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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오래된 글에는, 뭐랄까 운치같은게 있다. 시대 배경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데다 당시에 쓰였던 단어나 화법의 생소함이 만드는 여백을 나의 상상력으로 채우면서 이끌어오는 과거의 기억, 언뜻 들었던 것 같은 이야기들, 장면들에 의도치 않게 어떤 향수가 묻어나는 것 같다.
한마디로 오래된 글은 낯설지만 포근하다. 김승옥 소설의 첫문장처럼.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 -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드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軍用)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 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 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서울, 1964년, 겨울>
이런 오래된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온몸이 간질간질하면서 무엇인지도 모르게 그리움을 느끼곤 한다.
<설국>이 처음 출간되었다는 1937년의 일본을 나는 전혀 모른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어땠는지, 게이샤의 역할과 지위는 또 어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공과 고마코의 관계가 사회적인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몰라서 모르는 것들 뿐 아니라, 이 소설은 어느하나 제대로 설명된 부분이 없이 온통 모호함으로 채워져 있다. 고마코와 유키오, 유키오와 요코, 그리고 고마코와 요코로 이어지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중간중간 단서들이 나오지만 명확하지 않고 눈에 두텁게 뒤덮인 마을의 모습처럼 본래의 형태를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빛과 그림자의 모호함이 설국의 아름다움을 더욱 배가시키는 듯 하다. 손에 닿을 수 없어 아스라하고도 신비롭다.
거울 속에는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대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 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미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커다란 감정의 흐름이 남았다. 이는 물론 처녀의 얼굴이 그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창에 비치는 처녀의 윤곽 주위를 끊임없이 저녁 풍경이 움직이고 있어, 처녀의 얼굴도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말로 투명한지 어떤지는, 얼굴 뒤로 줄곧 흐르는 저녁 풍경이 얼굴 앞을 스쳐 지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제대로 확인할 기회가 잡히지 않았다.
기차 안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고 진짜 거울처럼 선명하지도 않았다. 반사가 없었다. 그래서 시마무라는 들여다보는 동안, 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잊어버리고 저녁 풍경의 흐름 속에 처녀가 떠 있는 듯 여기게 되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얼굴에 등불이 켜졌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밖의 등불을 끌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등불도 영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게 등불은 그녀의 얼굴을 흘러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빛으로 환히 밝혀 주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고 먼 불빛이었다. 작은 눈동자 둘레를 확 하고 밝히면서 바로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진 순간, 그냐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p.12-13
눈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리라, 일부러 도랑을 내어 목욕통에서 넘치는 뜨거운 물이 여관의 벽을 따라 흐르게 해놓았는데 현관 앞에서는 얕은 샘물처럼 퍼졌다. 검고 늠름한 아키타 개가 그 곳의 댓돌 위에 올라앉아 오래도록 그 물을 핥고 있었다. 창고에서 꺼내온 손님용 스키를 내다 말리느라 희미한 곰팡이 냄새가 더운 김으로 달착지근하고, 삼나무 가지에서 공동탕 지붕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덩이도 따스하게 모양이 일그러졌다.
p.44
나방이 알을 스는 계절이니까 양복을 옷걸이나 벽에 건 채로 두지 말라고, 도쿄의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말했다. 와보니 아니나다를까, 여관 방 처마 끝에 매단 장식등에는 옥수수 빛깔의 커다란 나방이 예닐곱 마리나 착 달라붙어 있었다. 옆방 옷걸이에도 작지만 몸집이 통통한 나방이 앉아 있었다.
창문에는 아직 여름용 방충망이 쳐져 있었다. 그 망에 나방 한 마리가 꼼짝도 않고 매달려 있었다. 노송나무 껍질 빛깔의 작은 깃털 같은 촉각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날개는 훤히 내비치는 엷은 녹색이었다. 여자 손가락 길이만한 날개였다. 맞은편에 펼쳐진 국경의 산들이 석양을 받아 이미 가을빛을 띠고 있어, 이 한 점 연녹색은 오히려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 아뒤 날개가 서로 겹쳐진 부분만 짙은 녹색이다. 가을바람이 불자, 그 날개는 얇은 종이처럼 하늘하늘 흔들렸다.
p. 77-78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라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준 교토 산 옛 쇠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마음먹었다.
p.134
주인공 시마무라는 평생 한번도 본적없는 서양무용에 대해 비평하는 평론가이다. 온전히 다 알지 못할 때에만 가질수 있는 찬탄과 경이가 이 소설 속에 있다.
2016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