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모모 / 2022년 2월
평점 :
이 책은 각 등장인물의 고백으로만 채워진 순수 고백록의 형태인데, 일본 소설에 경력이 있는 몇몇 독자들은 책의 구성을 알아채자마자 바로 경계 태세에 돌입할 것이다. 각각의 인물이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닐 것이며, 오로지 '그들이 바라보는 진실'에 불과하고, 철저히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에 되뇌일 것이 틀림없다.
최근 일본 소설의 동향도 몇 년 전과 같은지는 모르겠으나, 일본 소설을 엄청나게 읽어댄 3~4년 전까지만 해도 '누가 죽였나'보다는 '왜 죽였나'에 철저히 주안점을 두었었다. 아마, 소설을 더 다채롭게 풀어나가기에는 이유를 파헤치는 게 더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고백록적 구성은 '왜 죽였나'를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데 굉장히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각각 인물의 심리를 굉장히 직접적으로 묘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들이 바라보는 진실'밖에 없을 지라도, 그 시선과 사유 속에 우리는 '왜'를 찾아낼 수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얄팍한 증오심을 갖고 있다. 무가치해 보이는 이 증오심은 오로지 자신에 의해서만 발화할 수 있으며, 타인은 절대 공감할 수 없다. 개개인의 삶 자체가 특정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증오로 점철된 이 책은 그야말로 이야미스라고 할 수 있겠다. 뭐 하나 시원하지 않고 찝찝하다. 무기력한 독자는 화자의 얼룩진 마음을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잘못돼 보이는 생각과 행동을 독자들는 화자의 합리화를 통해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며 공감을 하게 된다.
서두에 말했듯 누가 죽였냐는 중요하지 않다. 왜 죽여야만 했나? 왜 죽었어야만 했나?가 중요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우리는 각각의 인물들이 풀어내는 죽음에 대한 관점을 통해 살인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사실, 살인의 이유를 찾아나가다보면 결국 '왜'는 인간 이상의 무엇인가로 확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 죽였냐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왜 살인자가 살인을 결심하게 됐냐를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살인의 결심은 그 사람의 환경적 요소가 반영되고, 그 환경은 거대한 사회의 무언가다. 그렇게 추리 소설은 사회 소설로써의 역할도 수행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전쟁'과 '불륜'이라는 사회적 키워드를 잘 녹여냈다고 보고, 그 환경 속 '인간 본연의 질투심'을 배치해 증오로 점철되었지만 꽤 설득력 있는 구성을 만들었다.
오랜만에 읽는 일본 추리 소설인데 역시 즐겁다.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다. 매일매일 신나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던 그 시절. 그때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일본 추리 소설 특유의 무드가 전형적으로 잘 녹아 있다. 수많은 진실이 존재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님과 동시에 날카로운 진실이 된다. 악의가 한데모여 마침내 목을 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