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발이 둘 달린 우리보다 확실히 개는 더 많이 세상을 딛고 다닐 것이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는 우리보다 개야말로 확실히
납죽 엎드린 자세로 세상을 더 면밀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보다 몇 백배 더 뛰어난 후각으로는 나무가 물을 빨아들이고
옥수수알이 영글고 바닷물이 졸아드는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을 것이고
안테나 같은 그 수염들로는 사람의 슬픔이 고통으로 억눌려지는
그 세밀한 압력과 방향마저도 분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개의 눈을 통해서 사람의 일을 더 촘촘히 알게 되었다.
고유한 말글을 가졌고 키가 껑충 큰 우리들은 그 능력으로 고작
상대팡 티셔츠 왼쪽 가슴께에 조그맣게 수놓아진 말탄 폴로남자의 모양이
오리지널인지 모조인지를 분간하는데나 쓰고 있다.
그 기운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하고 잃지 말아야 할 것으로 잃고는
발을 동동 굴리며 슬퍼한다.

사람의 살이에 필요한 것이 발바닥의 단단한 발 굳은살만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하루하루 무엇을 단단히 채워가고 있는가.
무엇으로 든든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말이다.

(2008.05.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랫말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어른을 위한 동화 12
황석영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0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준비하고 있었다.
달큰한 아지랭이 같은 삽화가 곁들어여 있긴 했어도
분명 이 책에도 민족적 수난과 갈등, 반목과 화해 같은 것이
어김없이 자리잡고 있을 터이므로 그에 맞게 감응해야지, 하고.

긴장을 지킨 듯 하다가도 바보군인 아저씨의 혀짧은 경례소리며
똥똥한 친이한테 쥐 넘기는 모습이며, 일부러 줄에서 떨어진 곡예단 누나 대목에서
그만 웃기도 하고 넋없이 해맑은 감상에 빠지기도 했다.

아니지 아니지. 뭔가 있을 거야. 뭔가 또 가슴을 갈코리로 잡아채며
마음 아리게 하고 참회하게 하고 그래도 어와둥둥 다시 손잡게 할거야..
하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넘기고 나니 비로소 착한 동화책임을 알았다.

동화책은 무릇 상상력의 대역폭을 넓혀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은 그저 옛날엔 잘도 생각하고 행동하고 하던 것을
그저 잠깐 들추어 내어 상기시켜주기만 해도 되는 것인데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으며 새롭게 갱신하고 가다듬고 자라는 것에 비해
어른들이 동화책을 읽고 정화하고 재정비하는 것은 게으르고 더디다.

아이들이 동화책 읽고 깨우치고 느끼는 것, 반만하자 어른들아.

(2008.05.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든 싫든 손님이 닥쳤다.
반가웠거나 기다렸거나 간에 손님이 와서 여러 날 머무르고자 하면
당장 그 날 저녁 찬꺼리부터가 걱정이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이라 한 숟가락 더 느는 것도 여사 걱정이 아닌데
순박한 시골 영감님은 안방까지 내주는 바람에 노부부는 건넛방에서 골병 들고
아이들은 굶주린 배가 더 곯는다.

작가의 말대로 맑시즘이나 기독교 모두 근대기 초입에 들이닥친 우리네 손님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왜 저렇게 훈훈한 단어를 갖다 붙였을꼬' 싶지만
그 시절에는 '손님'이란 말이 지금처럼 정겹지마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공동체'여야 옳았고, 남의 집 장독 갯수까지 꿰차고 있던
마을 단위의 거대 가족이어야 맞는 것이지, 낯선 복장 낯선 말투의 손님이란 것은
반가움이라기보다는, 좋게는 호기심 나쁘게는 경계심으로 시작되어서
궁극에는 분란과 갈등, 편가르기와 복수로 끝나는 불씨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손님은 떠나가는 손님일 뿐이다.
마을 터잡이들이 그 분란에 얼반 다 죽거나 떠났거나 했어도
누군가는 당대가 살아남거나 후대가 남거나 하여
고단했던 손님치르기를 회고하고 끼워 맞춰보고 털어내고 용서하고 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까지가 진정한 시대의 주인장들이 완수해야할 손님맞이가 아닐까.
아직도 손님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참된 주인 노릇은 못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2008.05.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디오 라디오
구효서 지음 / 해냄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라디오가 생겨나기 전엔 다같이 우체부 영감님을 기다려야 했고
다같이 제철 과실을 먹으며 다같이 장날을 기다렸고 서낭제를 준비했다.
뭐 약간씩은 힘의 질서란 게 작용하긴 했어도 가장 부지런히 몸 놀린 녀석이
개구리 뒷다리를 가장 많이 먹을 수 있었고, 오색사탕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라디오가 생겨나고 테레비가 생겨나고 전화기가 생겨나고
마침내 오늘날은 수입자동차가, 종부세가, 와인 디켄팅이 생겨나고 말았다.

라디오를 타고 온 전파는 신내림처럼 실체도 없었지만 분명 존재했고
그 덕에 옥님이는 단짝친구 묘선이를 홀대해도 라디오를 벗삼을 수 있었다.

무형의 존재에 대해서, 의식주 상에 있어 무용의 물체에 대해서
가치가 매겨지고, 합의된 그 가치에 대해 사람들이 순순히 굴복할 즈음
정작 한내마을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미래를 예지하던
절대적 가치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잣대이던, 라디오같은 묘선이는
공동체의 냉대와 근대화로부터의 재촉, 이데올로기간 소극으로 인해
번듯한 매무새에 구멍이 나고 텅빈 속을 들여다보이며 죽어갔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먹긴 다 먹나. 결국은 우리가 다 먹었다.
우리가 따 먹고, 우리가 갈아먹고, 우리가 팔아먹었다.

(2008.05.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니의 폐경 - 2005 제5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누군가의 폐경을 지켜본 적 있는가.
어미의 폐경은 지켜보기 어렵다.
자식이 모성을 하나의 여성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제법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내가 그만큼씩이나 태연자약 만물을 헤아릴 때쯤이면 어미는 이미 늙어있다.

아내의 폐경쯤이라면 내가 철도 들었을 때고, 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니
지켜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아직 초산도 안해본 젊은 아내이긴 해도, 내 남편을 떠올렸을 때
아내의 폐경은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겪는 것이라해야 마땅한 듯 싶다.
나이든 부부가 함께 서서히 번식력을 잃어가면서 풍화되어 가는 것.
그것은 이를테면 아내가 화장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의 폐경을 지켜보는 일은 쉽지 않다.
수상작 김훈의 <언니의 폐경> 속 자매들도 이러저러 사정이 들어맞아 그렇지
자매간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한 여자의 폐경을 고요히, 소소하게
지켜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게 나는 제일 가슴 시렸다.
누구도 한 여자의 폐경을 지켜봐주지 않는다.
볼 기회가 없어서 그렇기도 한데, 게다가 인정하기 싫어서 그러기도 한다.
공부 잘하는 딸도, 노련한 경영인 남편도, 생글거리는 백화점 점원마저도
우아한 노부인의 품위와 체면을 잃지 말아주기를 바라고들 있는 것이다.

더욱 딱한 것은 본인 자신마저도, 흰머리나 주름살처럼 서서히 물들지 않고,
예고없는 생리혈처럼 맞닥뜨리듯 홧홧하게 닥쳐온 자신의 폐경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심지어 분해하며 서글퍼하고 막연해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훈이 그런 그녀들을 시크한 듯 표시 안나게, 그러면서 뭉근하게
다른 이들도 다같이 볼 수 있도록 나서서 지켜봐주어 내가 다 고맙다.
특히 그 언니가 목 사례 걸린 손주를 노련하게 뒤집어 톡톡 살려낼 때는
그간 언니를 외롭게 해온 모든 것들에 대해 득의양양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언니는, 늙어가고, 예민해지고, 또 무던해지고, 감격해하는 언니들은
응급처치술 따위 모른다 하더라도 늘 득의양양하게 살아가면 좋겠다.

(2008.05.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