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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라디오
구효서 지음 / 해냄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라디오가 생겨나기 전엔 다같이 우체부 영감님을 기다려야 했고
다같이 제철 과실을 먹으며 다같이 장날을 기다렸고 서낭제를 준비했다.
뭐 약간씩은 힘의 질서란 게 작용하긴 했어도 가장 부지런히 몸 놀린 녀석이
개구리 뒷다리를 가장 많이 먹을 수 있었고, 오색사탕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라디오가 생겨나고 테레비가 생겨나고 전화기가 생겨나고
마침내 오늘날은 수입자동차가, 종부세가, 와인 디켄팅이 생겨나고 말았다.
라디오를 타고 온 전파는 신내림처럼 실체도 없었지만 분명 존재했고
그 덕에 옥님이는 단짝친구 묘선이를 홀대해도 라디오를 벗삼을 수 있었다.
무형의 존재에 대해서, 의식주 상에 있어 무용의 물체에 대해서
가치가 매겨지고, 합의된 그 가치에 대해 사람들이 순순히 굴복할 즈음
정작 한내마을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미래를 예지하던
절대적 가치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잣대이던, 라디오같은 묘선이는
공동체의 냉대와 근대화로부터의 재촉, 이데올로기간 소극으로 인해
번듯한 매무새에 구멍이 나고 텅빈 속을 들여다보이며 죽어갔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먹긴 다 먹나. 결국은 우리가 다 먹었다.
우리가 따 먹고, 우리가 갈아먹고, 우리가 팔아먹었다.
(2008.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