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성 그리고 역사
진동원 지음, 최수경 외 옮김 / 박이정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잘 쓰여진 논문같은 책이다.
중국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문헌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논평을 다는 것에 충실한다.
방대한 양이지만 주목할 만한 감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각종 힘(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서의)으로부터
배제,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소외를 가중화 하면서 억압받은 것이다.
다시 말해 힘을 가진 여성은 성적으로 억압 받지도, 시대적 교리에 순종하지도 않았다.
동시대라도 모계 중심의 부족에서는 처녀성을 일부러 파괴하는 의식을 치뤘고
중국 황실의 발언권 강한 공주는 남첩을 여러 명 두었다.
권력이 높은 가문의 아내는 그보다 못한 남편을 업신여기기도 했다.

물리적 힘이 권력화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고대 남성들이 프로게스테론과 돌방망이를 내세워
약탈혼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고착화된 사회 제도와 사상들은 더욱 더 여성들을 압살했다.

둘째, 여자가 여자이기에 천성적으로 물질적으로 불완전하고 우둔하다는 주장은
그 논리의 취약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처벌이나 회유로써 교육하고 세뇌시켜야 했다.
갈릴레오도 핍박을 받았지만 지동설의 근거가 제시되고 정설을 받아들여지기까지
이천년씩이나 걸린 것은 아니다.
물론 여성의 하등화 작업은 이천년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음에도 실현되지 못했지만.

셋째, 심한 박해 속에서 오랜 시간이 걸려 현재까지 이룩한 여성 평등권은
여기가 종착역 인가 하는 것이다.
남편을 설겆이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식기세척지 CF가 나온 지금을 두고
나중에 이천년 후 또는 이백년 후 또는 이십년이나 이년 후에라도
"그때는 하이힐이라는 걸 신었다더군. 나참 이게 말이냐 되냐구" 하듯이
나중에 자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역사는 진화한다.
더디가도, 돌아가도 진보라는 중력을 이길 수는 없다.

(2008.04.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심청, 연꽃의 길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쓸만큼만 가지고 가진 것만큼만 쓰던 시절이 있었다.
싸움도 슬픔도 두려움도 없던 깨끗한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은 결핍을 알게 되었다.
필요한데 갖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이고 가여움이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심봉사의 젖동냥이 시작되었다.
후에 청이의 예기로 보아 어쩌면 심학도는 젖을 얻는 대신
노랫자락을 들려주거나 성접대로써 거래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선땅 복사골에서도 거래라는 것이 생겨나자
그 다음부터는 못 팔 것이 없었다.
쌀로 바꿔준다하면 딸의 목숨도, 이름도, 몽뚱아리도 팔았다.

청이는 그렇게 젖내기서부터 거래를 깨닫게 되었다.
그네는 돈이 안되는 이름은 그때 그때 적당히 고쳤고
돈이 되는 몸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팔았다.

힘이 세고 목소리가 크다 뿐이지 양물 한토막에 쩔쩔매는 사내들도
결국은 그 돈 되는 여자 몸 안에서 난 것을 알았다.
어느 나라 어느 난중 어느 협박에도 그네는, 하여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네는 여자 몸 안에서 난 것이라면
사내고 아기고 할 것없이 어엿비 여겼다.

그중에서도 거래할 밑천이 없는 천애고아들을 거두어 키웠다.
근대화의 상징, 경제개념의 기본인 'give & take'의 순환고리가
끊어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반 개를 내주고 반 개를 받겠다고 아둥대는 우리 잡배들이
관음보살님의 그 굽어살피는 시야를 어찌 가늠하랴.
뿌리에 흙 한 점 묻히지 않고 피는 연꽃의 원대함이다.
각자 마음 속 오그라붙은 '연민'이란 이름의 관음보살이 이와 같다.

(2008.04.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5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 단편 가운데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하나였는데
재혼한 남편이 아이들과 모친 때문에 본처가 있는, 그의 명의로 된 집에
다녀가곤 하는 이야기이다.

단편들의 모든 주인공은 그림같은 결혼생활에서 다들 한웅큼씩 비어있는데
아예 독신주의자거나 게으른 노처녀, 불륜이거나 남자친구의 조카를 유혹하거나
하는 식이다.

그중에서도 이 편의 주인공들은 재혼이기는 하나 그나마 가장 정상적인 부부,
그러니까 행정적으로도 깔끔하게 부부가 맞고, 감정적으로도 서로 위안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가장 이상적인 부부이다.

그러나 작가는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이상성 때문에
주인공 아내로 하여금 후실이나 애인처럼 스스로 느끼게 만들어 버렸다.

미사리 까페에서 중년 남녀가 다정하게 나란히 앉아 있으면 불륜이고
멀뚱히 마주 앉았다 별 말도 없이 나가면 부부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마침 그 얘기를 해준 사람은 지금은 남편이고 그때 우리는 애인관계로써
미사리 까페에 앉아 다정한 눈빛을 나눌 때였다.

설레고 행복하고 다정하면 정상적인 오랜 부부가 아닌가?
그럼 정상적 부부 사이에서는 어떤 긍정적 성향이 생겨나는가.
의리? 책임감? 연대의식?
.. 결혼 11개월차가 답하기에는 어려운 질문이라 우선 덮어둔다.

(2008.03.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야 외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항재.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셰익스피어의 희곡같다.
절제된 소품으로 시작해서 장황하고 호들갑스러운 이야기와 감정들이 요동친다.
갈등은 최고점으로 치닫고 마침내 디지털 기기처럼 여운도 없이 꺼진다.
머릿 속은 온통 화려한 말놀림으로 가득차고 엄청난 양의 대사를 읽느라
마치 내가 그 말들을 내뱉은 양 입안이 마르고 귀가 웅웅거린다.

'슬프다'는 단 한 줄로 감상을 표하던 외로운 현대작가의 글을 읽다가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일쑤인 방대한 양의 슬픔에 대한 묘사가
사실 나를 숨막히게 한다.
누군가의 추격을 피해 가파른 내리막길을 엎어질 듯 달려가는 위태함이라니.
책 읽는 허리를 잠시 노곤하게 의자에 기댈 여지도 주지 않는다.
다급하고 불안하다.

그렇게 달리다 맨홀 구멍 속으로 쑥 빠진다.
잦아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라짐이다.
연극 무대 위 거튼이 한 번에 떨어진다.
관객은 박수칠 경황도 없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정신이 멍해져 있는 순간의 침묵.

번뜩 정신이 든 누군가가 박수를 친다.
어쩌면 정적을 깬 것은 전혀 내용에 몰입하지 않던 누군가의 재채기 소리일수도,
어린애의 뒤채임 소리일수도, 또는 정신을 뺏긴 관객의 호주머니에서 떨어져나온
만년필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소리일 수도 있다.

그 소리에 나도 번뜩 정신을 차린다.
숨이 가쁘다.
도스토예프스키. 이 열정이고 수다스런 공상가 같으니라고!

(2008.03.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유승훈 지음 / 살림 / 200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산 정약용이 지하주차장 기사 대기실 같은 골방에 패거리들과 둘러 앉아
담배를 뻑뻑 펴가며 화투패를 쪼는 상상이 우습기에 책을 펼쳐들었다.
실로 태조 이성계에서부터 많은 사대부는 물론 러시아 문화 도스토예프스키까지
친구, 하인, 기생들과 어울려 격구, 투전, 룰렛을 즐기며
마누라 옷까지 노름빚으로 잡혔더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한 시대 속 도박꾼의 비중이 마치 동성애자 비율이 그렇듯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면야, 노름 또한 김홍도의 민화처럼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삶의 풍경이겠으나
국가가 기를 쓰고 강원랜드, 경마, 로또 등의 사행사업을 권장하고 있는데야
그 문제가 어찌 기막히다 아니할까.

이런 저런 감상으로 흥미롭게 읽기는 했지만 책 자체의 상품성은 중저 점수다.
약간의 대중성을 의식한 논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북디자인은 성의없고,
사진과 그림 해상도는 조악하다.

나 역시도 호모루덴스의 후예인지라 책 제목과 내용만 설핏 보고
숨은 보배같은 책이 아닐까 도박을 해본 셈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화투패 자체도 아름다워야 맛이다.

(2008.03.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