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외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2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항재.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셰익스피어의 희곡같다.
절제된 소품으로 시작해서 장황하고 호들갑스러운 이야기와 감정들이 요동친다.
갈등은 최고점으로 치닫고 마침내 디지털 기기처럼 여운도 없이 꺼진다.
머릿 속은 온통 화려한 말놀림으로 가득차고 엄청난 양의 대사를 읽느라
마치 내가 그 말들을 내뱉은 양 입안이 마르고 귀가 웅웅거린다.

'슬프다'는 단 한 줄로 감상을 표하던 외로운 현대작가의 글을 읽다가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일쑤인 방대한 양의 슬픔에 대한 묘사가
사실 나를 숨막히게 한다.
누군가의 추격을 피해 가파른 내리막길을 엎어질 듯 달려가는 위태함이라니.
책 읽는 허리를 잠시 노곤하게 의자에 기댈 여지도 주지 않는다.
다급하고 불안하다.

그렇게 달리다 맨홀 구멍 속으로 쑥 빠진다.
잦아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라짐이다.
연극 무대 위 거튼이 한 번에 떨어진다.
관객은 박수칠 경황도 없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정신이 멍해져 있는 순간의 침묵.

번뜩 정신이 든 누군가가 박수를 친다.
어쩌면 정적을 깬 것은 전혀 내용에 몰입하지 않던 누군가의 재채기 소리일수도,
어린애의 뒤채임 소리일수도, 또는 정신을 뺏긴 관객의 호주머니에서 떨어져나온
만년필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진 소리일 수도 있다.

그 소리에 나도 번뜩 정신을 차린다.
숨이 가쁘다.
도스토예프스키. 이 열정이고 수다스런 공상가 같으니라고!

(2008.03.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