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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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기 어려운 공을 그냥 흘려 보내는 일은 정작 쉽지 않다.
홍적세 지구 도시에서 생존할 만큼의 에너지보다 더 가졌기 때문이리라.
잉여 근력과 차고 넘치는 규범과 에티켓들, 관념들, 피하지방들 때문에
사실 허리가 끊어져라 신기록을 갱신해 해는 일만큼 또는 그런 일보다
'노히트 노런'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는 잘 안다.

이제 그런 슈퍼한 일은 진짜로 슈퍼맨이나 할 수 있는 일이 돼버렸다.

우리는 밤새 일하고도 다음날 BB크림으로 표정을 상큼하게 만든 뒤
클라이언트 고명딸의 초등학교 입학식을 기억해뒀다 발랄하게 축하하거나
정해진 시간내 더 많은 업체를 방문할 수 있는 기가 막힌 동선을 짜거나
내 안의 잠재력을 세 배 또는 세 제곱이나 증폭시킨 뛰어난 내가 되어서
연봉을 올리고 명문가 예식날이 아니어도 스테이크를 사먹을 수 있게 해주는
울트라 초긍정성을 전도하는 처세술 책을 한자리에서 읽어낼 수 있거나
하다 못해 굶주린 남학생 셋에게 끓여먹을 라면이 두 개 밖에 없을 때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양을 늘일 수 있는 지에 대해서나 알고 있을 뿐이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받기 힘든 공은 받지 않는 그런 슈퍼한 일은
좀처럼 해낼래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삼미 야구선수들과 그의 팬클럽과 또 그걸 써낸 작가가
'슈퍼스타즈'(슈퍼스타들)일 수 밖에 없는 이유 아니겠는가.

(200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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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끓는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19
박상률 지음 / 사계절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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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쌀을 살 돈이 없을 때 어째 어째 무슨 수로 술을 마신다.
아이는 도시락을 싸갈 형편이 안되면 같은 반 아이들의 밥을 얻어먹는다.

어른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거나 너무 늦게 해서 일을 크게 만드는데
아이는 고맙단 인사를 깜빡 잊었다 하더라도 금방 정신을 차려 머리를 조아린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자장면을 자주 사주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지만
아이는 가진 게 맨밥 뿐일 때 맛있는 치약이라도 비벼먹을 생각을 한다.

그렇게 어른들은 크고 작은 문제를 만들고 증폭시킨 뒤, 사라진다.
남은 아이는 쌀을 씻고 생리를 하며 한뼘 밭에 씨앗을 심는다.

생명을 얻는 기억이 어른보다는 더 잘 떠오르기 때문일까?
갓 태어나 젖꼭지를 빨던 본능이 어른보다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더 풍만한 생명력을 가진 아이 '순지'가 끓여내는 밥은, 그래서
희망을 상상하는 데 허약한 어른들을 위한 공갈 젖꼭지 같은 것이다.

(200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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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살인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권수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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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살인, 현학적 은유와 수사로 치장된 비장한 살인이 큰 볼거리다..
베네치아 곤돌라의 아름다움이, 주인공 흑란이 민첩하게 해보이는 검술의 아름다움,
많은 비밀을 간직했던 고급창녀 루차나 살리에스트리의 풍성한 머리칼의 매력 역시
그 화려함의 연장선에서 손에 잡힐 듯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연쇄살인 추리소설이라기에 너무나 찬미적으로 심오하다.
장갈하게 함축된 열정, 폭발하듯 격정적인 침묵이 마치 오페라 클라이막스가 끝난 뒤
박수가 터져나오기 직전의 정지 상태와 같은 긴장과 감동을 전해준다.
피와 진흙이 뒤엉킨 혐오스런 살인이긴 해도 그 안엔 엄숙한 경건함이 깃든다.

바로 예의 그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단테의 시들로 인해, 크리스털 드레스로 인해, 금빛 셔츠의 한껏 부푼 소매로 인해,
단 한 번 여행한 적 있는 베네치아의 그 고풍스러우면서도 자유로운 아름다움을
추억함으로 인해, 바로 그 모든 아름다움들로 인해 장편소설 속 다양한 감상들은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흥취 안에 녹아버리고 만다.

(200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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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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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움이란 말 만큼이나 오도 가도 못할 것이 있을까.
지긋지긋하게 하고 또 하고 보고 또 보아야 하는 일을
정작 내벗어던지면 그 떄는 지겨움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맞지 않고
그렇다고 그 하고 또 하고 보고 또 보는 일을 순순히 받아들여 즐긴다면
그 또한 지겨움은 아니므로 다르게 써야 옳다.

그 오도가도 못할 절박함으로 참 밥을 오래도 먹고들 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받은 돈으로 자전거도 사고 망치도 사고 새 지우개도 산다.

많은 여성팬들이 48년생 반영강님 글쟁이를 사모하다 못해
가엽게 여기고 모성 본능을 품는 까닭은 바로 이 절박함을 연민해서가 아닐까.

나는 밥이 싫소! 하며 핸드폰을 내던지고 카우보이 부츠를 꿰차고 떠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밥이 너무 좋소! 하며 밥이 내게 준 풍요와 영광을 직간접적으로 찬미 또는
과시하는 것도 아닌 오도 가도 못할 그 밥상머리에서 또 밥알을 씹고 국을 떠 먹는
그 처연한 모습에서 쌀을 씻어본 여자는 그 여자대로, 데모를 해보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본 청년은 또 그대로, 전립선염을 몰래 앓는 상무님은 또 그대로
김훈을 사랑하고 격려하며 그가 잘 살아남기를 기원하는 것은 아닐까.

김훈이 쓰러지면 나도 쓰러질 것 같아서, 늘 그랬듯 첨단과 광속과 폭발만이 살아남아
"역시 그렇구나. 역시 안되는 게 맞았구나" 하며 헤어날 수 없는 비탄에 빠지고
또 오롯이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만 같아서
나도 김훈의 글들에게 말없이 응원을 보내는 한 축이다.

글쓰기란 노동을 나처럼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산중 칡뿌리나 시상의 포도주, 영감의 만찬으로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나같이 밥 먹어 근력을 만들고 뇌와 어깨죽지의 근육을 놀려
문장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글쓰기라는 노동에
응전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준 선배 노동자에게 감사와 감격의 인사를 보낸다.

(200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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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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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약력을 읽어보니 예술과 문화 관련하여 재능 없는 부분이 없다.
표지처럼 다정하고 순박한 일러스트가 내심, 그래서 기다려졌다.

딱 한 장이었다.
'일인실로 옮겨지면 이제 틀린 거'라던 그 병원 독실에 누운 엄니가
마리오네트처럼 각종 호스로 연결된 채 심전도 싸인을 통해서만
그저 살아 있음을 증명받고 있던 바로 그 그림.

아니다. 우리 엄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코안경에 스카프를 둘러묶곤 남보다 자신이 더 웃겨 죽는 바보춤을 추고 있어야 하고
앓아누운 내 매트리스 머리 맡을 떠나지 않은 채 찰싹찰싹 고스톱을 치고 있어야 한다.
장아찌 된장을 뒤척이고 값싼 연근이라도 꽁지까지 남김없이 썰어담고
뿌요뿌요 게임을 하거나 누구니 몰라도 밥 먹고 가라고 붙잡아 앉혀야 한다.

설령 그것들이 '엄니'의 항시 모습 또는 본래 모습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그냥 그것이 엄니라고 믿고 살 기세다.
엄니가 그러기를 원할 것이고, 나 역시 그래야만이 가끔 속상한 일로 눈물 흘려도
엄니의 돼지고기 찌개를 푹푹 떠먹으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엄니들에게, 내가 나이드는 것을 감춤으로써
무한한 생명과 건강을 보답할 수는 없다.
철마다 새이 바뀌는 도쿄타워에 모시고 간다고 해서
엄니의 행복을 보장할 수도 없다.

엄니는 내가 곁에서 그냥 초밥 한 통을 다 먹어치웠을 뿐인데도
마음 속으로 도쿄타워를 다섯 번은 넘게 갔다 오셨다.
엄니가 내게 있어서 엄니여서 좋을 모습으로, 나는 눈물을 멈추고,
엄니를 기억하리라.

(2008.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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