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섬으로 가다 - 열두 달 남이섬 나무 여행기
김선미 지음 / 나미북스(여성신문사)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꿀벌이 어느날 갑자기 멸종하면 인류 문명과 생존도 따라 중단되리라는 진단이 있었습니다. 실제로야 인간은 또다른 대안을 찾아내고 말겠지만, 그 와중에서 겪어야 할 엄청난 비용 소모와 희생, 그리고 혼란은 상상만 해도 아찔하죠. 아무튼, 마땅히 만나야 할 그 누군가, 무엇인가가 기어이 제 갈 길을 찾아 상봉하는 과정을 보노라면, 자연의 섭리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나무, 섬으로 가다." 제목부터가 아름답습니다. 본디 영어의 plant나 한자어의 식물(植物)이나, 한 자리에 고정되어 움직이질 못하는 본성을 지적한 데서 공통으로 어원이 비롯했지요. 그런 나무가 어찌해서, 자신이 잘 어울리고 가장 예쁜, 당당한 모습을 뽐낼 만한 환경으로 '갈" 수 있었을까요? 사실 이 책은, 남이섬의 기기묘묘 아름다운 나무의 식생 기원을 중점으로 다루지는 않았습니다(언급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자연의 섭리가, 마치 충분한 영감을 받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예술가의 심사를 본따듯(아니, 이 말은 앞뒤가 바뀐 소리입니다, 사실), 어쩌면 이렇게나 알맞은 장소에 저 무수히 빛나는 나무, 나무, 나무들을 고루 빚어 놓았는지, 그럴 수 있었는지, 감탄하고 또 감탄하는 중, 나무가 발이나 달린 듯 성큼성큼 걸어 와 포즈를 잡기나 한 양 즐거운 상상에 잠기게도 됩니다.

청평 댐은 1944년에 완공되었고, 이 청평 댐이 뜻하지 않게 물 속에 가두어 놓은 땅 한 자락이 바로 남이섬이라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평안북도의 수풍 댐이라든가, 부전-장전강 수력발전소 등 여러 곳에 이런 류의 공사가 행혀졌습니다. 동기는 다르지만 비슷한 시대 루스벨트 대통령이 벌인 사업으로부터 자극을 받긴 했을 겁니다.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알고보면 물 밑에서 뭍과 이어져 있지 않은 섬은 없다. 그렇다면 섬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 격절을 뜻하는 것일까." 공간을 시간으로 치환 가능한 건 꼭 상대성 이론의 세계 안일 필요는 없겠습니다. 아니 어차피 상대성 이론 자체가 (알고 보면)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하지 않습니까.

"가슴에 사쿠라 꽃가지를 꽂아주며 식민지 청년들을 사지로 내몰던 야만의 시대도 지나갔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사실 특정 식물에 애써서 국적의 라벨을 붙이거나 문화적 심상과 연결짓는 건 천박한 시선입니다. 저자는 아픈 역사의 끝자락은 그것대로 아프게 되새기되, 예쁜 벚나무를 그저 벚나무로 바라보며, 이처럼이나 아름다운 꽃을 봄에 피우려면 겨우내 얼마나 에너지를 늙은 몸에, 사력을 다해 끌어모았을지를 먼저 상상해 보자고 하십니다. "벚나무가 다른 수종에 비해 수령이 짧아 백 년 이상 나이 먹은 걸 찾아보기 힘들다"는 문장으로부터도 저는 새로운 사실을 배웠네요.

유명한 관광지에서 특별히 보호 대상이 되는 몇몇 나무 중 유독 미선나무가 (제 개인 사례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으나) 자주 보였습니다. 이 미선나무의 "미선"은 궁정 시녀들이 왕이나 비의 곁에서 들고 있던 의장 부채를 가리키는 말로서, 열매가 그 부채를 닮았다고 하여 이름이 그리 붙었다고 하십니다. 옆에 선 "명자나무"를 두고는 참 이름이 촌스럽다고도 하시는데, 음... 특정 세대에 꽤 흔히 발견되는 이름이기도 하므로 글쎄요 그리 말씀하심은.... ㅎㅎ 다만 아가씨나무의 청초한 자채는 과연 그 이름의 풍취와 잘 부합한다고도 하십니다. 독자로서 저 역시 이곳저곳의 자연 풍광을 둘러볼 때 이 나무를 보고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딱따구리는 나무를 파 대는 특이한 생리 때문에 유명합니다. 쪼여대는 나무가 얼마나 아플지, 아직 식물의 통각 체계(?)에 대해 학교에서 안 배운 어린이들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만도 하지만, 사실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 저자께서는 "아픔"은 고사하고, 이런 딱따구리의 습성에 대해 혹 나무의 기능을 해치지 않는지조차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어차피 본체를 떠받치는 죽은 조직만 골라서 파내는 행태이기 때문이죠. 이처럼 자연의 섭리란, 솜솜 따지고 들어보면 모두가 공존이요 공생의 길입니다. 아 물론, 임업인들이 그토록 골치를 앓는 소나무재선충의 창궐 같은 걸 두고도 같은 말을 태평히 해 댈 수는 없습니다. 모든 걸 인간 중심 시야로 재편하자는 게 아니라,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어떤 종과 동맹하여 다른 종을 격퇴할 수도 있는 겁니다.

"잣나무 열매는 높은 가지에서 익는다... 겨울 동안 쓰레기통이나 뒤지던 청설모들에게 얼마나 기다리던 행복한 순간일까." 역시 자연은 대립과 파괴보다는 서로의 속살을 살찌우는 다정하고 흐뭇한 연계를 더 자주 맺습니다. "멀리 있는 꽃은 높은 곳을 지나는 바람에만 기대기 때문에 땅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걸어야 할 바른 길, 어울리는 길은 따로 있기 마련이죠. 두더지와 지렁이는 열심히 땅을 헤집는 게 당당하고 본분에 맞는 처신입니다.

이 책은 "한 달에 한 번 남이섬이 그때그때 갈아입는 옷을 구경하기 위해 반드시 찾는" 저자님의 유별난 생태 사랑이 그 저술 동기입니다. 지금은 봄이 아직 겨울의 시샘을 받는 환절의 문턱입니다만, 책의 중반을 넘어가면 이제 신록과 녹음의 계절에 본 광경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소개됩니다. 사실 문장 문장이 너무도 좋아서, 기막히게 촬영된 사진들과 함께. 한 편의 장구한 산문시를 읽는 느낌도 듭니다.

"지난달 남이섬 숲에서 가장 빛나 보이던 밤나무는 이제 무대 뒤로 숨었다. 이제 그 누구를 유혹할 필요가 없다." 저렇게 무엇인가가 그토록 자태를 뽐내는 이유가,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혹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 반드시 숨어 있어서일까요? 사람 위주의 편할 설명은 혹 아닐지요? 수컷이 암컷을 끌기 위해 유독 요란하게 단장하거나, 성별의 행동이 정반대로 바뀌었다거나 하는 건 물론 생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이 맞습니다. 허나 나무는 무엇 때문에 이처럼이나 무대에 이처럼 아름답게 치장하고 오르는 걸까요? 어쩌면 답을 찾는 게 무익한 시도입니다. 자연의 모든 섭리는 그 자체가 원인이요 결과일 뿐 다른 무슨 "변호나 변명"이 필요하겠습니까.

"6월이 되면 낙상홍은 잎겨드랑이에 앙증맞은 꽃들을 다닥다닥 피운다는데 나는 미처 보지 못했다." 저자님처럼 부지런히 자연과 나무들의 한껏 피어오른 자태를 즐겨 완상하시는 분도, 아직 구경 못한 모습이 따로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이나 자연의 장관은 천태만상이며, 어쩌면 필요한 때의 합당한 감상 고조를 위해 일부러 아껴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11월은 도끼를 위한 달"이라고 읊은 알도 레오폴드의 구절을 인용하며 저자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내 몸에는 늑대의 피가 흐르나 보다"라며 농담처럼 말하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사실 차오르는 달을 보고 설레는 건 늑대뿐 아니라 생명체 대다수가 겪은 생리요 감정입니다. 도끼가 제 할 일이 잔뜩 생긴 11월은 사실 인간이 이기적 욕심을 위해 장작을 마련하는 시기입니다만, 나무를 사랑하시는 저자 역시 섬 곳곳에서 통장작 타는 냄새를 풍취 있게 즐기십니다.

메타세쿼이아 길은,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남이섬 중에서도 높고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덕에, 사랑을 확인하려는 연인들의 성지"입니다. 그 왁자하던 연인들도 초겨울 햇살의 짧은 자취가 사라지면 서둘러 선착장 쪽으로 빠져나가는 쓸쓸하면서도 분주한 모습, 저자는 담담하게 책 속에 글로 사진으로 담아내십니다. "낙우송은 어긋나기를 하고, 메타세쿼이아는 마주보기를 하는 게 서로 다를 뿐 나머지는 닮았다." 얼핏 보기에 판이한 생태인 듯해도 닮은 점은 닮은 점대로 찾아내고, 다른 점은 그 가장 큰 대조를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 이는 사실 옛 성현들이 "격물치지"의 자세로 언제나 강조했던 학문 자세이기도 합니다.

남이섬에는 중국인 관광객도 자주 찾아오지만(이 책 전반부, 즉 봄의 풍광을 담은 대목에서 언급이 있습니다), 초겨울에는 낙엽의 풍광을 즐기고 마음을 깨끗이 하려는 무슬림들도 즐겨 방문한다고 하며, 놀랍게도 이런 종교인들을 위해 따로 시설을 당국에서 마련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잘한 조치입니다. 청소 인력과 즐거이 인사를 나누는 소년은 싱가포르 출신입니다. 싱가포르는, 대표적 이슬람 국가인 말레이시아와 인접했으므로 무슬림 인구가 15% 정도나 됩니다. 아무리 오래 전 대국과 절연하고 중국계 위주의 체제를 꾸렸다고는 하나 말입니다.

"이름이란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여전히 향기롭지 않겠는가." (우리가 잘 아는 로미오의 그 연인이)

사실 나무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며 각각의 개성을 살피고 어여삐 여기거나 감탄하는 건 매우 유익하고 흐뭇한 소양입니다. 하지만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고 백과전서식으로 분류하기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지는 저자도 말씀 않습니다. 단, 나무는 제게 스스로 이름을 달지도 않고 자만도 하지 않으면서, 은근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모든 욕심을 비우고 자연의 시선으로 온전히 교류, 공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나무의 모든 미덕과 장점을 오롯이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책 끝에는 가나다순으로 남이섬에 번식하는 거의 모든 수종이 잘 정리되었습니다. 소사전으로 요긴한 활용이 가능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