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문학의 종언시대 문화다북스 평론집 3
최강민 지음 / 문화다북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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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문학은 서유럽 문화의 황금 시대에 인문의 정수를 이끈 공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문예나 창작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 일반 소비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으나 다만 취향과 개성이 좀 특이한 크레에이터들이, 한 번의 대박 혹은 히트작으로 이름을 올린 후 꾸준히 화젯거리와 가벼운 최종소비재를 양산하는 게 대세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혹은 거물 작가라도 해도 반드시 "엘리트 문학"을 하는 분이라고 볼 수는 없을 만큼, 가볍고 독자에게 부담 안 주는 컨텐츠로 승부를 걸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에는 엘리트 문단이 스스로 제 발을 찍어 신뢰와 신비감을 걷어낸 패착이 크게 작용하기도 했다는 게 이 책 저자분의 시각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쓴 여러 평론들의 모음집입니다. 어떤 글은 제목과 다소 동떨어진 주장을 담지 않았나 싶은 것도 책의 그런 성격(각자 다른 시기에 다른 매체에 기고된 여러 글들의 모음이라는 점)에서 연유하겠습니다. 여튼 어느 평론을 읽어 봐도, 첫째 한국에서 분명한 퇴조의 기미를 보이는 엘리트 문학의 병폐, 문단의 문제 있는 생리, 처음부터 잘못 잡고 들어간 미학 스탠스, 허위 의식과 위선 등을 공통적으로 꼬집으며, 둘째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대로, "평론이라고 해도 일반 독자가 얼마든지 쉽게 감상할 수 있고, 무엇보다 평론가 본인의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전개된 문장, 생각으로 채워진", 그런 글들로만 책이 이뤄졌다고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단일하고 분명한 의도를 지향하며, 그런 걸 떠나 어느 독자라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넉넉한 동의, 공감을 보낼 수 있게 쓰여졌습니다.

"잡놈 평론가"로 자처하며 솔직한 글쓰기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잡으시는 듯한 저자는, 우선 "남의 글과 생각을 흉내내는" 문단 평론가나 일부 작가들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서유럽의 빼어난 사상가들, 미학자들이, 남들이 따라 배울 만한 멋진 관점을 제시하거나 완성하여 시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문예에 큰 영향을 끼친 건 맞습니다. 그러나 평론가들, 혹은 어떤 크리에이터들도, 본연의 사명은 남의 흉내내기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만들어 독자와 청중의 호응과 감동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현학의 휘광을 거짓으로 지어내느라 갖은 번역어의 곡예를 부리고, 이 와중에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거짓의 진입 장벽을 높인다는 지적은, 일반 독자 입장에서도 씁쓸한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문인이나 예술가라면 그래도 진실을 독자들과 공유할 줄 알았는데, 그들조차도 거짓된 자체 지역 권력 구조의 구린내나는 일부임을 새삼 깨닫게 되니 말입니다.

우리 시대 큰 문인으로 추앙받아온 소설가 이문열이나 정호승 시인, 황석영 등에 대한 착잡한 비판도 실려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일반 반공 기획물에서 북한을 단죄하는 건 그 나름의 근거라도 있다. 그러나 정호승 시인의 지적은 그나마도 갖추지 못했다는 게 문제다."라는 진단으로, "방향성이 무엇이냐는 것보다, 훼절이든 개종이든 변심이든 그에 수반된 분명한 동기와 입장의 표명이 더 중요한데, 한국의 엘리트 문인은 그런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또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은, 이른바 "이문열돕기운동본부"가 그의 저작들을 화장한 퍼포먼스에 대해, 저자는 "이런 식의 대응은 동해보복과도 같은" 유치하고 건설적이지 못한 방식이라며, 도덕적으로 우월한 명분을 갖췄다면 응수도 보다 성숙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어놓습니다.

책의 3장에서는 (어쩌면 책 전체의 기획에선 그나마 가장 먼 거리를 유지한) 본격 평론들이 이어집니다. 화제작이었던 장강명의 <표백>에서, 그는 이른바, 자살 세대, 표백 세대라는 화두를 끄집어냅니다. 표백은 내심을 고백하고 표현한다는 그 표백이라기보다, 현재의 20대들에게 사고하기를 멈추고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소비의 컨베이어 벨트 위로 주저없이 자발적으로 탑승하라는 냉연하고 잔인한 체제의 주문과 그 결과를 상징합니다(쉽게 말해, 개성 없이 체제의 색을 뒤집어쓰라는, "표백제"라고 할 때의 그 표백입니다).

에밀 뒤르껭이 말한 맥락에서(이런 얘기 꺼내면 책의 취지에 정면 위배될까요?ㅋ 그러나 저자께서도 저 한참 뒤 p327등에서 장 보드리야르의 담론을 원용하시곤 합니다), 자살은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고 실존에의 역설적 절규입니다. 그래서 자살은, 강제 漂白을 거부하는 깨어 있는 의식의 처절한 表白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몇 년 전에 이 작을 읽기도 했던 제 생각이고, 저자는 "초보 작가(장강명은 전직 기자 출신입니다)의 미달된 자질 함량이 빚은, 피상적 저항(형상화)의 시늉이자, 소영웅주의 혹은 나르시시즘에 그친 실패한 자살의 억지스러운 부각, 상상력의 부족" 등의 혹평을 내어놓습니다. 혹평이지만 작품의 선명한 특징이랄까 논란이 될 법한 대목만을 잘 짚어내셨기에, (재미있는) 혹평 때문에라도 작품이 더 궁금해질 분도 있을 것 같네요. 본래 평론은 주례사가 아니라(p312:1) 이처럼 애정에서 솟아 나온 가식 없는(그러나 양심의 소산인) 막말에 가까워야 합니다.

표준과 융화를 강조하는 일본 같은 사회에서 오쿠다 히데오 같은 삐딱한 문인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진정 놀라운데, 그의 <남쪽으로 튀어>에 대해 저자는 그가 창조해낸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마", "돈키호테" 같은 캐릭터 이치로에 대해, <광장>의 이명준이나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 등과도 같은 위계를 부여합니다. 희한하게도 오쿠다 히데오는 휴전선 이남에 거주하며 융통성도 센스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좀비 같은" 체제가 내내 께름칙한 감시의 눈길로 특정인들(현실이든 가상이든)을 "사찰"하는 현실을 염두에라도 뒀는지(전혀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닌 게, 남한에 그의 독자들이 많다는 걸 작가님 자신도 잘 알테니 말입니다), 저처럼이나 의미심장한 어구를 제목으로 걸었습니다. "국정원이 귀찮아서라도 우리는 북으로 튀자고는 차마 못하겠고, 그저 튀려는 방향으로는 남쪽을 되뇔 뿐"이라는 저자의 퉁명스러운 한 마디는 그래서 재미 있습니다.

자폐아와 잉여 인간 화두를 내세우며 코믹한 진행 속에 기발한 시대 풍자를 담은 이시백의 <사자클럽 잔혹사>에 대해서 저자는 찬사와 응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극우파의 전성시대에 부르는 유신세대를 향한 장송곡"이라든가, 웃음의 배후에 가장 잔인한 억압과 폭력이 진을 치는 병든 시대의 작태가 신랄히 형상화된다는 점에서, 또 저자가 중시하시는 "등장 인물들의 유효적절한, 생동감 있는 활약과 주제의식의 만남"이 성공적이라는 이유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제가 아직 못 읽어 봤는데, 시간을 내어 꼭 감상해 봐야겠습니다.

최인석의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에 대해, 저자는 "상투적 서사와 현실 투영의 강박"을 지적하며, "불온함"이 그저 불온함 자체만을 드러내기 위해 과장되어서는 안 됨을 강조합니다. 기왕 불온함을 내세우려면 "그 극단"으로 질주해야 마땅하고, 어정쩡한 마스커레이드는 "상호 적대적 공존 속에서 상대방의 장수 만세를 기원하는 박수갈채(저는 이 표현이 너무도 재미있더군요. 마치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국의 군산 복합체가 소련의 원리주의 노선 폭주로 먹고살았듯)"일 뿐이라는 저자의 추상 같은 비판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도 제가 못 접했는데, 88올림픽과 02월드컵을 버젓이 치러 낸 주권국가에서 탈식민의 꿈을 노래하는 작가(최인석)의 발칙함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또 (저자의 지적대로) 그 한계는 어디인지 꼼꼼히 읽고 저자의 평론을 복기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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