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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갈등의 역사와 미래 전망
이동수 외 지음 / 인간사랑 / 2017년 8월
평점 :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매우 위태롭습니다. 남북한 양측은 물론 미-일-중-러 등 4대 강국이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지역이 한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작 일촉즉발의 분쟁에 대한 긴장을 가장 민감히
느껴야 할 당사자들인 한국민들은, "안보 불감증"이라 불려도 될 만큼 이 중차대한 시국을 그리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처럼 위태로운 국면일수록, 과거의 동아시아 국제 정치는 어떤 양상에서 어떤 원리에 의해 움직였는지, 현재의 초강대국들은 과연 어떤 동기와 기제에 의해 외교 방책을 결정하는지,
권위자와 석학 들의 높은 식견과 통찰에 귀 기울여 볼 때입니다. 언제나 우리 독자들에게 듬직한 지침을 제공해 주시는 고견들을
담뿍 담은 명논설 명논문 들이, 이번에도 이동수 교수님, 이현휘 박사님의 편집으로 한 권의 예쁜 책(인간사랑 刊)에 담겨져
출판되었습니다.
1부
1장 이동수 교수님의 <동아시아 공동체의 역사와 미래>는 책의 첫머리에 실리기도 했지만, 이 책에 실린 모든 논문들의
취지를 한 아티클에 함축, 총괄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선명한 구성, 논지와 탁월한 주제의식으로 독자의 의식을 각성시킵니다.
논문의 부제는 "중화주의와 아시아주의를 넘어서"인데, 이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두 종류의 거창한 허상, 위선, 혹은 선전이나
실패한 이념을 가리킵니다.
"중화주의"에
대해서는 지난 역사, 특히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감스럽게도 지속되어 온 종속적 외교 정책이나 사대부들의 수구적 세계관을
지칭하겠습니다. "아시아주의"는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시듯, 그 정체가 모호한, 역사 전개의 특정 국면마다 패권주의, 제국주의 세력이
들고 나온 견강부회식 슬로건을 주로 가리킵니다(혹은, 얼마 전까지 주목을 받았던, 호혜주의에 입각한 동아시아 공동체론 등도
지칭하나, 이런 주장이나 캠페인에는 그를 지속적으로 추동할 만한 물적 기반이 결여되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에는 20세기 전반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 같은 어이없는 기만적 선전(상세한 논의는 이 책 1부 4장의 김영수 교수님 논문에서
전개됩니다)이라든가, 최근 동아시아 평화를 심대히 위협하는 중국의 심상찮은 책동까지도 포함됩니다.
이동수 교수님의 결론은 박력 있는 단 두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이론적 정합성에만 현혹되어,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거나 패권주의 세력의 농간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둘째, 부국강병과 국가이념 재확립을 통해서만, 그 어떤 팽창주의 세력이 새로 대두해도 이에 우리 민족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윤영인
교수님과 계승범 교수님의 이어지는 두 편의 발표문은, 독자인 제가 개인적으로 이 책 중에서 가장 유익하고 흥미롭게 읽은
고견들이었습니다. 윤 교수님의 논문은 고려 시대 외교를 다루고, 계 교수님의 논문은 조선 시대 대명 사대의 본질에 대해 깊이
천착합니다. 흔히 고려 시대에는 대단한 자주혼과 주관 있는 외교 행보로 일관했다는 인식이 대중적으로 정착해 있지만, 윤 교수님의
치밀하고 실증적인 논증은 역사의 실정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음을 규명합니다.
"고려는 송과 거란 모두에게 충성스러운 제후국도, 모범적인 조공국도 아니었다."
일단 이 한 문장으로 논문의 전반부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 전기에는 이름 높은 유학자인 최승로가 송(북송)을 가리켜,
"상국" 등의 존칭을 하지 않고 그저 "서조(西朝)" 정도로만 불렀다는 사실(史實)이 놀랍습니다. 명확지는 않으나, 해석하기에
따라 우리 고려를 그와 대등한 동조(東朝)로 인식했다는 뜻도 되니 말입니다. 거란 사신과 송에서 파견한 사절을 대등한 예로
대했다는 점도 뜻밖이죠. 허나 거란과의 항쟁 과정에서, 특히 귀주대첩 이전 1016년의 충돌에서 우리 측 군사가 수만 명이나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는 <요사>의 기록으로 우리 쪽에서는 인정 안 하는 것 같은데, 국사학이
아닌 국제정치학 관점에서는 각국의 기록에 고루 사료가치와 신빙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윤 교수님은 이 부분을 비중 있게
거론하신 듯합니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간섭을 수용하면서 독립성의 침훼를 겪는데, 교수님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비로소 사대주의의 본격적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판단하십니다. "호혜주의 원칙이 근본적으로 사라진" 조공 외교의 질서와 관행이 시작됨으로써,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의
정세 속에 종속 변수로 추락한 후 좀처럼 다시 자주국의 형세를 회복하지 못합니다.
계
교수님의 논문은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국난에 즈음하여, 철저히 대륙 세력에 종속되었던 고난 가득한 시기를 주목하는데,
이는 세종 연간만 해도 오이라트의 에센이 주도한 "토목보의 변" 당시, 조선이 명의 출병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을 만큼 자주적이었던
사실과 대조됩니다. 부윤, 참판 등이 명장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인환시리에 곤장을 맞기도 하고, 조선의
국왕(선조)가 일일이 명군 측 장성들을 환대하지 않았다며 책망을 받는가 하면, 전략과 전술 안출과 집행 시 우리 측의 의견은
대등한 자격의 상의가 아니라 "청(부탁. 호소)"의 위상에 불과했다는 것도 기가 차죠.
그런데
이런 철저히 종속적이고 굴욕적인 대접은, 임란이라는 비상시의 환경에서 예외적으로 발생했던 관계 재설정이 아니라, 성리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지배 체제를 구축한 양반 사대부의 속성에서 유래한, 거의 상시적인 구조적 행태에 가까웠다는 게 저자의
시각입니다. 주상(조선 국왕)의 명을 거역할망정 천조(명)에 죄를 입을 순 없다는, "배신(培臣)"들의 비굴한 외교 태세가
조선시대 거의 전부를 지배했기에, 천자가 일국 군주의 임(任. 책봉)과 면(免)을 자의로 행할 수 있었죠. 계 교수님은 해방 후
국사학자들에 의해 이런 조공책봉 시스템의 불평등 측면은 의도적으로 축소되고, 대신 대국으로부터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방편이었다거나, 사대라는 형식을 빌린 동아시아 고유의 외교 체제였음을 내세우는 식으로 미화, 윤색된 면이 없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김영수
교수님은 주로 다케우치 요시미 등 일본 학자의 비판을 중점 원용하며, 소위 대동아공영론의 허상과 위선을 통박하십니다. "..물론
오족 협화 같은 것은 거짓이고 기만입니다. 그러나 우리 일본에게는 만주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 대전 당시 미국 대사 조셉
그루 등이 지적한 대로, 일본인들은 분명 악행과 표리부동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한편에선 그 거짓말을 믿고 있는
기괴한 이중성을 지녔다는 게 놀랍습니다.
미-영이
공동 발표한 "대서양 선언"에서 연합국 측은 제국주의, 식민 노선의 포기를 천명했는데, 당시 동남아와 태평양 전역으로 침략세를
확대하던 일제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동아시아 전체의 이익"을 기만적으로 공표하면서 이에 대응했죠. 논문에도 잘 나와 있듯
그러나 이 시점 일본이 점령지에서 저지른 만행이란, 매 지역마다 각각 수십만에서 백만에 달하는 인명의 살육일 뿐이었습니다.
1944년
경에는 문인, 지식인들이 앞다퉈 "근대의 초극(극복)"을 운위, 고백(?)했는데, 그 내용이란 "영국과 미국에 짓눌려 왔던
그간의 저자세를 넘어서서, 이제 대등한 자격으로 귀축 영미의 격멸을 희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근대성과 보편 문명, 가치의
정수조차 채 배우지 못한 그들이, 아예 가증스러운 허울까지 다 벗어던지고 "명치 유신" 이전의 야만으로 회귀하겠다는 자폭이나
마찬가지였죠. 논문에는 아무 죄책감이나 내적 갈등 없이 망국과 패악을 향해 묵묵히 전진하던 숱한 전범들의 행태, 마지막 유죄
선고를 받고서야 운명을 깨닫고 어린아이처럼 울부짖던 약하디약한 모습에서, 김영수 교수님은 한나 아렌트의
"thoughtlessness" 개념이라든가 "악(惡)의 banality" 같은 유명한 규정도 독자에게 환기합니다. 특히
p148에서 저자는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의 유명한 구절을 길게 인용하며, 이데올로기화한 악(惡)의 무성운 파괴력을
언급하시는데, 그 깊은 통찰과 그윽한 문학적 향취에 잠시 몰아지경까지 독자를 인도하는 필력이었습니다.
5장은
로웰 디트머 교수의 논문 번역인데,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채 시작하기 전부터 벌써 다른 나라의 혁명가 그룹에 큰
영감과 동기를 제공한" 중국 혁명의 의의와 경과에 대해 압축적으로 서술합니다. 여기에는 중국 본토에서의 여러 명망가들의 활약뿐
아니라 호치민, 김일성 등의 행적에 대해서도 자세히 짚습니다. 이 글은, 제7장 주펑 교수의 냉철한 글 <중국의 부흥과
.... 영향>과 함께 읽으면 더 포괄적인 맥락에서의 이해가 가능하겠습니다. 중국에서 국부로 칭송되는 쑨원 같은 이가,
결국은 몽골이나 조선 등을 다시 중화에 귀속되어야 할 영토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파워 폴리틱스" 관련
매우 심각한 충격을 안깁니다. 이 글들에는 김일성이 중국말에 대단히 능통했을망정 한국어를 거의 못 해 소련 군정 측에서 특별한
여러 배려가 필요했다는 등 재미있는 서술이 많이 발견됩니다.
6장
<동아시아에서의 배상과 화해 문제>은 일본인인 요시다 구니히코 교수의 발표문입니다. 국가 사이에서 민간의 배상청구권이
포기되었다고는 하나, 개인차원에서 민사상 불법행위(tort)를 구제받고자 소송을 벌이는 선택은 이미 많은 나라들에서 겸허히
긍인됩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 측의 아이누 족, 오키나와 인들에 대한 차별과 복속 이슈라든가, 나병 환자 강제 수용, 노역(이
문제는 최근에도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학대 때문에 큰 논란이 다시 일었습니다), 심지어 브라질 등 남미에서 귀환, 귀화한 동포,
혼혈인에 대한 린치 등 심각한 문제들을 집중 조명합니다. 우리에게도 종군 성노예 할머니들이 계시기 때문에 단연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과제죠.
8장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외교 정책, 수사(修辭)와, 실제 군사적으로 감행하는 집행 수단 사이에 왜 커다란
괴리가 생길수밖에 없는지,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지적과 주장을 인용하며 포괄적으로 해명합니다. 2장과 3장이 "국제정치학
관점(특히 파워 폴리틱스)에서 재해석한" 동아시아 통사를 읽은
재미가 있었다면, 이 8장은 냉엄하면서도 치밀한 논리를 앞세워, 왜 강대국들이 특정 국면에서, 외부인이 보기에 이해 할 수 없는
선택을 했는지, 그간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던 여러 이슈에 대해 속시원하고 분명한 체계를 잡아 주시는 듯해서 너무도 흥미로웠고
깨우친 바가 많았습니다.
미국이 마니교 식 선악 이분법에 사로잡혀, 항상 최악- 차악- 차차악의 우선순위를 두고 경계, 응징한다는
분석은, 일단 지금까지 벌어진 그들의 행태와 동선에 별 이격 없이 부합되는 프레임이란 점에서 매혹적이었습니다. 사람도 어떤
명확한 계획이나 의식보다는, 몸에 밴 타성에 의해 움직이는 비중이 더 크다는 점에서, 이들 국가들이 표면에 내세운 명분이나
이념보다, 어떤 전통(이를 prejudice로 표현하더군요)에 의해 "행동"을 결정할 뿐이라는 결론은, 냉혹한 국제 정세 속에서
그저 정치인들의 공약(空約), 허언, 사탕발림만 미련하게 믿기 쉬운 개인들이 어떤 자세로 현실과 자기 자신을 돌아보야 하는지,
묵직한 경종을 울려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