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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순호선사 평전
방남수.임병화 지음 / 화남출판사 / 2016년 8월
평점 :
우리 곁을 아주 든든하게 지켜 주는 제도, 관념, 시설 등은 그저 당연하게만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버팀목들이 제 자리를 지키며 우뚝 서기까지는 많은 선구자들의 영웅적 노력이 있었을 텐데요. 특히 나라가 어렵고 질서가 바로잡히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저 탁상공론만으로 장애가 해소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강력한 지도력과 실천 의지로 앞장을 서야만 합니다.
불교는 한반도에 겨레가 터잡고 살아온 이래 1700년 동안 민족의 정신적 지주 중 하나로 기능해 왔습니다. 이런 불교의 수난사는, 곧 민족의 고난 행적과 궤를 같이합니다.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검은 잇속을 취하면서 겉으로는 "서양 세력으로부터 가난한 조선을 지켜 준다"는 허위 명분을 내세울 때, 불교 역시 왜색화의 침노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상당수의 사찰, 승려들이 특히 비구의 교리를 버리고 공공연히 처자식과 재산을 간수했는데, 이런 왜색을 일거에 쓸어버리지 않으면 민족 정기의 고유한 부분이 크게 오염될 수 있었습니다.
청담 스님은 소년 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의기와 총명함, 남다른 강건함으로 주위의 주목을 받던 분이었는데요.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첫째 일제 강점기에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 스님으로서 조선 고유의 불교 전통을 잘 보전한 것, 둘째 광복 후에는 본격적으로 일제 잔재 청산에 나서서, 대처승들을 전국의 본산에서 축출한 것입니다. 이런 여러 업적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지난 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큰스님으로 추앙 받아 왔습니다만, 스님이 입적하신지 근 반 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은 그의 이름조차 잊은 이들이 많거나, 갖은 오해와 헛소문으로 높은 명예에 누가 되는 일까지 종종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 책은 일제가 패망한 지 십 수 년이 흐르도록 바로잡히지 않았던 한국 불교의 바른 맥을 세워 준 그의 생애를, 여러 조사와 치밀한 고증을 거쳐 객관적으로 재조명, 정리, 연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집니다. 책의 판형이 크라운판인데다, 분량은 근 800페이지에 달합니다. 혜성 스님의 치사, 법산 스님의 발문, 그리고 저자 두 분(불교계 언론인)의 발간사가 엄정히 책머리에 자리하는 정격을 갖췄습니다. 연표가 잘 정리되어, 스님의 생애 큰 줄기에 어떤 역사적 사건이 관련되었는지 독자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큰스님의 존호는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게 법도입니다만, 일단 "청담"은 스님의 법호이며, "순호"는 법명입니다. 법명은 처음에 출가하거나, 기타 은사 스님이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지어주는 이름입니다. 대개는 청소년기나 젊은 시절에 붙습니다. 법호는 일단 법명을 가진 분(대개는 장년을 넘긴 어른 스님)이 일정 계기를 마련하여 다시 붙는 이름입니다. 스님의 속명은 "이찬호"였는데, 소년이 성장기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이미 국권이 일제의 발톱 안에 할퀴운 지 오래였습니다. 이런 난국일수록 수신제가의 바른 길로 국운을 바로세워야겠다는 소년의 결의는 남달랐는데요. 조선인이 웬만해선 들어가기 힘들었던 진주 일대의 명문교에 입학한 후, 그 성적도 학교에서 거의 수석을 놓치지 않는 성실함과 영민함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학업에 정진하던 학교를 도중에 그만둔 이유는, 일생의 전기를 마련해 준 소중한 은사 스님을 뵙고 특별한 회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앞날이 풍전등화에 놓인 시국, 개인과 겨레 전체의 살 길은 오로지 부처님의 등불 아래밖에 없다." 이때 출가하여 받은 법명이 "순호"임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스님은 탁월한 총기로 반야심경을 며칠 만에 외워 주위를 놀라게도 했는데요. 그러나 주위에 융화하고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절 안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이때부터 스님은 "인욕의 미덕"으로도 명성이 높았는데, 결기와 체력으로는 모두를 압도할 만큼 장사였지만, 시정 잡배들의 허튼 수작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는 높은 의기로 주변을 감복시킨 까닭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스님의 가장 큰 업적은 "불교 정화"와 관련된 여러 실천적 조치에 있습니다. 당시 자유당 정권 때 조계종은 대처승 측과 법정에서 소송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각지의 사찰에서 실력 행사를 벌이며 대립했습니다. 결국 2심, 최종심에서 스님이 이끌던 조계종 측에 승소 판결이 내려지고, 지금의 청담동 소재 "태고사"는 "조계사"로 현판을 바꿔 달았습니다. 아마, 청담 대종사의 법호에서 "카페가 밀집한 강남 청담동"을 대뜸 연상하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일제 시절 청담리로 불린 이 한적한 고장에 불교 사찰이 오래 그 자리를 지킨 것도 당연하며, 스님이 한창 정화운동에 헌신하던 시절만 해도 오늘같은 발전상, 지가 폭등은 상상할 수 없던 형편이었겠습니다. 이 시점에 스님은 오랜 은사와 "이연(절연과 비슷합니다)"하고, 그 의미 깊은 지명을 따라 새로 법호를 지어 올렸던 거죠.
얼마 전 한전 본사 부지가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에 (주)현대차에 낙찰되어 세간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 땅은 처음에 조계사 소유였다고 합니다. 다만 개발 경제 드라이브가 한창 피치를 올리던 시절, 국가 시책 협조 차원에서 토지를 공기업에 제공했던 건데(그 과정에 관료들과 시청 측의 강압도 있었다는 주장), 이제 민간기업에 소유권이 넘어가는 시점, 과거의 합의가 어떠했는지 시비와 경위를 분명히 가릴 필요가 생긴 거죠. 당사자들의 합리적이고 원만한 해결을 기대하는 게 국외자들의 바른 태도이겠습니다.
스님은 소탈하면서도 명분 앞에 거침 없는 태도로 세인을 대해 왔습니다. 그 예로 후배이자 동문수학한 문인인 조지훈 시인의 비판에 대해, 점잖은 어조로 "사태를 면밀히 살핀 후 평가에 나설 것"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스님과 동문수학한 유명 인사들은 셀 수 없이 많은데요. 이 중에는 이광수, 신석정 등의 거물급 문인들이 꼽힙니다. 스님은 또한 세속의 언론 기관과 격의 없는 접촉을 가져, 바른 법도의 전파에 앞장 선 기여가 있기도 합니다. 이 중에는 고 권오기 동아일보 논설위원과의 대담이 유명한데, 이후 권 논설위원은 동아일보 사장, 통일부총리를 역임하기도 하죠. 워낙 교분이 넓고 거물급 종교인이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친분을 다졌는데, 이 중에는 생전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라 할 강원룡 목사도 있습니다. "대도무문"이란 말은 진정 이런 분에게 어울리는 문구입니다.
스님의 사상은 언제나 대중과 함께하는 불교, 속세와 유리되지 않고 함께 예토를 정화해 나가는 장벽 없는 불교의 주창에 그 중심이 놓였습니다. 고고한 학식과 남다른 기백의 소유자였지만, 가장 미천한 자들과 서슴없이 소통에 나서는, 진정 사해평등의 마음가짐을 앞장 서 실천한,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고승 대덕이시더군요. 이런 분의 정신과 뜻을 현재에 받들고 계승해야, 첩첩산중인 겨레의 앞날에 어떤 활로가 모색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