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나의 이단자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지음, 이관우 옮김 / 작가와비평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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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191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독일의 작가입니다. 그가 태어나고 죽은 슐레지엔(혹은 실레시아)은 18세기 프로이센에 의해 병합되었으며, 그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렸으나 사실은 원래 슬라브인들이 널리 터잡고 살던 고장입니다. 하우프트만은 죽을 때도 슐레지엔에서 죽었는데,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면 이런 배경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하우프트만은 자연주의 사조에 속한 작가입니다.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유럽에서 자리잡고 전례없는 풍요가 사회에 넘쳤지만 많은 빈민층이 발생해 인도주의적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상에 충격을 받은 문인들이 자연주의 사조를 일으켰고, 프랑스의 에밀 졸라는 이 하우프트만보다 대략 20년 정도 연상으로서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자연주의 문학이 흔히 그렇듯 이 책에 실린 그의 두 중편도 독자들에게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성이라는 건 보통은 사람들 사이에 흔쾌히 전달이 되기 마련이라서, 이 작품들도 발표 당시에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작품에 스민 보편적 휴머니즘으로부터 얼마든지 감동 받을 수 있겠습니다. 

Soana는 이 작품의 배경인데, 빙하호(氷河湖)인 루가노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름을 가진 곳은 많으나, 루가노 인근에 실제로 그런 지명은 없으니 가상의 배경으로 보는 게 맞겠습니다. 스위스 소속이라고 해도 이탈리아어권이니 소아나라고 읽는 게 맞을 것 같지만 이 소설이 독일어로 쓰였으므로 조아나라고 표기된 듯합니다. 이단자라는 단어는 캐릭터 루도비코를 가리켜 이 소설 내내 불리는데, 이 Ketzer라는 말은 중세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가훅하게 탄압받은 카타리 파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이 카타리 파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므로 이름이 익숙합니다. 

어떤 고정된 교의가 사람들의 숨통을 조이게 하는 것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더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며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프란체스코 신부. 실제로 수백 년 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도 이런 성품이었고 당대 주류 성직자들로부터 이단시되기도 하면서 기어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고산지대의 버림받은 일가(p70)" 미국의 애팔래치아도 그렇고, 산악 지대에서 다른 이들과 떨어져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때로 근친상간이라는 끔찍한 상황에 놓이기도 하며, 혹은 (아무 일이 없었는데도) 그런 부당한 편견을 받습니다. 프란체스코 신부도 "그 저주받은 스카라보타 남매(p79)"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으나, 자신 역시 과거에 후작의 어린 셋째 딸에게 일시 느꼈던 불측한 감정이 생각나기에, 타인을 함부로 단죄하는 데 보다 신중해지려 노력합니다. 

모두가 짐작할 수 있듯 야생의 소녀 아가타는 스카라보타 남매의 딸이며, 아무리 그녀가 죄악의 소생이라 한들 그녀 자신만큼은 (아직은) 어떤 죄악에도 물들지 않은, 그 누구보다도 순결한 존재입니다. 반면, 고귀한 가문의 소생이고 어려서부터 성직을 택했으며 별다른 일탈만 없었다면 주교, 추기경직에도 무난히 오르리라 주변의 기대(p125)를 받던 프란체스코는, 독자인 제가 보기엔 애초에 신부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젊은 나이였다고는 하나 어쩌면 가는 곳마다 그처럼이나 이성의 유혹에 취약해지며, 마침내 자신을 낙원의 아담(p135)에 비길 정도가 되었으니... 소녀 자신이 근친혼의 소생인데다, 성직자라는 사람이 어린 여성과 간음하여 이중삼중의 죄를 지었으니 그를 타매하고 축출한 마을 사람들더러 무지몽매하다고 비판할 수도 없을 듯합니다. 프란체스코 신부는 가뜩이나 취약했던 아가타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망쳐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29년 역시 노벨상을 받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도 장편 <선택된 인간>을 발표했는데 개인적으로 저는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이 중편이 그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여튼 박식한 은둔자 루도비코가 그토록이나 풍성한 지적 배경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어려서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을 잘 받은 덕이겠고, 바로 이 사람이 프란체스코 신부 본인임도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사실 저는 처음에 이 사람이 프란체스코와 아가타 사이의 소생인 줄 잘못 알았네요). <선로지기 틸>도 한없이 슬프고 답답해지는 사연이지만, 하우프트만 고유의 인도주의 철학과 치밀한 자연주의 기법 덕에 독자는 그의 진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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