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왕조실록 - 이야기 역사신학, 열왕기서 새로 읽기
배경락 지음 / 샘솟는기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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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는 제목부터가 북이스라엘, 남유다를 다스린 여러(列) 군주(王)들의 기록(記)이며, 엄연히 역사서입니다. 그래서 역사책처럼 재미있게 읽었으면 하는 소망이 언제나 있었으나, 막상 성경책을 펼쳐 보면 그리 쉽게 읽히지를 않습니다. 왕들의 연대기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찬란한 업적과 성취로 가득한 기록이 아니라, 오히려 우행과 실패와 죄업의 연속으로 점철되었으며, 이를 준열히 꾸짖는 예언자, 선지자들의 행적이 매우 큰 비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디서부터가 history이며, 어디까지가 종교적 가르침인지가 잘 분간되지 않기 일쑤이며, 끝에 가서는 "역시 성경책이야."하는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덮곤 했죠.

이 책은 열왕기의 내용을 저자 배경락 목사님이 최대한 쉽게 풀어서 들려 주는 구성입니다. 그래서 일독 후에 열왕기의 사적이 머리 속에 일단 잘 정리는 되었고, 이것만으로도 책을 (처음에) 꺼내들었던 목표는 120% 달성되었습니다. 헌데 책을 다 읽고 난 감회랄까.... 어떤 보람 같은 것은 그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역시 열왕기는, 재미 있는 역사로 읽을 주제만은 아니었어." 이 오래된 느낌을 이제 일종의 각성으로서 재확인하게도 되었네요.

열왕기뿐 아니라 모든 성경이 마찬가지입니다만, 성경의 기자는 어떤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영감을 받아(성령이 임한 채로) 기술을 하게 마련입니다. 배 목사님은 열왕기가 바빌론 포로 시절 이국에서 모진 고생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과오를 반성하게 하려는 의도로 쓰여졌음을 말합니다. 너희들의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이런 식으로 대가를 치르게 함이라는 취지이죠. 실제로 열왕기 시절에는 강성한 이웃의 침략에 의해 이스라엘, 유다 왕국이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모압 같은 속방(屬邦)이 경제적 풍요를 앞세워 분리 독립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두가, 이른바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그들 열두 지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시련이자 고통, 치욕이었습니다. 선택을 받았다면서 왜 이런 험한 일을 당합니까? 이뿐 아니라 성경 속에는 욥의 간난사 등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숱한 부조리가 다 나옵니다. 왜 선인에게 복을 내려주지는 못할망정,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는 치욕과 수고를안깁니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저자 배경락 목사님이 선명하고 똑부러진 목소리로, 그에 대한 신앙인의 답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독자(신도) 개인의 몫이지만, 적어도 기독교 서적이라면 모호하지 않은 뚜렷한 답을 이처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열왕기에도, "이유 없이 핍박 받는 선인, 의인의 사연"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 중 대표자가 예언자 엘리야입니다. 무수한 예언자 중에서 특히 열왕기의 엘리야가 특히 유명한 이유는,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 통치기에 왕에 대해 직언을 서슴지 않던 용기 있는 현인의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도 왕의 권력에 의해 탄압 받고 쫓기면서 모진 고생을 하고,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같은 약한 소리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강철 같은 의지와 순도 높은 신앙으로만 무장했을 것 같은 그의멘탈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범부만도 못 한 이런 약한(더군다나 불경스럽기까지 한 - 생명과 출생은 신이 내린 가장 큰 선물이니까요) 언사를 내뱉는다는 게 우리로선 몹시도 의외입니다. 이럴 때 신은 홀연이 나타나 불호령 대신 따스한 말로 그를 격려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신은 이런 지점에서 역시 같은 분임이 확인됩니다.

앞서 말했듯 열왕기의 주인공은 오히려 열왕(아합, 르호보암, 여로보암 등)이 아니라, 고독한 선지자들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탄압과 착취의 대상이었던 불쌍한 민중들입니다. 아합은 구약의 서술을 표면적으로 읽기만 하면 아주 나쁜 폭군으로만 보이지만(또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만), 경제적으로는 이 자의 치세에 무척이나 번영을 누린 게 이스라엘 왕국입니다. 못된 왕비 이세벨의 꼬임(이라기보다 목사님은 오히려 이 부부 관계를 주종 성격으로 파악합니다)에 넘어가 바알 신앙에 빠진 게 아합이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아 보자, 남 일에 신경 끄고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 이런 개인주의 물질주의를 지향한 게 바알주의라고 저자는 정리합니다. 아 그럼 잘한 거 확실히 하나는 있었군, 저 북한처럼 백성들 배도 주리게 하면서 못살게만 구는 미친 폭군은 아닌가 보군, 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허나 저자의 생각은 다릅니다. 이웃의 고초와 궁핍을 외면하고, 나의 욕심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채우는 세속주의의 극치 바알(바알은 특정한 신의 이름이 아니며, 이 시대의 바알은 멜카르트라는 시돈의 신이었다고 합니다) 숭배야말로 여호와의 뜻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죄악이자 우상 숭배였다고 저자는 파악합니다. 바알은 그저 여호와의 질투를 받는 다른 땅의 신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물질주의와 배금주의의 표상입니다. 사람은 이웃과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데서 존재의 가치와 고결함을 유지합니다. 바알로 대표되는 물질주의는 그런 인간 본성의 가치를 파괴합니다. 확실히 이런 해석이라야, 꼭 신앙을 떠나서도, 왜 그렇게 유다의 신은 자신만에의 복종과 순명을 강요하는가, 너무 독선적이지 않는가 같은 의아함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유대 민족주의 역시, 편협한 종족적 고립을 떠나, 보편적 윤리와 도덕으로 승화할 수 있겠고 말입니다.

이 책은 열왕기의 시대적 해설과 주석에 그치지 않습니다. 열왕기 역시 훨씬 후대 바빌론 유수에 대한 애널러지로 독해할 수 있듯(물론 역사로서의 성격도 잃지 않습니다. 예컨대 모압 독립 건만 해도 고고학적 증거가 출토됨으로써 구약은 그 역사성을 입증했다고 이 책에도 나오죠. 메사 석비에 대한 언급은 각기 다른 곳에 두 차례 등장합니다), 저자는 열왕기에 기재된 숱한 정치적 혼란과 난맥상을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고난에 빗대어 해석합니다. 책은 직설적으로 혹은 우회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우행과 오판을 신랄히 비판합니다. 지도자가 자신만의 편견과 고집에 싸여 있을 때, 어떤 비극적 결과가 발생하는지는 동과 서, 역사의 고금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마치 선지자의 목소리처럼 통렬히 지적합니다.

책의 기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런 못나고 어리석은 정치가 파탄에 이르게 방치한 모든 침묵과 위선, 비겁을 꾸짖습니다. 엘리야의 시대에는 그 말고도 백 인의 선지자가 더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동굴에 은거하며 현실의 부조리를 외면했습니다. 저자의 의견은, 이들의 죄 역시 우군의 악행과 견주어 조금도 가볍지 않다는 쪽입니다. 기독교는 예로부터 현실 참여를 결코 소홀히하지 않는 기풍을 유지해 왔고, 이런 태도가 설령 구약의 사적에 대해서인들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그저 외골수, 현실 도피, 맹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르틴 루터가 용감하게 로마 가톨릭의 폐해를 지적하며 내세운 교의 중 "오직 믿음(sola fides)"이라는 게 있는데, 이것이 왜곡되어 마치 눈을 감고 믿는 어리석은 신앙이 최고의 미덕인 양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성 역시 신앙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며, 명확하고 냉철한 현실 인식 위에 기반을 다진 신앙이라야 그 내용도 올바르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신앙과 사랑은 잘못과 죄악에 대해서 무작정 포용하는 눈먼 감정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박형대 교수의 이론을 인용하여 "진멸(殄滅)"이란 개념으로 파악하는데, 뜻은 그야말로 신의 진노가 죄인들에 미쳐 모조리 절멸시킨다는 겁니다. herem이란 단어는 심지어 영어 사전에도 나올 정도인데, 히브리어 חרם은 헌신, 축복, 파문, 징계 등 뜻이 다양하나 역시 문맥에 따라 "진멸"로 쓰일 때 가장 서늘히 와 닿습니다. 열왕기뿐 아니라 구약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의 모든 수난사는, 이처럼 신의 뜻을 거역하고 오만방자하게 죄악과 독선에 빠지거나 물질문명의 해악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그들에게 미친 "진멸의 손길"이었습니다. 설령 엘리야인들 어찌 과오가 없었겠습니까?

이 책에는 열왕기의 어려운 구절에 대해 저자의 식견으로 명쾌히 해명하는, 주석서 같은 대목이 많아서 역시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령 제자 엘리사가 "곱절의 몫"을 스승에게 요구할 때, 혹 선지자로서의 기적과 권능이 그 스승을 두 배로 능가한다는 뜻인지 오해가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 적통의 승계자로서 자격을 요청하는 대목이며, 이에 엘리야가 "나의 승천을 네가 볼 수 있다면'이란 말로 대답하는 구절까지 일관된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뿐 아니라 벧엘의 꼬마들이 엘리사더러 "대머리여 올라가라"라고 조롱한 건, "대머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 스승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기적을 보여 보라는 불경이 그 포인트인데, 이로서 벧엘은 초기의 신성을 잃고 물질주의의 지옥으로 화했다는 게 저자의 해석입니다. 책에 이처럼 일관된 관점이 있기에, 읽고 나서 강렬한 느낌이 남았습니다. 저자도 암시하듯, 이 열왕기의 벧엘은 곧 21세기의 한국이며, 성도이건 문외한이건 모두 물욕의 늪에 빠져 죄악의 응보를 면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herem의 표적으로 변해간다는 게 또한 저자의 시각입니다. 1907년의 평양 대부흥 같은, 철저한 영적 각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는 저자의 결론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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