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고해 - 스스로에게 건네는 마지막 고백
신창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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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고해 ] 신창호 지음의 이책은 시작  순서 부터가 예사 롭지가 않다. 부제로 스스로에게 건네는 생의 마지막 고백이라는 < 자찬 묘지명> 을 바탕으로 그의 삶을 복원 하려는 시도이고 일인칭 화자 시점을 활용해서 마치 살아 있는 정약용 선생이 수백년 뒤의 우리 후손 들에게 담담 하게 애기 하여 내려가는 서간체 같은 느낌도 든다.  

 

그의 호 다산 이라는 말과 정약용이라는 이름은 역사첵에도 자주 오르 내리며, 조선 중기 정조 시설의 수원 화성 축조에서부터 수많은 실사 구시 정신으로 깃들어 있다. 음악에서 의학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저작과 지식 , 관료로서의 거의 한평생 살다고 다른 세력으로부터으 모함으로 가게된 유배 생활에서의 고뇌등 , 어쩌면 일생을 잘 살아온 유학자의 면모를 가감없이 드러내지만 한편으론 당시 중국으로 건너온 천주교의 영향과 , 그의 자부인 이승훈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으리라는 것 또한 짐작 할수 있다.

 

하지만 , 당대의 서구 문물과 기존 유교적 질서들 사이에서의 갈등은 그리 쉽지 않은 정리로 남은 것 만은 분명한 듯 하며 , 스스로의 묘지면을 지으며 마지막 고백에서 어제의 자신과의 화해 하는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 내 나이 예순이다 , 나의 인생 한 갑자 60년은 모두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갈을 거두려고 한다. 거두어 정리 하고 생을 다시 시작 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올해 부터 빈틈없이 촘촘하게 네 몸을 닦고 실천하며, 저 하늘이 나에게 던지는 지상의 명령 , 나의 본분이 무엇인지 돌아 보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  -p10

 

우리들 스스로를 돌아 보아도 일생에 비겁해 지지 않은 적이 과연 몇번씩이나 있었겠는가 , 하물며 , 그 엤날 1801 년도 신유 박해 시기에 천주교도인 것 만으로도 못숨을 부지 하기 어려운 시절에는 자신의 종교적 양심을 기키는 것 조차 어려운 일이 었을 터이다.

 

유배지에서의 그의 생활을 담담이 써낸 강진 시절의 이야기만 하여도 , 억울한 누명을 쓴채로 수년을 혹은 수십년을 지난한 세월을 견뎌낸 것은 바로 그의 학문자 적인 정신의 힘 이 아니 었을가 .

 

유학자 여유당으로서 시경과 서경 , 역경 악경, 춘추 , 논어 맹자 , 중용, 대학에 이르기 까지 섭렵 하지 않는 학문 분야가 없었던 그의 지식 쳬계 에서는 오늘날 그가 살아서 더 공부 했더라면 , 그야말로 백년에 한번 혹은 오백년에 한번 나올 수 있는 대 학자의 면모를 볼 수 있지 않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후대에 들어서 국가 경영에 관한 전반적인 제도를 시대에 구애 받지 않고 , 기준을 세우고 대강의 줄거리를 만들어 새롭게 건설할 목적으로 쓴 [ 경세유표] ,와  백성들을 아끼고 섬기기 위한 실천서 < 목민심서> 를 지어낸 것은 제대로된 잣대와 법률 , 그리고 형평성으로 억울하거나 배척 되는 백성들이 없게 하려는 그의 깊은 뜻이 담겨저 있는 대표적인 저작물이다.  마지막으로 한사람이라도 억울한 백성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낸 < 흠흠 신서 > 또한 형벌에 대한 혹은 법률에 대한 기준 잣대를 바로 세우기 위한 방편의 하나이다.

 

1762년  (청 건륭, 영조 38년) 임오년 에 태어난 다산이 1822년 ( 도광 , 청 선종 , 순조 22년 ) 에 이르기 까지  한갑자를 지낸온 세월 앞에서의 자신에게 부치는 한편의 편지 와도 같다고 할까 , 그의 고해를 들어 보면서 , 과연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난온 세월들에게 자신 스스로에게 이러한 고해의 시간과 공간의 기회마저 줄 여유가 없지는 않았을까 고민을 해본다.

 

인간사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듯이 , 사회적 동물로서 여러 사람들과 소속되어 있고 어울려 살아 가는바 , 예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근본 정리와 원칙들은 변함이 없는듯 하다고 생각하는  < 책력거 99 >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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