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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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배경으로 김훈작가가 쓴 소설체 이야기 이다. 좀더 사실적 사료 근거를 보기 위해 위키디피아의 임진왜란을 옮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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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 사건이었고 정치, 문화, 경제와 일반 백성의 생활, 언어, 풍속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일본은 개전 초반에 한성을 포함한 한반도 대부분를 점령하였으나 명군의 개입을 비롯하여 조선군의 저항, 의병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1년여만에 창원 이남으로 퇴각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서거한 탓에 본국으로 급거 귀국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이라고 부르고 전쟁 두 차례를 각각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라고 하며, 중화인민공화국중화민국에서는 당시 (明)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之役), 만력의 역(萬曆之役),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만력동정(萬曆東征), 임진왜화(壬辰倭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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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 1592년 음력 4월 13 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약 20만의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고 , 육군과 수군의 양병 작전으로 육로의 두가지길 ( 문경 세재를 넘는길 ) 과 울산 영천을 거쳐 충주를 넘어 한양으로 , 제 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서 한양으로 ... 개전후 약 20여일 만에 한양에 도달한 그들 ... 거의 추풍낙엽처럼 노도와 같이 밀려 올라왔다는 표현이 좋을 듯하다.. 그 옜날 약 400여년전의 우마차 길외에는 없던 시절에 산길로 , 고개를 넘어 산맥을 가로 질러 부산에서 한양까지 20여일이라면 일반 보부상들이 걸어서 오는 길보다도 빠른 속도일수가 있다...

이후 음력 6월13일 평양이 함락되었다... 개성과 황해도로 북진해 오는 그들 ,,, 백성의 왕인 선조는 어디에 있는가 ...

두번에 걸친 해전사 1차 -임진왜란 , 2차 정유재란 , 그사이의 이순신 충무공의 역사적이야기가 전개 되었다... 소설이어서 1인칭 화법을 쓴것이 보다 적절이 읽는 사람과의 간극을 좁게 만들었다... 개인사적인 , 나라의 개인사적인 이야기들을 풀어 나가다 보면 그 역사의 흐름에 태어난 사람은 참으로 비참함을 벗어 날수없게 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전쟁 묘사들이다...

권률 장군( 1537 ~ 1599 ) -역전의 명장 , 행주 대첩 지휘, 정유재란시 도원수 , 전쟁 전체 총괄 지휘. 이순신과는 지휘계통 반목 장계를 올려 이순신이 구속되는 직접적인 원인 제공.-사후에 영의정 추증.

이순신 장군 ( 1545 .3.8일생 ~ 1598 .11.19일 )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 이순신 태어나던 해에 을사사화 외가-아산 , -노량 해전에서 전사 .

류성용 ( 1542- 1607 ) 풍산 사람, 전쟁 기간중 영의정 , 도제찰사의 신분, 저서 -문집 , 징비록 , 시호는 문충 , 이순신과 어릴때부터 친분이 있어서 투옥시 적극적으로 옹호 하지 못하였음..

원균 ( 1540~ 1597 ) 임진년 개전 초기 , 경상 우수사 , 이순신의 무과 선배임..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면서 반목이 심해짐 , 칠전향 전투에서 패전후 거제도 상륙 적병의 추격전 이후 사말. - 선무공신 일등 으로 책록

선조 ( 1552 ~ 1608 ) - 수라상 떡 먹다가 체하여 사망에 이름

이면 ( 1577~ 1597 ) 이순신의 샛째 아들 - 정유재란시 적들과의 교전끝에 전사 당시 21세 ( 충무공 고향인 아산에서 어머니와 조카들을 뒷바라지 중 )

선조 생애 후반

서자의 후손으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라는 두가지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는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아들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소북유영경은 선조의 뜻이 옳다하며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인목왕후의 섭정을 계획하였으나, 5세부터 18세까지 13년간 섭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선조는 임진왜란 때에도 분조를 경영한 적이 있던 광해군을 세자로 승인한다. 그러나 1608년 상궁 김개시가 수라상에 올린 떡을 먹다 체하여 갑자기 사망한다. 이후 선조의 독살설이 의혹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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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칼의 노래 , 명장 이순신의 이야기를 한글로 보고 서평을 한글로 적고 있는 사실에 나는 갑자기 감격스러워 졌다.. 지난한 42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가 ,,, 상식이하의 리더들이 판을치고 나라가 어지럽혀져도 굳굳이 자신의 길을 가고 , 또한 정의를 지키는 영웅과 덕자들에 의해 지켜져 왔다는 사실에 탄복 한다..

어쩌면 선조는 대단히 운이 좋은 임금이다.. 그 엄청난 두번에 걸친 난리속에 제명을 유지하고 또한 백성들의 원망을 들어가며 궁궐이 불태워 없어 질 지라도 외세의 도움으로 왕권이 다시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 ,,,, 동인 , 소인들의 당쟁 싸움의 한귀퉁이에 저울질 되어지는 존재가 되어도 살아 남기를 바랬던 ----사직을 위해서 ...

이소설은 대단히 감성적이다.. 역사의 객관화한 사실과, 그 당시 개개인의 생각을 뒷받침 하기에는 역부족 이겠거니아

한 인간의 고뇌어린 생각과 행동이 글귀 하나 하나에 배어져 나와 사실감을 더 한다..

[[ 내가 적을 이길수 있는 조건들은 적에게 있을 것이었고, 적이 나를 이길 수 있는 조건들은 나에게 잇을 것이었다. 임진년 개전 이래 , 나는 그렇게 믿어 왔다. 믿었다기 보다는 , 그렇기를 바랐다. 그 바람은 숨막혔다.. 좀더 정직 하게 말해보자 . 사실 나는 무인된 자의 마지막 사치로서 , 나의 생애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다만 무력 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랐다. 바다에서 , 나의 武의 위치는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 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사치는 성립될 수 없었다. 바다 에서 , 나의 위치는 늘 적ㅇ과 맞물려 돌아 갔다. --이하 중략 ]

개전이후 임금의 피난 일정을 한번 살펴 보았다..

임진년 4월 30일 이후 임금의 피난 일정 ------4월 30일 서울 출발 , 5월 1일 개성 도착 , 5월 3일 개성 출발 , 5월 7일 평양 도착 , 6월 11일 평양 출발 , 6월 13일 영변 도착 ( 지금 북한의 핵 저장고 시설이 있는 곳이다.. ) 14일 박천 , 15일 가산

16일 정주 , 18일 선천을 경우 22일 의주 도착 ...

임금은 의주에서 임진년의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계사년 1월 18일 의주를 떠나 서울로 향한다. 환도 일정느 다음과 같다...

1월 18일 의주 출발 , 20일 정주 도착 ,3월 1일 영유 도착 , 4월 1일 가산 도착 , 8월 12일 황주 도착 , 8월 13일 재령 도착 , 8월18일 해주 도착 ,8월 23일 연안 도착, 8월 27일 개성 도착, 9월 19일 벽제 도착 , 10월 1일 서울 도착 , 정릉 월산 대군의 엤집으로 돌아가다 ... 환도는 의주에서 서울 까지 약 10개월 이 걸렸다....

그해 첫 해전인 옥포만 해전을 이순신은 승리로 이끌었다.. -수색섬멸전 - 이순신 함대의 기본 전술이다.. 거북선이 투입된것은 5월 29일 실전이었다.. 경상 해안쪽의 사천 , 당포, 당항포, 율포를 차례로 돌며 적의 함대를 부수었다.. 판옥서전선 23척 과 거북선의 활약상은 놀라웠다... 임진년 7월 제3차 출항, 전라 좌수영 , 우수영의 수군을 합친 전함 49척 발진 . 원균의 경상도 수군 4척이 합세한 해전이 바로 한산도 해전 이다..여기에서 그 유명한 학익진법으로 수세와 공세, 유인과 섬멸 , 도주와 역공, 포위와 역포위의 신속한 국면의 전환을 진두 지휘 한다... 여기에서 성패가 갈린 키워드는 " 전화"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16세기의 해전 방식은 포위 섬멸이나 다수의 화기와 인원 수로 상대방에 갈코리를 걸어 넘어가 육지전을 방불케 하는 해전 ? 아닌 육지전이 일본 토요토미 히데요시 해군의 전쟁 방식이고 이러한 해전에서의 패배로 말미 암아 약 20여일에 걸쳐 한양에 입성 하기는 했으나 뒤로는 의병장들의 활약( 대표적 ; 곽재우 ) 와 전라/ 경상 좌수사의 해군들의 활약으로 그들의 보급로가 끊어 졌다는 대에 시사점이 있다..

더구나 다른 사료를 살펴보면 그들의 싸움 방식은 성주와 백성 , 즉 성과 성의 함락 작전이 경우 , 대개의 경우 성이 함락이 되면 성주는 자결을 하거나 죽고 나머지 백성이남아 식량 배급로의 연결 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로 조선에 파병된 그들은 파죽 지세이긴 하나 성안의 곡물이나 오히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저항이 거세어 진 것에 당황 하였고 ,,

남해안으로 서해쪽으로 해서 한양으로의 보급 수송 선단을 보내려던 계획도 이순신의 판옥 단 13 척에 의해 좌절 되었던 것이다.. 약 300여척의 배가 한거번에 말이다... [ 한산 대첩은 남해안의 두몰목 에서 벌어졌던 국지전 이었으나 그 전과는 전쟁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 놓았다.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상실 했다. 바다를 통한 보급이 끊겪고 퇴로가 막혔다.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 시키 으로서 조선은 전라 , 충청, 황해를 지켜 냈다. 반격의 교두보가 확보 되었고 , 서해를 통한 지휘 계통이 회복 되었다. ]

그 이후 명의 늦은 개입과 의도한 듯한 일본과의 강화 협상에서 , 끝까지 나라를 지킨다는 수군 명장 이순신의 업적으로

마지막 까지 적들의 퇴로를 차단한 공은 말 할수 없이 크다....

히데요시의 죽음과 그의 유언과 그리고 적들의 나라의 혼돈으로 제 각기 돌아 가는 퇴각자들의 마지막 뱃머리를 보면 서

충무공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

그의 아들 셋째 아들- 이면 의 죽음이 어여 쁘다..아산에서 외가 식구들와 어머니를 지켜내기 위한 적들과의 교전 .. 속으로 속으로 눈물 지으며 전장에 임한 아버지- 이순신의 모습에 전율이 느껴진다...

역사는 개인화 할 수록 더 가까이 다가올수도 있다... 사실에 근거한 객체와의 이야기도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나는 , 우리 가족은 ,,우리 공동체는 우리조국은 어떤 미래를 준비해 나가 는가.

2013/ 3/ 12 일 ,,, 밤 ,, 글을 쓰다,,, 그앴날 한산도에서 바라 보았을 청명한 싸늘한 밤바다 하늘일 그것일 것이다.. by 책력거

책에 실린 몇컷 사진 자료를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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