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간 고등어
조성두 지음 / 일곱날의빛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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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두에 ] 

1866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에서 동남구 북면에 걸쳐 있는 해발 579m 성거산에는 신앙의 박해를 피해 숨어살던 이들이 있었다. 화전과 옹기를 굽고 살던 이 산골 마을에 고등어를 들고 온 소년이 등장하며 피바람이 예고된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연상하듯 소나기와 함께 산골소녀 초향과 봇짐장수 아들이자 간잡이 소년의 순수한 사랑이야기는 아름답지만 비극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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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스토리는 3대에 걸친 여인의 구한말에서 근대에 이르기 까지 약 150여년을 걸친 대서사 이다. 지역도 구한말 조선과 중국으로의 이주 그리고 근대 한국 6.25 전쟁을 겪으면 격동의 세월 속에서 살아 남은 여인들의 이야기 ㅡ 디아스포라 ,  이국으로의 삶을 전개 하며 마지막 미국에서의 삶을 마무리 하기 까지의 지나한 세월들  


글의 제목이 고등어가 들어간 까닭은 , 1대 주인공 여인 초향과 붓짐 장수의 아들 원이와의 사랑 이야기가 시초이고 원이의 엄마는 고등어를 염장해 파는 어머니가 간접이 였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 하며 고난 박해의 삶을 살아 왔던 시절 ,  어쩌면 단순한 소설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족의 혹은 한 인간이 써내려간 끝간데 없는 고난의 세계사이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 가자면 -- 


[[ 곧 집안 내부 고발자로 인한 인간 사냥과 가정의 풍비박산. 당시의 사건으로 오늘날 무수한 주검이 묻혀있는 제1, 제2 돌무덤이 있는 성거산의 진실을 캐는 듯, 서사는 1801년 신유년, 1839년 기해년, 1866년 병인년을 오가며 충청남북도와 경상북도 일대에서 벌어진 순교의 현장을 생생히 담았다. 과정에서 소설은 보부상단의 거래를 비롯 사랑의 약속과 신뢰라는 한 측면을 부단히 다룬다.]] 


1대 여인 초향 

2대 여인 송이 (초향의 딸 ) 

그리고 3대 여인 유화 ( 초향의 손주 ) 로 이어지는 모진 목숨들은 우리네 서글픈 한의 역사와도 맥락이 닿아 있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간략 역사적 기술이다. 


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조선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천주교 전래


종교가 아닌 학문으로 받아들여진 천주교는[1] 보유론(補儒論)적 관점에서[2][3] 실학이라는 흐름과 맞물려 학인들의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부패한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속으로 퍼져나갔다.[4] 북경에서 조선 최초로 세례교인이 된 이승훈이 귀국한후 은밀히 신앙모임을 만들었으나[5] 1785년에 형조에 적발되며 유생들의 거센반발이 있었다.(명례방 사건) 이 사건으로 김범우가 유배지에서 사망하고 모임을 이끌던 이벽이 문중의 압박에 못이겨 자진하면서 '명례방공동체'는 와해되었다. 곧 조직이 재건되어 교세가 성장했으나 제사금지라는 교리속에 배교자가 속출하였고, 이 교리는 천주교 탄압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1787년 반회사건으로 천주학 서적이 색출된후 불태워지고 탄압의 강도가 점차 증가하였다.


사교철폐

신해박해(1791년, 정조 15) 이래 “정도(正道)인 유학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소멸시킬 것”이라면서, 천주교에 대해서 온건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승하하였다.[9] 1800년 8월 23일(음력 7월 4일)에 순조가 11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시작으로[10]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11][12]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사학엄금을 명분으로 남인과 시파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했다.[13][14] 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렸다.[15] 그 내용은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니,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역률로 처벌하라”는 것이다.[16] 정순왕후는 이 하교에서 오가작통법의 적용을 언급하였는 바,[17][18]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예고한 것이었다.


남인숙청

사교철폐는 빌미일뿐으로 최우선적인 목표는 선왕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28] 이가환과 권철신은 채제공 사후에 남인을 이끌고 있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은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이가환의 가문이 조상때부터 있었던 노론 벽파와의 악연 때문이었다. 이가환의 증조부 이하진은 홍문관 제학을 지냈는데 1680년 경신환국 때 집권한 서인들에 의해 유배를 가서 2년뒤에 억울하게 죽었다.[29] 또한 이가환의 종조부(從祖父)[30]중 한 사람인 이잠(1660~1706)은 숙종때 노론을 공격하다 장살당했다.

이런 집안 내력은 그 동안 두고두고 공격대상이 될 정도로 노론이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 이가환이었다.[31] 또한 그는 당대에 제일가는 천재로 박학다식함이 동서양의 학문에 막힘이 없었고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요직을 두루거쳤고, 정조가 생전에 오회연교(五晦筵敎)를 통해 이가환을 재상으로 등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친적이 있었다.[32] 이가환이 1791년 진산사건 직후 배교하며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노론 벽파도 알고 있었으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론 벽파가 원했던 것은 이가환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33]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4월 8일에 옥사하였다. 시신은 목을 벤후 길거리에 버려졌다.[34]


박해 진행 일지

3월 17일 -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진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사약형을 받았다.

4월 8일 - 이승훈(충청도 예산군에 유배 중이었음)·정약종·최필공(崔必恭)·최창현(崔昌顯)·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이 서대문 형장에서 사형되었다.[60]

4월 24일(음력 3월 12일) -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그는 황해도 황주로 갔다가 한양으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4월 28일(음력 3월 16일) - 김건순이 체포되었다.

5월 31일(음력 4월 19일) - 주문모가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6월 1일(음력 4월 20일) - 김건순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였다.

6월 30일 - 은언군이 유배지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7월 2일(음력 5월 22일) - 강완숙과 자신이 전교한 궁녀들이 함께 서소문에서 참형으로 순교하였다.

10월 4일 - 홍필주가 서소문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0월 29일 - 황사영이 충북 제천에서 체포되었다.

그 외에도 고광성(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한 고순이의 부친)이 사형당하다. 


다시글주제로 돌아 가면 , 장소는 도촌 ( 1860년대 부터 1920년대 사이에 세워진 천주교인 산속 마을 교유촌 중 하나) 에서 부터 시작 하여 외진 산속 생활을 이어가다 병인 박해 , 신유 박해를 피해 더욱 산속 깊이 숨어든 어느 신자 들의 가슴 서린 이야기들 , 마치 떠살이 ( 평생 물살을 헤치며 살아가는 고등어는 대표적인 떠살이 물고기이다) 를 빗댄 백성들의 고난한 삶을 3대에 걸친 여인들의 귿건함, 거룩함으로 이루어진 억척스런 조선와 타향살이 상하이에서의 서구 열강들의 대척점에 서있는 힘없는 민초들 , 중일 전쟁으로 피하지 목한 피붙이 들은 다시 떠돌이로  자식의 하나는 나성으로 또 다른 이는 다시 조선으로 스며 들며 목숨을 부지 한다.   


30년의 세월이 지난하게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또다시  1950년의 한국 전쟁으로 피란민 생활을 해야 했던 가족들 , 그들 사이 사이 삶의 지탱이 되어 왔던 기술은 다름아닌 , 그 깊은 산속에서도 구워 먹던 고등어 구이 이다. 혹은 찜이던가 .. 일제시기 경성의 내노라 하는 멋쟁이들이 모였다는 모던 걸과 모던 뽀이의 거리에도 근대의 바람은 불어 왔고, 짤은 스커트와 반바지에 정구 ( 테니스)를 치던 모던걸 송이의  타향살이 마지막 종착지로 떠난 미국에서의 이별은 뜻 박에도 낙마사고 이다. 이미 독일 아저씨 피터와의 막역한 사이 . - 그녀 송이의 마지막 묘비명은 이렇게 되어 있다. " 아 , 미국도 좁다. 나 먼저 가마 , 엘리사벳 송이 박  1892.9 - 1978.12. 24  - 신시내티 오크힐 묘지 .  그 어미의 어미 , 그리고 그어미를 산속에서 살뜰이 제몸처럼 보살펴서 새생명의 씨앗을 잉태 하게한 춘삼 까지 ,  그녀들이 내리 거쳐온 세월 만큼이나 이땅의 역사의 골곡에 상흔이 묻어 있다..  Written  by  E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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