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
권성우 지음 / 소명출판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비정성시를 만나던 푸르스름한 저녁] ..글 제목이 우선 문학적이다.. 비정성시란 영화 재목인데, 1947년 2.28일부터 같은해 5월16일까지 발생한 대만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 사건을 영화한 내용이다.. 양조위 주역 ..  말미에 푸르스름의 한글어법을 사용 하여 신비로우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평가이자 산문작가 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의 세대를 풀어 내면서 근대와 현세 그리고 미래도 같이내다 보고자 하였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영화가 비정성시라면, 인간의 내면을 타고 흐르는 사유에 대한 방법론에서 일본에 있는 한국인 자이니치 문학의 정수 화산도를 거쳐 다시 원스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라는 100연전의 미국의 모습을 반추 한다.


몸은 한국에 살아가지만 , 다양한 사고와 나라를 건더 뛰는 상상력 그리고 위대한 문체와 문학 영화와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붓을 꺼내 들고 한줄 한줄 느낌과 글을 써 내려간다.


이미 고인이된 최인훈의 광장 이라는 소설형식을 빌어서 남과 북도 아닌 중간 회색지대에서 갈등 하는 주인공의 서성임 처럼 작가도 한떼 이방이 이었지 않았을까...


학교 MT 버스에서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 불안해 하던 10대, 자유분방함 속의 20대에속엔 건너가기 어려운 사회정의의 벽이 있었고,, 30대에 들어 사회 생활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며 , 40대에 치열했던 생존 경쟁 방식에서 어느 정도 살만해졌지만 후반 들어 기다리고 있는 다시 회사의 명퇴 , 공장의 퇴거 , 철수 등 , 


비평가로서의 세상읽기는 먼저떠난 사람들에 대한 회한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가상 대화도 그렇고, 고 노희찬 의원을 명복을 빌면서 한사회의 또다른 단면을 느끼는 심정, 


디아스포라 , 재일 조선인으로서 고독을 느낀 서경식의 책읽기, 사방이 막힌 그곳에서 오롯히 살아 남기위한 처절한 방식 꾸준한 책읽기,,, 무라카미 하루키도 젊은 시절 오로지 남들과 뛰어 나게 잘하게된 것은 책읽기 였다고 회고 하였고

작가가 된 이후 꾸준히 몸관리를 해오며 집필 시간을 정해서 글 쓰기를 할 만큼 자기 관리에도 철저 하다.


그의 글은 여러 장르르 시험적으로 시도 하였는데 하나의 수필뿐만 아니라 , 편지글 , 칼럼, 추모사등 산문의 여러 형식을 내어 보기도 하고,  에세이 적인 측면에소서 이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종종, 개인적인 내밀화는 타자와의 관계성에 있어서의 매개체가 되기도 하다. 다시 볼 수 없는 혹은 생전에 만나본적 조차 없는 작가 들에 대한 단상은 그의 상념일까, 최인훈 , 김윤식, 노희찬, 허수경등 최근 몇 년사이 세상을 떠나신 분들에 대한 각별한 이병의 정이 애서롭다.


다시 연화와 사람으로 돌아가면 근대 혹은 우리나라와 비숫한 해방기를 맞이한 대만, 그 속에서 우리보다 더 긴 약 40여년간 일제 통치와 압박을 받아 욌던 그들에게 다시 외성인에 대한 압박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었으리라 ,,,


또한 , 해방이 되어서도 일본에 잔류에 남아 있게된 조선인, 남혹운 북에도 속하지 못한 그들은 자이니치란 이름으로 하나의 영역을 형성 하고 있고, 이는 다시 최인훈의 소설 [ 광정] 에서 이명훈의 이념과 현실 속의 괴리를 형상화해 보여 주는 듯 하다.


이야기를 시간을 거슬어 올라 간다면 , 우리 이방인의 역시 , 청교도의 역사를 써내려간 원스어폰어 타임 인 어메리카는 어떠할까,, 새로운 나라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간 그들과 동양에서의 디아스포라와는 대비되는 많은 면이 보이는가,


자유는 결국 쟁취하여야 하는 것인가 , 그냥 주어 지는 쉬운 일들은 세상에 없고, 흔적 조차 남겨놓지 못한 익명의 소리없는 외침들은 그냥 , 저 푸르스름한 어느날 저녁 노을 너머 한 퀴퉁이에서 소리없이 밤이 되어 사위어 가는것을 느낄 지도 모르겠다.. 그대는 ,,,


장르와 시 공간을 넘나들며, 자신의 시대를 회고하고 단상으로 이끌어 내엇던 저자는 다시금 비정성시의 물흐르듯 흐르던 시절의 감성을 바라보고 싶어 졌을까,,, 엔리오 모리꼬리의 영화 음악 테제에 맞춘 에전 LP 판의 음원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잠들고 있을까,,,  실존 하는 우리들에게는 어쩌면 이곳이 디아스포라 진행형 인지도 모를 일이다.. 책력거99 .


--------------------------------------------------------------------------------------------------------------

Value up tip. 대만 2.28 사건


2·28 사건(二二八事件)은 1947년 2월 28일부터 같은 해 5월 16일까지 대만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 사건이다. 중화민국 정부 관료의 폭압에 맞서 대만의 다수 주민인 본성인(本省人)들이 불만을 표출하며 항쟁을 일으키자, 중국 국민당을 위시한 외성인(外省人)들은 본성인을 폭압적으로 학살했다. 대만에서는 2·28대학살[二二八大屠殺], 2·28혁명, 2·28봉기[二二八起義], 2·28사변 등으로도 부른다.

배경[편집]

대만 반환[편집]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으로 대만(臺灣)과 펑후 제도(澎湖諸島)는 요동반도(遼東半島)와 함께 일본제국에 할양되었다. 일제는 대만총독부를 설치하여 51년간 대만을 식민지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그 해 10월 17일 국민혁명군대만에 상륙함으로써 중화민국대만펑후 제도를 영토로 회복하였다. 1945년 10월 25일 대만 주둔 일본군은 중화민국 소속 국민혁명군에 정식으로 항복하였고, 이날부터 대만은 중화민국의 영토로 완전히 복귀되었다.

그러나 중국국민당이 집권하던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공산당과의 국공내전(國共內戰)으로 인해 대만에 정예 관료나 군인을 보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정단위인 성(省)을 설치하는 대신 천이(陳儀)를 대만성(臺灣省)의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으로 임명해 이 곳을 국민혁명군의 군사점령지역처럼 관리했다. 대만에 대한 군사통치는 현지 주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기는커녕 일제의 식민통치행태를 답습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대만 주민들은 새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그들의 통치는 본토에서와 다르지 않았고, 일제(日帝)의 식민통치 이상으로 가혹했다.

본성인에 대한 외성인의 차별[편집]

이 과정에서 대만 사회는 종전부터 대만에 살고 있었던 본성인(本省人)과 1945년 광복 이후 중국 대륙에서 새로 이주해온 외성인(外省人)이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계층 간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겪게 된다.

신임장관(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대만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