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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의 세이지 - SF오디오스토리어워즈 수상작품집
본디소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10월
평점 :
평소 SF 장르를 좋아해서 영화나 드라마, 소설,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분야의 SF물을 시간 나는 대로 챙겨 보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은 종이책만큼 많은 관심을 두지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을 읽다 보니 새해에는 디지털 기기를 좀 더 자주 활용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온 세상의 세이지>는 다산북스와 밀리의 서재가 주최한 SF오디오스토리어워즈의 수상 작품을 모은 책으로, 대상작을 제목으로 내걸었다. 이 책은 오디오 콘텐츠로 확장할 수 있는 중단편 SF 소설을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공모전에서 선정된 작품들이 담겨 있다.
심사위원들의 예심을 거쳐 독자 투표와 세부 심사를 통과한 6편의 작품이 대상과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6편의 작품으로는 대상을 받은 본디소의 「온 세상의 세이지」를 시작으로 우수상을 받은 김채은의 「사랑의 블랙홀.mov」, 배수연의 「지구의 지구」, 이서도의 「데드, 스투키」, 이중세의 「오래된 미래」, 홍인표의 「저장」이다.
이 책에는 공모전으로 선정된 작품집답게 수상작 소개와 함께 저자의 수상소감, 심사위원의 심사평이 함께 실려 있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SF 장르의 매력을 살려 독특한 내용과 구성들이 새삼 흥미롭게 다가온다.
p.15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위화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현은 그 '남들과는 다름' 때문에 부모 손에 이끌려 병원을 들락거려야 했다. 부모를 포기시키기까지 오랜 시간과 지긋지긋한 수고가 들었다. 지금의 외관은 사현이 그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증거였다.
'너도 독버섯이구나.'
우선 결론부터 얘기하자.
결론, 홍사현은 이노 세이지와 연애를 시작했다.
'다 큰 성인 둘이 한집에서 살 맞대고 살더니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로 일축하기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다른 기억들에 묻혀 이노 세이지는 사현에게 완전히 과거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현은 이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이따금 우연히 떠오를 때면, 사현은 자신을 통과한 시간만큼 나이가 든 그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 본디소, 「온 세상의 세이지」 중에서
첫 번째 수록 작품인 「온 세상의 세이지」는 독버섯 생존법을 가진 홍사현과 일본인 유학생 이노 세이지의 연애담을 그리고 있다. 친구 은재는 세이지의 집을 구해주려고 돌고 돌아 사현에게 와서 부탁한다.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 하숙생이라...
나도 이제 슬슬 옛날 사람이 되어가나? 아니지, 20~30년 전에도 이런 설정을 많이 봤다. 하지만 여전히 내겐 쉽게 다가오지 않는 설정이다. 그래서인지 소설 쓰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아무튼, 남녀가 한집에서 살게 됐으니 연애를 하게 되는 건 당연지사 아닐까.
사연과 세이지는 의외로 잘 맞았다. 하지만 독버섯 생존법을 가진 그들의 성격은 정반대로 극과 극이었다. 사현은 집 안에 있기를 좋아한 반면에 세이지는 밖으로 나가기를 좋아했다. 나도 집에 있는 걸 좋아하는데. 이들에겐 서로의 단점을 상쇄하는 특성이 있었지만 결국 헤어지기로 하던 날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게임 중독이고 자기 멋대로지만 자립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던 세이지는 사고 이후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어느 날 일자리를 구했다며 불현듯 세이지는 떠나고 사현도 빠르게 그를 잊는다. 그 시절에 좋았던 사람... 누군가에 대한 기억은 딱 그 문장과 겹친다.
p.36
"이 머리도 이노 군이 해준 거에요."
미현은 하얗게 탈색한 자신의 긴 꽁지 머리를 흔들어 보였다. 다시 탈색하진 못했는지 검은 머리 뿌리가 꽤 길게 자라 있었다.
'어디서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사진 속 세이지는 사현의 걱정과는 다르게 무척 행복해 보였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였던 우울한 낮보다 훨씬 나았다. 건강하고 생기 있는 그의 모습에서 딱히 수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p.39
"이노 군을 만나려면 특수한 장치가 필요해요. 혹시 가상현실을 경험해 본 적 있으신가요? 이노 군 얘기로는 자기가 다이브 하는 걸 몇 번 봤다던데."
"이건 왜... 그냥 평범하게 만나면 안 돼?"
"자세한 이야기는 이노 군한테 직접 들이시는 편이 빠를 거에요. 위험한 건 아니니까 긴장 푸세요. 장비 착용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 본디소, 「온 세상의 세이지」 중에서
「온 세상의 세이지」의 읽다 보니 애니메이션 [공각기공대]에서 쿠사나기 소령이 가상현실 속으로 다이브 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어떤 기분일까 몹시 궁금했는데, 이 소설에도 가상공간에서 살게 된 세이지와 만나게 된 사현은 가상공간으로 다이브를 하고. 그곳에서 만난 세이지를 부정하는데...
최근 급부상한 메타버스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현실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휴대폰이나 전기자동차를 상상만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우리의 현실이 되어 있다. 현실과 가상을 공유하는 SF 소설이 어느 날 현실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김채은의 「사랑의 블랙홀.mov」은 우주여행과 시간 여행을 소재로, 배수연의 「지구의 지구」는 환상의 무대를 배경으로, 이서도의 「데드, 스투키」는 시간이란 개념을 새롭게, 이중세의 「오래된 미래」는 성서를 SF에 삽입해 분위기를 전환하고, 홍인표의 「저장」은 디지털 업로딩이 일상화된 세상을 그리고 있다.
독버섯은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 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장르가 SF물이다. 관심을 끌어 훅 빨려 들어갔다가 허탈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찌 됐든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경험은 낯설지만 흥미롭다. 끌리는 작품부터 하나씩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 포스팅은 다산책방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 출처 : 박기자의 책에 끌리다, 책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