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면 반칙이다 - 나보다 더 외로운 나에게
류근 지음 / 해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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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럽단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기본 모드는 진지 쪽에 가깝다. 물론 친해지면 농담도 잘 하고 유쾌한 면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낯선 곳에 가면 미어캣처럼 탐색 모드로 전환된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 관찰하면서... 그런데, 누가 '진지하면 반칙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그게 뭐 어때서??


자신을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시인’이라 부르는 시인이 있다. 김광석이 불렀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의 노랫말을 쓴 것으로 유명한 류근 시인이다. 그는 여전히 예민한 시선으로 세상 곳곳에 배어 있는 상처와 외로움을 어루만지고 있다. 또한 그리움들이 묻어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참 잘도 쓴다.


이번에 발표한 <진지하면 반칙이다>는 그의 에세이자, 산문집이다. 2018년 1월부터 2022년 8월까지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 중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130여 편을 추려서 담았다고. 여기에 28컷의 일러스트도 양념처럼 곁들여 넣어 읽고 보고 생각하는 재미를 더했다.


p.20

당신만

건너면


이런 문장. 아프다. 링거 한 사발 얼음 동동 뜨워서 원샷하고 싶다. 너무 멀리 왔다. 어려운 책을 읽고, 쉬운 영화를 보자. 그건 내가 내리막에서 자전거 타는 것보다 잘할 수 있는 일. 어제는 초조와 분노 때문에 아름다웠으니까 내일은 새로운 고통이 배달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타고 더 멀리 갈 수 있으리라. 우선은 막차를 타고 인디아 서쪽 조드푸르에 내려서 낙타를 사야 한다. 치욕이 오면 기꺼이 침 뱉을 줄 아는 낙타를 사서 어디든 건너주리라. 그러나, 그리고 나는 당신만 건너면 다 건너는 것이다.


p.48

잊혔던

시가

기억나는 날


새벽에 멜라토닌 5밀리그램을 삼키고 간신히 잠이 들었다. 여전히 나쁜 꿈. 눈을 뜨자 창밖 대나무 이파리들 위에 젖은 눈이 당도해 있다. 나도 모르게 소년 시절 읽었던 시인 이장희의 시구절이 흘러나온다.


"이 겨울의 아침을 / 눈은 나리네 / 저 눈은 너무 희고 /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


(중략)


"눈 내려 고요한 날. 아침부터 잊혔던 시가 기억나는 날, 슬픔에 꺾인 목뼈가 조금 덜 아픈 날...


"님이여 설운 빛이 /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아아, "눈은 나리어 / 우리 함께 빌 때러라." (이장희, 『눈은 나리네』 중에서)





그의 회고록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이 책에서 나의 일상과 비슷한 에피소드를 발견했다. 출퇴근할 때 책 한 권 끼고 타는 버릇이 있는데, 시인도 시집 한 권 들고 지하철에 올랐던 적이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 성수동으로 출퇴근하던 시절, 출근길에서 책을 읽다가 내릴 때가 돼서 얼른 내렸던 적이 있다.


그런데, 아뿔싸... 지갑째 넣어둔 가방을 선반에 올려놓고 내렸다. 그때 충격으로 한동안 책을 읽지 않았지만 어느새 잊고 지금도 스마트폰을 검색하는 대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책 한두 권은 늘 가지고 다닌다. 가방 무게로 어깨가 아프긴 하지만.


시인은 시집 한 권을 들고 2호선 을지로 순환선을 타고 한 바퀴 돌았던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고 나면 시집 한 권이 가슴에 옮아져 있고 다시 시집 한 권을 들고 열차에 올라 한 바퀴 돌면 시집 한 권이 영혼에 옮겨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며, 장래 희망이 시인이었다고.


p.93

중복


태국에 가면 특유의 냄새가 난다. 어디에서나 한결같이 비슷한 냄새가 난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도 뭔가 특유의 냄새를 느낄까? 나는 태국에 가면 공항에서부터 느껴지는 그 냄새가 처음엔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냄새가 그리워서 더 태국엘 가고 싶어지기도 했다.


p.127

목련이

피는

길목에서


목련이 피면 결별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던 여자가 있었다. 목련이 찬란하게 피어나면 그 그늘 아래서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의 깊이로 가슴에 묻어주고 싶은 여자가 있었다. 목련이 피지 않아도 우리는 자주 헤어졌고, 정작 목련이 피었을 땐 너무 아름다워서 헤어질 수 없었다. 목련이 피어 있는 동안만이라도 생애에 드리워진 결별들이 내 것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울긋불긋하던 단풍들이 이제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코시국이란 말도 그러려니 할 만큼 무뎌지고 있는 2022년 10월 말, 이제 가을도 제법 더 깊어졌다. 광화문 광장에는 한복을 입고 고궁 나들이에 나선 외국인들과 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좀 더 세찬 바람이 불면 첫눈을 기다리는 12월로 접어들 것이다.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오면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둘씩 썰물처럼 마음속에 하나씩 차오른다. 멀리 떠난 친구도 있고, 주변에 있지만 자주 만나지도 연락도 뜸한 친구도 있고. 뭐가 그렇게 바쁜지 올해도 책만 파고 있다.


고독과 쓸쓸함 속에서도 ‘나를 어디론가 힘껏 던지는 힘으로’ 살아남았다고 이야기는 하는 시인은 이 계절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시(詩)야말로 ‘삶의 비참을 이기는 칼 한 자루’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책에서는 오랜 세월을 시와 문학에 관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다.


p.150

선인장 꽃


무심코 지나가는데

우리 집 선인장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가을에 핀 선인장 꽃

마음이 문득 환해집니다.


p.188

직박구리


어머니 돌아가시고 얼마 후부터 창밖 가림 스크린 위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한참을 앉았다 가곤 했다. 나는 경루에 먹을 게 마땅치 않을 텐데 싶어서 잡곡과 땅콩 같은 것들을 가끔 저 난간 위에 뿌려두었다. 우리 동네 공원에선 못 보던 새였다. 이젠 두 마리가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새끼인 듯 작은 아이까지 함께 온다.



최근 전국학생만화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대통령을 풍자한 만화 작품 '윤석열차'가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전시된 것과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유감을 표하며 엄중히 경고한다고 밝힌 바 있다.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카툰 장르의 특성상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시의성 있는 주제를 선정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문체부가 공모전 작품 선정에 대해 문제 삼고 나서면서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시인은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책에 쓴 것처럼 말했을 것이다.


p.316

진지하고 엄숙하고 근엄한 인간 중에 제대로 뭔가 이룬 놈 본 적 있는가. 나라 팔아먹는 놈들 중에 진지하고 엄숙하고 근엄하지 않은 놈 본 적 있는가.


- '진지하면 반칙이다' 중에서...



이 포스팅은 해냄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 출처 : 박기자의 책에 끌리다, 책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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