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징비록 - 임진왜란에 관한 뼈아픈 반성의 기록 ㅣ 클래식 아고라 1
류성룡 지음, 장준호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8월
평점 :
며칠 전 여름휴가 기간 동안 영화 [한산]을 봤다. 한산 바다에서 학익진 전술로 일본의 수군을 격파시킨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그렸다. 김한민 감독이 영화 [명량]에 이어 두 번째로 이순신을 조명한 작품으로 굉장히 재밌게 봤다.
[명량] 때보다 등장인물의 배역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 CG/VFX 등이 잘 맞아떨어져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역사 문화 중심공간으로 떠오른 '광화문광장'도 8월 6일 재개장하며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광화문광장의 상징 중 하나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다. 새롭게 조성된 광장은 이순신 장군 동상을 기점으로 세종대왕 동상을 지나 광화문 입구에 이르는 세종문화회관과 지상으로 연결시켜 사람들의 이동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이순신 장군 동산 앞에는 명량 분수가 설치됐고, 바닥분수 양쪽으로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가 설치되어 시민들이 언제든 편안하게 산책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점에 북이십일의 문학 브랜드 '아르테(arte)'에서 새롭게 출간된 <징비록>이 눈길을 끈다.
이 책은 젊은 학자들의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클래식 아고라'의 첫 번째 시리즈로 선보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징비록(懲毖錄)]은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전란에 대한 반성과 함께 앞날에 대한 경계와 충고 등을 담은 7년의 기록물이다.
p.11
신숙주가 임종할 때, 성종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그는 "바라건대 일본과 평화로운 관계를 잃지 마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감동한 성종은 부제학 이형원과 서장관 김흔을 일본에 파견하여 화목을 도모하게 했다.
p.12
히데요시는 병력을 사용하여 여러 섬을 평정하고 일본 내 66주를 하나로 통합한 다음 드디어 외국을 침략하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사신이 늘 조선에 가는데도 조선 사신은 오지 않으니 우리를 얕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야스히로를 조선으로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구했는데 그 서신의 말이 매우 거만하였으니 "이제 천하가 나의 한 손아귀에 들어올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당시 좌의정과 병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했던 유성룡은 임진왜란 동안 겪었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고, 16권 7책으로 된 목판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 등을 치밀하고 입체적으로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1969년 11월 7일 국보 제132호로 지정됐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화 [한산]이나 광화문광장의 재개장으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관심도가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이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을 나름대로 재해석해 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임진왜란에 대해 유성룡의 생각을 정리한 기록서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군관이었던 이순신을 천거해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한 인물이다. 그는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했고, 자신은 임진왜란에 4도 도제찰사, 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조선을 망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로 꼽는 탕파 싸움이 이때도 각 진영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다. 정인홍, 이이첨 등 북인의 상소로 노량해전이 벌어진 날 유성룡은 영의정에서 관직삭탈 당한다. 그는 안동으로 내려갔고, 선조의 부름에도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겪었던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징비록>을 쓰게 됐다고 하니, 한 번쯤 시간을 내서라도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p.31
15일 일본군은 동래로 진격해왔다. 송상현은 동래성 남문으로 올라가 군사들에게 싸움을 독려했으나 성은 반나절 만에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태연하게 그 자리에서 일본군의 칼을 받고 죽었다. 일본인은 그의 죽음을 가상하게 여겨 관을 마련하여 성 밖에 매장하고 묘표를 세워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되지 각 군과 현은 풍문만 듣고도 도망하여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p.81
임금의 행차가 평양을 떠난 뒤로 인심이 무너졌다. 난민들이 지나는 곳마다 창고에 들어가 곡물을 약탈했다. 순안, 숙천, 안주, 영변, 박천 등의 고을 창고가 차례로 모두 약탈당했다. 이날 임금의 행차가 가산을 떠났을 때, 군순 심신겸이 나에게 "이 고을에는 곡식이 매우 넉넉하여 관청에도 쌀이 1천 석이나 있어, 명나라 구원병을 먹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징비록>을 읽어보면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분석한 내용이 인상적이다. 조선 전기에는 일본 파견이 18회였고, 일본 국왕사의 조선 파견은 71회에 달했다. 하지만 조선 중기까지 조선 땅에 평화가 지속되면서 일본과의 왕래는 점차 끊어졌다. 이로 인해 조선 중기 때는 일본에 대해 무지했고, 군 양성도 미흡했다.
유성룡도 <징비록>에 평화로운 시절이 계속되면서 나라 백성들은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분열되었던 일본을 통일하며 권력을 한데 모을 수 있었고, 내부에 쌓인 불만을 임진왜란을 일으킴으로써 조선을 발판 삼아 명나라까지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도요토미는 끊임없이 조선에 스파이를 보내 조선의 정세를 두루두루 살피며 침략의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조선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정쟁만 일삼았다. 이때부터 당파 싸움이 본격화되었는데, 양반도 돈을 주고 사거나 병역을 돈으로 대체하는 등 당시 조선에서는 실질적인 군대 양성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일본은 대군을 이끌고 부산 동래를 시작으로 충주를 거쳐 한양, 평양까지 20여 일 만에 진군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했고, 내전을 통해 쌓은 실전 전투 경험과 조선에 스파이를 보내 얻은 정보력으로 조선군을 앞서고 있었다.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조선군은 파죽지세로 밀렸다. 거기에 백성을 챙겨야 할 선조는 서둘러 도망치기에 바빴다. 의주까지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백성을 버리고 몰래 도망간 임금에 대한 분노는 결국 경복궁을 불태우기에 이른다.
p.128
나는 종사관 신경진을 보내 제독 이여송을 보고 군사를 물리면 안 될 이유 다섯 가지를 설명하게 했다.
첫째, 선왕의 분묘가 다 경기 안에 있는데, 지금 왜적들이 있는 곳에 있으므로 신이나 사람이나 수복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경기도 이남에 있는 백성들은 날마다 구원병이 오기를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다시 굳게 지킬 뜻이 없어져서 서로 거느리고 왜적에게 귀의할 것입니다.
p.167
원균이 칠천량에서 일본군에게 패전했다는 보고가 조정에 도착하자, 조정과 민간이 다 크게 놀랐다. 임금께서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모으시고 계책을 물었으나, 여러 신하들은 두렵고 당황하여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은 조용히 "이것은 원균의 죄이니 마땅히 이순신을 기용하여 통제사로 삼는 길뿐입니다"라고 하니, 임금도 이 말을 따랐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난길을 함께하며 전시 내각을 책임진 총책임자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벼슬길에서 물러나 '지난 일의 잘못을 징계하여 환난이 없도록 조심하자'라는 취지로 임진왜란 7년의 기록을 담은 <징비록>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은 조선 선조 25년(1592년)부터 31년(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두 차례 걸쳐 침략하면서 7년간 계속됐다.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 초반에는 일본이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점령하며 승세를 올렸지만 이후 이순신, 권율을 비롯해 조선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반전의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는 <징비록> 서문에서 임진왜란은 실로 참혹했다고 기록했다. 수십 일 만에 한양, 개성, 평양을 잃었고, 팔도가 산산이 부서졌다고 썼다고 남겼다. 임금이 전란을 피해 한양을 떠났음에도 조선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보존하라는 하늘의 뜻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징비록>은 조선시대 씌여진 책이라 원문을 그대로 읽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책은 원문을 내용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현대어를 풍부하게 사용해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씌여졌다. 또한 책 뒤편에 박제된 <징비록>과 유성룡이란 제목의 해설집도 참고해 보시기 바란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전란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위정자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함께 후손들이 임진왜란 같은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기를 바랐던 유성룡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포스팅은 북이십일 아르떼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 출처 : 박기자의 책에 끌리다, 책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