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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나라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5년 7월
평점 :

이 포스팅은 내로라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 작성했다.
『눈먼 자들의 나라』는 단순한 SF가 아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정상', '다수의 판단', '보편적 상식'이 언제나 옳은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SF 소설의 창시자 허버트 조지 웰스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나라』는 눈먼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다. 이 책은 보편적 '정상성'의 기준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고, 다수에 의해 진실이 재편되는 사회 구조를 고발하는 날카로운 풍자적 성격을 띤 경고서라고도 할 수 있다.
"보이는 자는 눈먼 자들 사이에서 왕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눈이 보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눈먼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데 그건 눈이 잘 보이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라고 했던 것처럼, 어떤 이념이나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다른 이념이나 생각은 배척되기 마련이다.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는 외눈박이가 왕이다'라고 했지만 외눈박이도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는 비정상에 속한다. 따라서 왕이 될 리 없다.
깊은 안데스산맥 골짜기 속에,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마을로 시력을 가진 한 남자가 추락한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시각을 잃은 상태로 수 세대를 살아왔고, 시각이라는 개념조차 잊어버린 곳이었다.
누네즈에게 "보는 것"은 생존과 우위의 상징이지만, 그곳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말일뿐이며, 오히려 병적인 환각으로 간주된다. 그는 이 공동체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채 고립되고, 결국 자신의 '다름'이 오히려 위험이 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우리가 무심코 수용하고 있는 사회적 규범이 누구를 배제하고, 어떤 폭력을 정당화하는가에 대해 묻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여 온 사실들이나 정상 혹은 비정상이란 개념이 갖고 있는 뜻이 정말 그런 것일까?
이 책을 펴낸 내로라 출판사의 허영지 대표는 소설 속 상황은 오늘날의 상황을 예언한 것처럼 느껴진다며, 어느 날 갑작스레 폭발한 화산과 산사태로 고립된 눈먼 자들의 나라는,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우리의 온라인 환경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알고리즘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묶어 빈약한 주장에도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러한 주장의 논리가 실제 사실에 기반하고 있는지조차 개인의 힘으로는 알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허버트 조지 웰스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명 비평가이다. 그는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 등을 썼다. 그는 유전공학, 시공간 이동 등 오늘날 SF소설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처음으로 제시한 작가로 유명하다.
이 작품은 몇 차례 단편 영화와 TV 에피소드 형식으로 영상화되었으며, 대표적으로 2011년 공개된 단편 영화에서는 주인공 누네즈가 결국 시각을 포기하는 선택을 암시하며, 공동체에 순응하는 결말을 보여주기도 했다.
반면, 원작 소설은 누네즈의 자아 정체성과 '보는 자'로서의 자부심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눈을 포기하려다가, 결국 그 사회를 떠나는 결단을 내린다. 웰스는 다수의 세계에 순응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시각과 신념을 지키는 삶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눈먼 자들의 나라』는 우리 사회가 지닌 '보는 척하지만 보지 못하는' 병리적 구조를 날카롭게 드러내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눈먼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힐 수 있다. 이 책은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짧은 이야기와 함께 편집자의 말, 독후 활동, 저자 소개, 그리고 몇 편의 에세이(도루묵의 갖은 양념,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우월주의, 정상성에 대한 고찰, 필터버블: 알고리즘의 그림자)로 생각의 깊이를 더해준다.
* 박기자의 끌리는 이야기, 책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