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시선 50
이종형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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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돌에 새겨진 子.혹은 女

살아 있었다면
큰형님뻘이었을
큰누님뻘이었을
아무개의 子, 혹은 女라고만 새겨진 위패 앞에서

겨울바람에 떨어져 누운
동백의 흰 눈동자를 떠올렸습니다

뼈와 살이 채 자라기도 전에
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스러져
까마귀 모른 제삿날에도
술 한 잔 받아보지 못하며
애써 잊혀진 목숨들

거친오름 그림자를 밀어낸 양지바른 터에
복수초 노란 빛깔보다 선연한
이름씨 하나씩 꼭꼭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이 섬에 피는 꽃과 바람들
곶자왈 숨골로 스미는 비와 태풍들
저 이름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종형 시집/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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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항쟁.
차마 전하지 못했던 입술들이 뽑혀나간 혀들이 바람 속에 싹을 티우고 잎을 맺고 꽃을 피워 시인의 눈에 담겼나보다. 뽀얀 표지를 갓난 아이의 볼인양 자꾸 쓰다듬게 된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벌써 4년 전이라 말해야 하는 그 해 제주로 가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
'뼈와 살이 채 자라기도 전에/죽음의 연유도 모른 채' 떠난 아이들을 말이다.
그 해 4월 이었다.

기어이 쓰여진 시.
시어 하나하나가 핏덩이다.
제주 어디라도 발 딛는 곳마다 신음이 새어 나올것 같은데 그 땅에 기지를 짓고 그 땅을 재산 삼는 짓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저지르는 자들..
제주에 노란 유채가 피는 건 우연이 아닌듯 하다.
노랗게 자지러지는 비명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 잊고 사는지..얼마나 피맺힌 역사에 기대어 사는지..오래 끊었던 술 한잔 마셔야겠다.
시집이 좋다..라고 차마 말하기 두렵다.
좋고 나쁨의 구분조차 불필요하다.

4.3항쟁에 뿌리를 둔 시집. 어떤 역사적 사건에 근간을 둔 시집들은 너무 무겁거나 비통하다. 비극적인 역사를 노래하자니 어쩔 수 없을테지만..시집은 한 개인의 역사와 비극의 역사를 교차하며 쓰였다. 어떻게 이 악몽을 거둘까. 피하는게 아니라 마주보며 함께갈까를 이야기한다.
1월도 다 지나고 허둥대다보면 곧 4월이겠지.

시집을 다시 차근차근 읽기로한다.
어떤 해석도 의미도 두지 않고 제주의 구멍난 바위 사이를 지나치는 바람소리를 듣듯 읽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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