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돌머리
임명희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빗돌머리를 찾아봤다.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음 영탑리라는 지도가 하나 나온다. 작가가 서산 출생이라는데 여기가 맞겠구나.

작가의 유년시절을 회고하며 적어낸 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한 시기를 지나온 사람의 역사를 적은 듯 했다.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이 설핏 스쳐지나갔던 글이다. 비슷한 시기의 서술은 비슷한 색감으로 읽히겠으나 이것은 작가가 책을 펴내며에  '수두룩한 엄살들은 내 방식의 사모곡일시 분명하겠다' 라고 썼듯 어머니와 가족과 형제들이 함께 걸었던 시기에 대한 애정이며 애증이었다.

산문집이라는 구분이 무색할만큼 소설적이기까지 한 서사는 진심 때문일것이다. 자신의 삶의 시작과 과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때로 휘청일만큼 감상적이거나 적잖이 왜곡하여 위안삼기도 한다. 기억의 왜곡이 주는 일종의 환각일지도 모를일이다. 한국전쟁 이후 함께 겪어야 했던 혼란의 시기를 자란 작가와 형제들, 그리고 생존의 기둥이었어야 했던 어머니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영화에서 질리게 보아 온 것들이다. 기승전애국으로 이어진 글들..고진감래를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글들의 불편함과 달리 여전히 강팍하고 애절한 시대를 살고 있음을 반증하는 글. 그래서 수긍하게 된다. 어떤 치장도 포장도 없이 고스란히 적어내린 역사와 사람의 서술.

어쩌다 보니 엄마는 3.15 부정선거에도 개입하여 한 몫을 하게 되고, 친척집이라도 동가숙서가식하며 눈치를 보게 되었다.

가감없이 써내려간 글들은 때론 한숨을 때론 안타까움을 때론 희미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랬지, 이런 시기를 살아왔지. 좀체로 나아지지 않는 처지에 그래도 이만큼 살게 된게 어디냐며 최면을 걸듯 읊조리며 살아왔지. 그래서 남은건 뭘까?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낸다. 단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정형화된 표현을 빌자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눈꼽만큼씩 밀고 있는 것이다. 더 빨리 더 멀리 가자고 재촉하는 채직을 감내하며 이것이 대의라고, 이렇게라도 살아내야 한다고 이를 악물고 말이다.

내 유년의 시절과 지리적 차이가 있고, 시기적 오차가 있지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며 읽어낸다. 어쩌면 이럴까..

형태만 달라진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고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매일처럼 죽음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가끔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젊었던 엄마를, 병약했던 아버지를, 완고했던 할머니를, 쌀쌀맞던 고모를, 한없이 다정해서 가난을 애인처럼 끼고 살던 작은 이모를..

어린 눈에 비친 어른들은 하나같이 답답했고, 하나같이 무서웠고, 하나같이 미웠다. 내가 몇살이 되야 저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살게 될까하는 끔찍한 생각도 했었다. 내 모든 불편과 불행과 부당함에 이유가 저들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터무니없는 적의가 어떻게 생긴건지도 모를 초파리처럼 자꾸 머리 속에 꼬여들곤 했다.

내가 그들만큼의 나이가 되어 과거의 어떤 사건들을 떠올릴 때, 그 사건의 현장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던 엄마가, 아버지가, 할머니가, 고모가, 작은 이모가, 외할머니가 개입한다.

어린 나를 이불 속에서 끌어안고 옛날 이야기 대신 4.19를 이야기 해 준 아버지, 국민학교에 입학하자 애국자가 되라며 '국민교육헌장'을 반듯한 글씨로 적어오라던 할머니, (그걸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셨던..)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동원되어 울며불며 태극기를 흔드는 여학생이 되었을 때 옆에 서서 사탕을 우물거리며 박수를 치다 경찰에게 끌려나간 작은 이모, 6.10 민주화 항쟁 때 명동성당 밖에서 까치발을 하고 딸을 찾던 엄마. ..

그 후로 오랫동안 선거철만 되면 아웅다웅 다투는 엄마와 나..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새벽기도를 하는 엄마와, 사람의 나라가 되어야한다고 눈을 치켜뜨는 딸년의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한 사람의 시간은 평면이 아니다. 입체적이며 역사적이다. 방구석에서 책만 읽어대는 지금의 모습도 내 아이들이 기억할 '그 때의 엄마'의 한 조각일 것이다.


산문집을 읽을 때는 습관처럼 천천히 읽는다. 생각을 다지듯..

빗돌머리는 그런 습관을 잠시 미루게 한다. 개별 에피소드들이 연결되며 큰 그림이 되고 큰 사람이 되고 큰 공감이 된다.

무조건 적인 헌신, 사랑, 믿음..이런 것이 가족이 아니라 실수하고 상처를 주고 투닥거리며 단단하게 단련시키는 동지이며 도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아이들..내가 책임져야 할 아이들이 아니라 같은 시대를 손잡고 건너는 동지일게다.

내 부모와 친천들..나를 지치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근원이 되어주는 시작일게다.


빗돌머리..재밌다.

개인의 역사가 시대의 역사와 다르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내야할지를 고민하게 한다.

나라에서 하는 일에 개인이 나설게 아니라는 말을 더는 못하게 할 구실이 찬찬히 쓰여졌다. 임명희, 이 사람의 다른 책들도 읽고 싶어졌다.

진심은, 건강한 사람에 대한 애정은 어떻게 쓰여지는가 궁금해졌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6-14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타샤 2016-06-14 14:03   좋아요 0 | URL
ㅇㅇ..안그래도 어제 커피집 포스팅 보면서 브론테구나..했어. 잘지내지? ^^

2016-06-14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타샤 2016-06-14 14:45   좋아요 0 | URL
ㅎ..생각이 나긴했구나..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