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경전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40
김수우 지음 / 실천문학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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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는 숭고한 영혼들의

용감한 몰락을

흉내 낼 수 있다면

시와 삶에 빚지는 일, 더 뻔뻔해져도 될까.>

 

시집의 제일 첫 장. 보통은 시인의 말, 혹은 들어가며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부분이다.

"들어가는 길"이라고 되어있다.

참으로 적절하다. 김수우의 시집 답다. 생각하게 되었다. 떠나고 떠났으나 돌아오고 돌아온 그 이의 발걸음은 완성을 찾는 여정이 아닌 참 몰락을 찾는 길일 수도 있었겠다 싶어진다.

 

김수우를 처음 읽게 된 것은 "붉은 사하라"를 통해서였다.

젊은 어느 날, 한사코 떠나자는 사내를 친구나 하자며 홀로 보냈다. 그는 타클라마칸으로 발길을 잡았고 그 후 돌아오지 않았다. 간간히 들리는 모랫바람에 사막에서 죽었다고도 하고, 어느 사막의 여인과 결혼하여 오래 전 대상들처럼 실크로드를 넘나드는 장사치가 되었다고도 했고, 모래 폭풍이 거세던 날 모래 속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고도 했다.

타클라마칸..말 그대로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붉은 모래의 세계.

사막은, 떠남의 의미라기 보다 떠나버림의 의미로 늘 기억을 버석거리게 했다. 그 즈음 붉은 사하라를 보았다.

김수우. 이름이 수우니까, 최소한 미양가는 아니니까. 잘 쓰였겠지. 이런 사리분별조차 안되는 그리움과 혼란 속에 시집을 선택했다. 붉은 사하라. 내겐 온전히 붉은 타클라마칸으로 읽힌 그 시집.

 

어찌되었든 김수우의 시는 부메랑처럼 유영한다. 나에게서 시작해서 멀리, 갈 수 있는데까지 멀리 날아갔다가 제자리처럼 보이는 시간이 스쳐간 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혹은 어떤 풍경을 찍어놓은 사진처럼, 샌드아트처럼 무던히 바라보게 한다.

 

몰락 경전. 그 흔한 조사 '의'마저도 떨구어 내고 단촐하게 적어 낸 시집의 이름 몰락 경전.

완전한 몰락은 가능한가를 묻게 한다. 지극히 살고 싶은, 간절히 돌아오겠지만 떠나게 되는 그 호기심과 열정의 중심을 보게 한다.

한창훈의 발문도 거칠지만 좋았다. 비단처럼 유려한 발문이었다면 ..뭐..그래..그렇다고 치자. 했을지도 모른다.

갯내에 절은 사내가 투박하게 쏟아낸 김수우의 이야기가 좋았다.

 

 

사라진 詩

 

눈을 뜨는

순간, 송사리 떼처럼 화악 글자가 흩어졌다

'완벽한'이라는 수식어와 '는' '과'라는 토씨만이

속눈썹에 걸려 달각거렸다

열이 많았고, 꿈의 철물점에서 시를 쓰던 중

 

흩어진 자음과 모음의 흰 알갱이들은 천정으로 스며들고

그물에 걸린 가시복어처럼

새벽안개에 끌려나온 몇 낱 국어들이 떨떠름해 한다

미안했다

 

밤나무 숲을 걸어 다니는 고슴도치나

앞발로 흙을 파고 뒷발로 흙을 밀어내는 두더지

물뱀과 싸우는 땃쥐를 닮았을

동사와 명사들, 그물을 빠져나간

꿈속 어휘들

배고픈 소년 가슴팍에 싹을 틔우겠지

 

시는 언제나 환생의 그늘

매일 흰 양말을 쌍봉낙타에게 신기는 것

 

차라리 존엄해라 당당해라

결코 문장이 되지 않는 고통이여

혀끝으로 외워지지 않는 강이여 산이여 혁명의 공식이여

뽑지 않은 진검이여 몰락이여

 

망각의 변방에서

애벌레 한 마리, 첨탑을, 첨탑의 하늘을 밀고 있다.

 

 

어디쯤에서였을까? 무엇때문이었을까?

이 시를 읽다가 울컥했다. 잘 못했어요. 사과를 해야할 것 같았다.

이렇게 제멋대로 제 감정에 취해 읽어선 안되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저 혼자 제 감정에 취해 읽어낸 뒤 끝이 찜찜했다.

제대로 자살하지 못한 것 처럼. 상처만 남은 흉한 몰골의 패배자가 된것 같았다.

다시 읽어야겠다.

몰락의 신성한 경지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도자처럼, 혹은 점자를 읽어내는 것처럼 온신경을 모아 몰락을 기원하며 읽어야겠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아쉬운 일이 아닐것이다.

또 다른 새로운 흔적을 남겨도 좋다는 허락같은 것은 아닐까? 거기, 몰락의 충동이 시작되는 지점이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부산에 있다는 김수우의 공간이 궁금해졌다.

언제 한 번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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