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일기 - 우리가 함께 지나온 밤
김연수 지음 / 레제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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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또 아주 자주 책은 가장 좋은 멘토가 된다.

그러니까 그녀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나이들면 모든 소설이 아니라 어떤 소설들이 읽기 싫어진다는 얘기다.

어떤 소설이냐면,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를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소설들이다. 이건 육체적 쇠퇴와 관련된 변화이리라.
그녀가 자신의 남성 편력에 대해 고백한 뒤에야 늙는다는 것에대해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타인과의 관계에서 놓여나게 되면서 늙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삶의 가장 큰 반전이 숨어 있었다. 늙으면 더이상 타인의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하니 외롭고 서글퍼지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이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쓸 필요가 없으니 하고 - P28

싶은 일을 마음껏 하자는 긍정적 태도가 생긴 것이다. 평생 편집자로 살아온 그녀에게는 글쓰기가 바로 그런 일이었다.

이 놀라운 변신담은 소설 읽기가 시들해졌다」에 이어지는 글, 「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가」에 나온다. 다이애너 애실은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야말로 노년에 찾은 최고의 행운이라고 말한다. 계기는 오랜만에 열어본 서랍에서 발견한 두 페이지 분량의 글이었다. 다음 날 그녀는 뭔가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타자기에 종이를 끼웠다가 단숨에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됐다. 그 이야기는 스무 해 전의 실연과 관련이 있었다. 그 실연 이후 그녀는 여자로서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랬는데, 그 일을 정확하게 쓰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뭔가가 일어났다. 즉, 그때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인생의 실패자라는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고, 그빈자리로 평생 느껴보지 못한 큰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이 극적인 변화를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젊을 때는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관점에 의해 내가 누구인지가 상당 부분 결정된다. 이런 현상은 중년까지도 계속되는데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은 성이다." 나이가 들면서 타인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신의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되면서 비로소 솔직한 글쓰기가 가능해졌고, 그 결과 오랜 상처가 치유되며 그녀는 새로운 행복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대단한 변화지만 그녀가 더 나아가 그 글을 출판하는 용기를 내며 작가의 길로 접 - P29

어든 것에 비할 바는 못 되리라. 그런 점에서 노년이란 온전히 자신으로만 살아가면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시간이라 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실패한 삶이었다고 생각한 대도 괜찮아. 늙은 뒤에도 기회는 생겨. 그녀의 삶은 내게 그런 말을 들려주는 듯하다.

그렇기에 다이애너 애실은 "돌이켜보면 그 일이 있었기에 내 인생이 전반적으로 훨씬 즐거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랫 동안 내 인생이 실패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니, 세상에, 전혀 그렇지 않았다"라고 쓰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의 도입부에 인용한 문장은 그다음에 이어지는 「후회하지 않아」의 시작 부분이다. 이제쯤 밝혀지겠지만, 이 도입부의 속뜻은 다음과 같다.

‘여든아홉 살이 된 나를 보면, 그동안 힘든 일도 많았고 못 해본 일도 많으니 후회하리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후회는 없어. 이제는 현재를 온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됐으니까?

멋지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여든아홉 살이라니, 정말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 P30

변함없이 눈부신 그 여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지극히 아름답지요. 그리고 늙으면 그 사실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생각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게 돼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지요. 모든 것에."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세상사가 못마땅해지는 내게 나치 수용소까지 다녀온 이 할머니가 덧붙인다. "나는 악에 대해 잘 알지만 오직 선한 것만 봅니다."

이런 할머니들이 있어 나는 또다시 장래를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장래희망은, 다시 할머니, 웃는 눈으로 선한 것만 보는 할머니가 됐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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