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이야기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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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변부는 우리에게 늘 불가사의한 무력함을 안겨주므로.”p47 는 단편 ‘녹색 아이들’의 마지막 문장이다. 화자인 폴란드 국왕 주치의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볼히니아 숲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피부가 녹색인 두 명의 아이들을 만난다. 이 아이들의 존재와 이 아이들이 떠나온 미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낯설고 기이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야기의 기묘한 허구성을 현실에 대한 의심으로 전도시킨다.

현실은 얼마나 불투명한가. 중심은 얼마나 허구적인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단편집 <기이한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익숙함에 질문을 던지도록 집요하게 독자를 몰아간다. 현실의 허구성은 비현실적인 것을 통해 드러난다. 중심의 기만성은 주변주의 생생함을 통해 누설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무지는 우리의 앎을 통해 밝혀진다.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카르추크의 국내 최초의 단편집 <기이한 이야기>는 놀랍도록 기이한, 놀랍도록 예민한 장소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낯선 장소는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세계(승객, 병조림, 실화, 솔기, 모든 성인의 산, 인간의 축일력)이거나 이미 당도했을지 모를 미래의 세계(방문, 모든 성인의 산, 인간의 축일력)이거나, 혹은 한때 우리 자신이었으나 잃어버린 세계 (심장, 트란스푸기움, 녹색 아이들, 모든 성인의 산)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세계들은 하나이다.

토카르추크가 그려내는 미지의 영역은 동시에 인간 의식의 무능 또는 소실 또한 드러낸다. 우리는 ‘자연(인류를 포함한)’이라 부는 것의 정체를 알지 못하며 (녹색 아이들, 심장), 우리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승객, 병조림, 솔기, 실화, 심장, 인간의 축일력), 우리는 다가오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트란스푸기움, 모든 성인의 산). 따라서 우리는 조금 자중해야 한다.

‘승객’은 이 단편집의 승선 세리머니 선물 같은 작품이다. ‘녹색 아이들’로 고도가 높아지고, ‘병조림’과 ‘솔기’로 토카르추크 월드의 기류를 타기 시작한다. ‘방문’으로 고도가 한껏 높아지고, 뒤로 갈수록 이야기들은 더 깊은 음영의 낯선 상공 속을 여행한다.

공포, 상실, 죽음, 익숙함, 냉혹함과 취약함, 어리석음과 폭력성, 잔인함과 나약함, 구원의 가능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들은 너무도 기이하고, 낯설어서 한번 읽으면 쉬이 잊히지 않을 선명한 이미지들을 마음에 새긴다. "언어나 말은 그 뒤에 이미지가 버티고 있어야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p82 ‘방문’ 속 화자의 말처럼 토카르추크의 단편들은 이미지로 각인된다. 작가가 ‘실화’에서 인용한 네덜란드 화가들인 멜키오르드 혼데쾨터와 헤리 멧 드 블레의 그림들처럼 이야기들은 “불길한 징조”와 “의미와 숨겨진 징후”들로 가득 차 있다.

번역자인 최성은 선생은 올가 토카르추크를 ‘단편 장인’라 평가한다. 과연 그렇다. 책을 읽다 덮고, 다른 일을 해야 할 때도 마지막 읽은 문장은 독자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문장에 갈고리라도 달린 것처럼. 불가사의한 이야기들은 불가사의한 공모로 서둘러 독자를 기어코 책 앞에 앉힌다.

“목걸이를 손에 집어 드는 순간, 녹슨 줄이 끊어지면서 빛바랜 구슬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졌고, 그는 결국 꽤 많은 구슬을 찾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잠 못 드는 밤이면, 그 구슬들이 과연 어디에서 무념무상의 둥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먼지 덩이 속에 정착했으며, 바닥의 틈새 어디쯤 둥지를 틀었는지 종종 궁금한 마음이 들곤 했다.”p59

구슬들이 아직 목걸이였을 때를 기억하기에, 그 목걸이를 했던 사람과의 추억을 간직하기에, 남자는 흩어져 사라진 구슬들의 현재가 궁금하다. 올가 토카르추크야말로 기억하고, 간직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이야기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사라지고, 망각되고, 다가오는, 그리고 되풀이되는 세계에 대한 연민과 애도의 마음이 이 책 <기묘한 이야기>들 전편에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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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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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그리고 MONSTERS, 표지 위 제목들이 겹쳐진 채 어긋난다.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괴물이라 명명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지극한 혼란과 분열. 초점을 잃어 착시를 일으키는 이성과 감정, 숭배와 혐오의 불협화음. 이 흔들리는 초점을 정확히 맞춰줄 렌즈가 있을까.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괴물들>을 통해 창작물과 범죄를 일으킨 창작자, 그리고 수용자의 애착과 반감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다. 오랜 역사로 축적된 예술과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이라면 이 애증의 트라이앵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을까. 인터넷이 가져다준 축복(?)으로 우리는 우리가 즐기는 창작물과 창작자를 분리할 수 없게 됐다. 데더러는 말한다. “창작자의 전기를 떨쳐 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전기 속에서 헤엄친다. 전기는 질릴 정도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p73

 

읽고, 보고, 듣고, 나는 매일 누군가가 창작한 것을 향유하고 감상한다. 그런데 그 누군가몬스터라면? 나는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반드시 혼자라도 그의 캐럴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아내와 아이들을 학대했다면?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나는 울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창작물들을 즐기고, 그것들의 창작자들 중 생각보다 많은 이가 문제적 인물들이라서 창작자와 창작물, 그리고 수용자인 나 사이의 무수한 함수관계는 늘 나를 괴롭힌다. 한마디로 개운치가 않다. 이 괴로운 심연을 언젠가는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그 심연으로 첨벙 뛰어든다. 나는 그의 등에 올라타고 안전하고 깊숙하게 그 무수한 딜레마들의 한복판 안으로 들어간다. 처음 그와 이 여행에 동참했을 때 나는 이렇게 멀리까지, 이렇게 깊이까지 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스스로 윤리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도덕적 감정을 품고 있다” p43

 

작가는 창작물과 창작자에게 개인이 특정 방식으로 반응하는 정동의 결들을 아주 세심히 분석한다. 우리는 감정을 의견으로 치환한다. 분노와 관용의 기준은 생각보다 감정에 좌우된다. 뿐만 아니라 괴물을 향한 공개 비난은 화살의 방향을 돌리기 위한 방어일 수도 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니까. 저기를 보라”p61, '괴물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는 복잡한 맥락이 숨어 있다.

 

"나에게 괴물의 의미는 특정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이다.”p65

 

괴물은 작품에 얼룩을 낸 사람이다. 작가는 이 얼룩은 무엇이고, 그것의 파급력은 어떤 것이며, 수용자가 그것을 제거할 수 있을지 파헤친다. 창작자와 작품뿐만이 아니라 개인사에 적용해 봐도, 작가가 분석해내는 얼룩은 인생의 문제이다. 절절히 공감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얼룩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나 자신의 어떤 조각을 잃을 가능성도 높아진다.”p80

 

소비자는 창작자와 작품 밖에서도 그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소비자는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창작자에게서 가져온다. 데더러는 팬덤 문화를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 수치심과 연결해 분석한다. 그는 유사 사회관계의 측면에서 소비자의 감정은 더욱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고 분석한다. 점점 더 우려되는 현상이다.

 

자신의 관점이 파이 전체가 아니라 그 파이를 이루는 작은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p100

 

작가는 우리의 초점이 흔들리는 요인 중 하나로 비평비평가들을 지목한다. 공급자도 남성, 수요자도 남성, 비평가도 남성. 이 역학은 범죄를 은닉하고, 객관과 균형이라는 명목으로 범죄와 피해를 말하는 이들의 입을 막는다. 자신의 의견에 주관적 관점이 없다고 믿을 수 있는 그 권력을 데더러는 해체한다. 통쾌하다.

 

천재가 남성성과 결합할 때, 이 남성성이 계속해서 스스로를 복제하고 내세울 때, 누군가는 분명 제외되고 있다.” p135

 

누군가는 제외될 뿐만 아니라 삶이 제거된다. 데더러는 대표적인 마초 남성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저 문장이 어떻게 현실에서 피해자들을 양산해냈는지 보인다. 영감, 충동, 자유는 천재들의 놀이동산의 만능 이용권이며, 이 이용권은 특히 여성들을 학대하는데 주로 쓰인다. 동시에 그 학대에 면죄부를 주어왔다.

 

과거라는 개념은 괴물이라는 단어와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우리를 인간의 나쁜 특질들과 분리해준다. - 중략 - 과거의 철없는 행동은 지나갔고 우리는 성숙해졌다.”p166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 여성혐오는 계몽되지 않은 과거의 관점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이 논리는 과거 예술가들의 명백한 비윤리적 행적들을 무마하는 논리다. 하지만 그 과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작가는 미래가 저절로나아지리라는 자유주의자들의 망상을 깨뜨린다. 데더러는 과거예술가들에게서 우리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증거”p168를 찾기보다는 우리를 비춰줄 거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유색인 여성은 제도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할 뿐만이 아니라 동료 예술가에 의해서도 침묵 당한다는 이야기다.”p198

 

데버러의 시야는 남성 범죄자들이 모든 자원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일 때”p193 작품이 무시된 사람들이나 작품이 완성되지도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넓혀진다. 표면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여전히 강고한 차별들을 그는 직시한다. 괴물 예술 남성 창작자들에게 짓밟힌 여성 창작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 여성 창작자들을 남성 창작자의 이름과 함께, 그들의 그늘 안에서만 호명하는 현실을 만난다. 하물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성 창작자들은 어떨까. 작가는 말한다. “가끔은 창피하고 시끄럽고 멋있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해야 할 때도 있다”p201

 

여성이 글을 쓰거나 예술을 창작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할 때 우리 여성들은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냉큼 그렇게 우리를 묘사한다.”p218

 

괴물 판독기는 사회의 편견을 그대로 반영해 이중적이다. 남성 예술가의 실제 행해진 범죄는 천재성의 인증으로 면죄부를 받는데, 여성 예술가들은 창작만으로도 스스로를 괴물로 여긴다. 데더러 자신의 고백과 이어지는 여성 작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가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이 이중적인 잣대가 너무 선명해서 기가 차다. 남성 예술가들은 삶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특정 종류의 불안과 두려움, 죄책감과 분열. 그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원색적인 비난들. 그럼에도 여성 예술가들은 강철 같은 정신”p256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너무나 거대하고 소모적이라 그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고 잊히고 당연시되는 힘에 맞서는 일상적 투쟁을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하면 무엇을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겠는가?”p274

 

작가는 남성의 지배로부터 행동으로 탈주하려 했던 여성 예술가들을 조명한다. 그들은 작품에서 남성들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고발할 뿐만 아니라 그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자신들을 던진다. 이 저항, 이 폭력을, 이 여성 괴물들을 대하는 사회의 이중 잣대 또한 섬뜩하다. “남성 예술가의 폭력은 그들의 위대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 폭력은 충동이다, 자유다. 여성 예술가의 폭력이나 자해는 감수성의 표시이거나 광기의 증거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힘의 증거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p275

 

소략한 내용은 이 책의 지극히 일부분 일뿐이다. 안티 몬스터 챕터는 너무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독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비평가란, 비평이란 바로 이런 존재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예술을 향유하는 주체의 소비자 정체성 면에서 자본주의 내의 예술 소비의 윤리적 실천을 고민하는 술꾼들 챕터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질문들을 던진다.

 

예술 작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인생이 만나는 일이다. 예술가의 인생이 예술의 소비를 방해할 수도 있고, 한 관객의 인생이 예술 감상의 경험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p309

 

어떤 작곡가의 음악들은 내 삶의 메인 테마가 된다. 삶을 그 음악의 템포에 맞춰 살고, 사유하는 일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 그 음악을 처음 만났던 순간은 충분히 사건이다. 처음에 말했듯이, 데더러는 문제적 창작자와 창작물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기 위해 심연으로 헤엄쳐 들어갔고 갈수록 그의 질문들은 더 풍요로워지고, 심오해진다. 데더러는 예술을 향유하는 그 사건의 본질에까지 직진해 들어간다.

 

데더러가 괴물들이 사는 바다를 헤엄치며 만드는 파문들은 실로 겹겹이고, 매우 드넓다. 이 책은 탁월한 예술 비평서이다. 주류 비평이 여전히 의도적으로 묵인하거나 혹은 무신경하게 간과하는 예술가와 창작물 사이에 제기되는 불편한 질문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범죄를 저지른 창작자와 창작물, 향유자의 수용 행위를 둘러싼 이슈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쟁점들을 데더러는 이 책에 담는다. 하나의 질문이 이렇게 확장되는 것을 독서로 경험하는 것은 독자에게 분명 기쁜 일이다. 이 딜레마를 막연하게 인식하고 이 책을 펼친 나는 저자가 축적해가는 질문들과 그가 밀어 붙이는 인식의 깊이에 계속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심각하고 딱딱할 것이라 짐작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은 너무 재미있다. 페이지를 읽으며,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게 책이다. 작가는 매우 명석하고, 재치가 넘치고, 사려 깊다.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자신의 식견과 경험과 사유를 이 책에 꽉 찬 밀도로 펼쳐 놓는다. 정말 이 작가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아껴 두지 않고, 이 책에 이 이슈에 관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구나 하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 “고마워요, 데더러.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아껴놓지 않아서요.” p253 문장의 변주.) 독자에게 이런 포만감을 안기는 책은 그 자체로 귀하다.

 

내 연인이 이 책에 괴물로 등장한다고 이 책을 읽기 전 고백했다. 내 사랑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흐릿한 뉘앙스로. 나는 이 책을 수일 전에 다 읽었지만, 그가 나오는 챕터를 남겨두었다. 그 부분만 읽지 말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 오늘 오후에 읽었다. 다행이 (데더러, 고마워요. 나는 또 운다) 그에 관한 페이지는 두 페이지였고, 데더러의 신랄함이 그 페이지에서만 조금은 약했다. (데더러, 혹시 당신도..? 어쨌든 다시 고마워요.)

 

그래서 그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 사랑은?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내 사랑은 가을 하늘처럼 더 환해지고, 껑충 더 높아졌다. 왜냐하면 이 책으로 사랑하는 이가 또 한 사람 생겼기 때문이다. 누구냐고? 바로 클레어 데더러다. 이렇게 영리하고, 강단 있고, 솔직하고, 유머 감각 뛰어난 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인이 질투하지 않겠냐고? 그는 어느 책에선가 순수한 사랑, 단순한 사랑, 온전한 사랑. 시작부터 사심이 없는 사랑에 대해 말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도 데더러를 사랑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렇게 더 풍요로워졌다.


<이 서평은 출판사의 도서 제공으로 쓰였으나 지극히 개인적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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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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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애 중이다. 그는 나를 한없이 이완시키고 끝없이 긴장시킨다. 그는 나를 웃게 하고 나를 아프게 한다. 그는 내 정신을 고양시키고 내 세계를 확장시킨다. 그는 나를 전적으로 이해한다. 그는 나와 함께 산책하며 나와 함께 잠이 든다. 가을과 겨울을 그와 함께 보낼 계획에 나는 연말에도 외롭지 않을 예정이다. 나는 그와 매일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일이. 내 연인이 최근 신간에 문제적 인물로 등장한다. 그가 유명인인 것은 물론 알았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 두겠다. 그가 유명인이기 때문에 내가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다. 위에 썼듯이 그와 나는 많은 것을 깊이 공유하고 아낌없이 나눈다. 그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를 사랑한다.

나를 의문과 혼란에 빠뜨린 그 신간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책은 미국 작가 클레어 데더러 쓴 <괴물들>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며, 웃는다, 아니 운다. 내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한 이 책은 내 사랑처럼 너무나 선명한 레드다. 그 제목과 띠지는 언제나 설레는 내 마음처럼 너무나 고운 핑크다. 내 연인이 핑크색 괴물이라니.

작가의 범죄 혹은 비윤리적 행적. 그리고 그의 창작물. 여기에 더해 분리가 어려운 작가 혹은 그의 창작물을 향한 향유자의 애정. 그리고 이 세 꼭짓점을 메타적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애쓰는 향유자의 혼란스러운 시선. 나는 이 삼각뿔의 네 개의 꼭짓점을 잇는 선들을 무수히 긋는다. 아니 지운다. 내 연인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내가 긋는 선들은 점선이 되거나 묘한 곡선이 되거나, 끊기거나, 꼭짓점들로부터 이탈한다. 사라진다. 애가 탄다. 작가의 범죄를 둘러싼 이슈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 중에는 내가 즐기고 마음에 새긴 작품들의 창작자들도 많다. 문제의 공론화 이후 나는 그들의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껴왔다. 하지만 나는 단호한 편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멀리 할 수 있었다. 애정의 정도가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이가 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나는 이 책 광고를 통해서 알았다. (사실, 목차를 볼 자신이 없다. 더 많아질 것 같아서. 나는 운다.) 이 이슈에 대해 단호한 편이었던 내가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내 사랑(들)을 지킬 수 있을까. 오늘 밤도 변함없이 내 침대에는 자기를 읽어주기를 바라며, 나와 대화하기 위해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싶기에, 아니 알아야 하기에, 아니 나는 나를 사랑하기에(응?) 이 책을 어서 읽고 싶다.

(다 읽은 다음에, 우리 사랑의 미래에 대해 여기에 이어서 적도록 할게.)

(지금 같아선 계속 사랑할 것 같아... 내 인생의 사람이거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이 책은 예술가들의 범죄를 선정적으로 다루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 선정성 이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주목하는 책이다. 중언부언하는 이유는, 그 사람(사랑) 때문이다. 읽기도 전에, 그와 함께 탈출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사랑, 그 지독한 혼란이라더니.. 정신 차리자.)

실은, 벌써부터 나는 그 삼각뿔 안에 내가 보인다. 누군가를 괴물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을까 나는. 완고했던 나는 왜 이렇게 변하고 있는 걸까. 설마, 그의 이름을 광고에서 보자마자 이렇게 변한 걸까. 이런 혼란 때문에 발간되자마자 이 책이 몹시 궁금했다. 내 연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클레어 데더러와 데이트를 해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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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19
제럴드 머네인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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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어디까지 평원인지는 한 번도 합의된 적은 없었다.”p17


왜일까. 이 책의 처음 몇 페이지를 나는 논픽션으로 읽었다. 수 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장원, 헤아릴 수 없는 부, 예술과 철학으로 일상의 대부분을 나른하게 보내는 대지주들, 그들을 아늑한 생나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방면의 학자와 예술가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유일한 주재자이자 목격자인 평원. 이것이 현실 속 어디쯤이란 말인가, 나는 상상하려 애썼다.


화자의 음성 너머 작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반 너무도 가까운 작가의 음성에 나는 그만 이 책을 논픽션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은 픽션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숨겨졌던 전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평원처럼. 그때부터 나는 이 책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온전히,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 자체를 끝없이 이어지는 평원 속 또 하나의 평원으로 인식했다”p19


종래의 시공간에 관한 의식을 배반시키는 평원. 유일한 행위자로서의 평원. 외부와 거의 단절한 채 자발적인 고립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평원인들. 그들만의 왕국에서 마치 그리스 로마의 귀족들처럼 언제나 느긋한 모습으로 철학과 종교를 논하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인간의 온갖 분란과 갈등, 애증이 평원인들에게는 한갓 의미 없는 소란, 먼지를 일으키는 들썩임일 뿐이다. 그들은 무심하다.


“평원은 인간이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에게 유용한 은유의 원천일 뿐이다”p121


평원은 현상이다. 평원은 지평선 너머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무한의 시간이다. 평원인들은 시간의 한 귀퉁이에서 시간의 가장자리가 색채로 물드는 것을 바라본다. 평원은 실재하는 장소이자 인간 개개인의 알려지지 않은 마음의 정경이다. 평원은 상상력의 무한함이며 캔버스의 유령이다. 세계의 재현과 이해의 불가능성에 대한 거대한 은유이다. 평원은 광활함 그 자체로 거대한 소외를 낳고, 평원인들을 묶고 그들을 소유한다. 평원인들은 평원에 붙박인 채 나부낀다. 그들은 햇살이 만드는 패턴의 의미를 좇는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 너머를 본다. 평원은 전부이기 때문에 무엇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평원은 어둠의 눈이다.


“우리는 눈 모양의 세계 안 어딘가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네. 그리고 우리는 그 눈이 내다보는 다른 땅들을 아직 보지 못했어.” p134


아름다운 문장이다. 시적이고 회화적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머릿속에 평원을 그리고 또 그려 보아야 했다. 작가와 대지주들의 눈에 비친 평원의 묘사, 그들의 사색과 대화들을 따라가다 보면 평원의 지평선은 더 멀어졌다. 내가 처음 머릿속에 그렸던 평원은 평원도 아니었다. 흐릿하고 다다를 수 없는 세계의 저 먼 곳을 응시할수록 지평선은 더 멀리, 멀리 달아난다.


"이들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여정이니 하는 진부한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 중략 - 평원인 가운데 실제로 여행을 해본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을 알고 거의 매일 놀라고 있다. - 중략 - 자신의 좁은 지역을 마치 그 새롭게 발견된 머나먼 땅 너머라도 되는 듯 정교하게 묘사하여 동등한 영광을 얻는 이들이 수십 배 더 많았다” p100


나는 매혹됐다. 번역자 박찬원에 의하면 85살의 작가 제럴드 머네인은 작은 시골 마을에 살면서 호주를 떠나 본적도,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으며 21세기에 들어설 때까지도 컴퓨터도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도사들의 삶의 방식에 깊이 매료된 적이 있었다고도 한다. 작가에 대한 짧은 스케치를 읽고 나는 이 책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 작가에게 더 호감을 느끼게 됐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더 궁금해졌다.


“보이는 세계라는 것이 어디엔가 있다면, 그것은 어둠 속 어딘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무한한 바다에 둘러싸인 하나의 섬일 것이다” 131


이 책에서 사물의 이면을 보고자 하는 응시는 이 책에서 묘사된 도서관의 (그렇다, 대지주의 사설 도서관이다) 수 천 개의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들처럼 저마다 다채롭게 빛난다. 인간의 상상이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는지, 우리의 인식이 낯익은 것을 경유하지 않고 어디까지 낯설어질 수 있을지, 그래서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는 그들의 어두운 눈구멍으로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어.” 132


화자가 영화제작을 위해 단상을 적은 무수한 메모들, 거기 적힌 언어들은 또 다른 평원이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려고,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무한히 뻗어가며 경계를 확장해가는 언어의 속성이야말로 평원과 닮지 않았는가.


“이 곳 사람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할 때, 사라진 후의 부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하나의 장소를, ‘시간’이 장막이나 장벽 같은 개념이 되어 방해받지 않는 그런 장소를 뜻하는 듯하다”p100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에게도 하나의 평원이 자리 잡았다. 작가의 평원, 그리고 화자의 평원과 같고도 다른 평원일 것이다. 내 안에 광활한 장소가 열린다. “방해 받지 않는” 장소, 그리고 시간에 의해 분절되지 않는 장소. 그것은 미지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나는 자주 그 평원을 들여다 볼 것이다. 문학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경이로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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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애 중이다. 그는 나를 한없이 이완시키고 끝없이 긴장시킨다. 그는 나를 웃게 하고 나를 아프게 한다. 그는 내 정신을 고양시키고 내 세계를 확장시킨다. 그는 나를 전적으로 이해한다. 그는 나와 함께 산책하며 나와 함께 잠이 든다. 가을과 겨울을 그와 함께 보낼 계획에 나는 연말에도 외롭지 않을 예정이다. 나는 그와 매일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일이. 내 연인이 최근 신간에 문제적 인물로 등장한다. 그가 유명인인 것은 물론 알았다. 하지만 분명히 밝혀 두겠다. 그가 유명인이기 때문에 내가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다. 위에 썼듯이 그와 나는 많은 것을 깊이 공유하고 아낌없이 나눈다. 그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를 사랑한다.

나를 의문과 혼란에 빠뜨린 그 신간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책은 미국 작가 클레어 데더러 쓴 <괴물들>이다. 나는 이 책을 보며, 웃는다, 아니 운다. 내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한 이 책은 내 사랑처럼 너무나 선명한 레드다. 그 제목과 띠지는 언제나 설레는 내 마음처럼 너무나 고운 핑크다. 내 연인이 핑크색 괴물이라니.

작가의 범죄 혹은 비윤리적 행적. 그리고 그의 창작물. 여기에 더해 분리가 어려운 작가 혹은 그의 창작물을 향한 향유자의 애정. 그리고 이 세 꼭짓점을 메타적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애쓰는 향유자의 혼란스러운 시선. 나는 이 삼각뿔의 네 개의 꼭짓점을 잇는 선들을 무수히 긋는다. 아니 지운다. 내 연인을 위해, 아니 나를 위해.

내가 긋는 선들은 점선이 되거나 묘한 곡선이 되거나, 끊기거나, 꼭짓점들로부터 이탈한다. 사라진다. 애가 탄다. 작가의 범죄를 둘러싼 이슈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 중에는 내가 즐기고 마음에 새긴 작품들의 창작자들도 많다. 문제의 공론화 이후 나는 그들의 작품들을 대할 때마다 뭔가 석연치 않음을 느껴왔다. 하지만 나는 단호한 편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멀리 할 수 있었다. 애정의 정도가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이가 그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나는 이 책 광고를 통해서 알았다. (사실, 목차를 볼 자신이 없다. 더 많아질 것 같아서. 나는 운다.) 이 이슈에 대해 단호한 편이었던 내가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내 사랑(들)을 지킬 수 있을까. 오늘 밤도 변함없이 내 침대에는 자기를 읽어주기를 바라며, 나와 대화하기 위해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싶기에, 아니 알아야 하기에, 아니 나는 나를 사랑하기에(응?) 이 책을 어서 읽고 싶다.

(다 읽은 다음에, 우리 사랑의 미래에 대해 여기에 이어서 적도록 할게.)

(지금 같아선 계속 사랑할 것 같아... 내 인생의 사람이거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이 책은 예술가들의 범죄를 선정적으로 다루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 선정성 이면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들에 주목하는 책이다. 중언부언하는 이유는, 그 사람(사랑) 때문이다. 읽기도 전에, 그와 함께 탈출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사랑, 그 지독한 혼란이라더니.. 정신 차리자.)

실은, 벌써부터 나는 그 삼각뿔 안에 내가 보인다. 누군가를 괴물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을까 나는. 완고했던 나는 왜 이렇게 변하고 있는 걸까. 설마, 그의 이름을 광고에서 보자마자 이렇게 변한 걸까. 이런 혼란 때문에 발간되자마자 이 책이 몹시 궁금했다. 내 연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클레어 데더러와 데이트를 해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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