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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수업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안온북스 / 2025년 2월
평점 :
“음악에서 소리는 속살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게.”
거문고 연주자 성현은 제자 백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음악의 본질이 소리에 있지 않다면 음악의 속살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할까.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수업> 중 세 번째 에피소드는 스승과 제자의 음악 수업을 따라간다. 그러나 스승 성현의 교수법은 우리가 종래에 알고 있던 음악 수업과는 결이 다르다. 이 이야기는 제자 백아뿐만이 아니라 독자에게도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음악의 기원은 무엇인가? 음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것들은 가르침의 방식으로 전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세 번째 이야기가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졌다면, 첫 번째 에피소드는 17세기 프랑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각각 모티브로 삼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에피소드는 세 번째 에피소드가 던진 질문에 관한 긴 그림자이다. 파스칼 키냐르는 시공간을 넘어 음악에 대한 사색을 공명시켜간다. 시원, 시간, 언어, 문학, 예술, 그리고 생과 사. 그의 사색은 한지에 떨어진 먹물이 번지듯 농담을 달리하며 수묵화를 그려낸다.
“이 목소리가 영원히 부서졌다. 영원히 사라졌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키냐르의 또 다른 작품 <세상의 모든 아침> 그 마랭 마레이다. 16살 마랭 마레는 변성을 이유로 성가대에서 쫓겨난다. 곧 마레는 인간 목소리의 가장 아름다운 매력을 악기로 모방하겠다는 결심한다. 그는 생트콜롱브의 제자가 된다. 생트콜롱브는 당대 최고의 비올 비르투오소이다.
변성. 이것은 결손이고 결여이며 허물벗기이다. 변성이라는 허물벗기를 통과한 청년은 욕망한다. 재-허물벗기. 이번에는 스스로에 의한, 평생에 걸친 허물벗기이다. 이 소명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목소리를 갈고닦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나무의 육체에서 울려나온다. 청년은 악기, 기악의 세계로 망명한다. 망명지는 비올라 다 감바이다. 그는 다시 고음을 되찾는다. 그는 소리의 영역을 재구성한다. 그는 스승의 ‘뽕나무’ 오두막으로 기어든다. 그는 작곡가, 연주가가 된다. 변성, 변환은 음악이 된다. 그는 다시 태어난다.
“음악은 조바심과 분노라는 동일한 얼굴에 쓰인 또 하나의 가면이다.”
키냐르는 인간은 무엇인가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이 무엇의 괄호 안을 당신은 어떻게 채워 넣을 것인가. 이 기다림에 대한 분노, 이 분노에 들러붙은 권태의 나른함. 이 공허하고 무기력한 기분을 순간, 운명의 은혜로 만드는 음악. “그것은 충치 위에 살짝 올려놓는 각설탕의 부서진 조각이다.” 음악이 블랙 유머로 만들어진 것 같다는 키냐르의 문장에 나는 웃는다. 동의한다. 모든 것을 부식시키고, 인간을 좌절시키고, 고통스럽게 하며, 죽음으로 이어지는 시간. 이 시간 위에 노니는 음악은 필멸의 존재들에게 달콤한 위안을 안겨준다. “음악은 시간의 유령이다.” 이 유령은 “사라지고 회귀하는 감미로운 것”이다.
“모든 소리는 숨결이 저버린 몸뚱이를 죽음에서 소생시켜 숨결의 경이를 회복시킨다.”
키냐르는 마랭 마레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인간의 목소리들’을 듣는다. 키냐르가 인용한 수도원장 라이히헬름의 문장들은 음악의 비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음악은 우리에게 무엇을 되살리는가. 음악이 회복시키는 경이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수도원장 라이히헬름은 묻는다. “음악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이 질문을 나는 이렇게 바꿔본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이 질문들은 모두 음악이 일으키는 작용, 결과, 청음의 효과에 대해 묻는다.
키냐르는 말한다. “음악은 살아 있는 자를 유혹한다.”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음악의 무엇인가? 음악이 깨우는 것들은 무엇일까? “소리는 정령을 호출하고 정령은 흉내 내거나 목 놓아 부른다.” 나는 키냐르의 이 문장을 부정하기 어렵다. “자연은 무의미한 산 것을 생산한다. 예술은 유의미한 죽은 존재를 생산한다.” 마랭 마레의 ‘인간의 목소리들’가 들려주는 선율들이 누군가의 음성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악기는 이미 관이라네!” 그렇다면 그 악기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정혼의 음성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마크로의 양손은 죽어가는 황제의 울부짖음을 거의 아득하고 유순하게, 마치 어린애의 소리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파스칼 키냐르는 묻는다. “내게 음악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과, 고통과, 사라짐에 깊게 관여한다. 그것은 최초의 허밍, 추방, 상실, 탄식, 침몰, 소리의 분비물, 반영, 숨결, 향수, 빈 서사, 길들임이다. 키냐르의 음악에 관한 사색은 수면 위의 고요한 파문처럼 서서히 더 큰 원을 그리며 번져간다. 그 파문은 독자에게 밀려오며 묻는다. ‘당신에게 음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에게 그것은 진통제, 환각, 띄어쓰기, 폭죽, 걸어 잠금이며 기도, 망아이다.
“플라톤에게 첫인사를 드릴 때 새파랗게 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소리는 낮고 쉰 듯했다고 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자가 만나는 인물은 이제 막 청년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가 저술한 <동물의 역사>는 남성의 2차 성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특히 목소리 변성을 자세히 언급한다. “마치 현이 느슨해져 걸걸한 소리를 내는 악기를 연상시킨다. 소위 ‘염소처럼 매애매애 운다’는 떨리는 목소리다.”
“병든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그것이 마지막 허물벗기이다.”
키냐르는 프랑스어 비극(tragedie)이 그리스어로 ‘염소의 노래’(tragodia)인 것을 밝힌다. 얼마나 흥미로운지. 변성(mue)은 뮈토스(muthos, 신화의 언어)에서 로고스(logos, 이성과 진리의 언어)로의 변환(mue)이라고 키냐르는 적는다. 이 또한 얼마나 흥미로가. 키냐르의 사색은 봄, 숫염소, 허물벗기, 껍질, 극장 같은 수많은 언어의 기원들로 뻗어간다. 이 언어의 고리는 음악의 비밀을 에워싼다. 말년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서를 멈추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관찰하는데 열중했다고 한다. 그에게 “우주는 마치 대형 극장 같았다.” 비극을 좋아했다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거대한 우주는 어떤 선율을 들려주었을까. 우주는 거대한 허물을 벗고 또 벗는다.
“성련의 모습이 슬며시 물 위에 나타났다. 백아는 성련이 장대로 미는 배에 올라탔다.”
세 번째 에피소드로 되돌아온다. 키냐르가 난해한 음악 수업을 묘사한 이 이야기를 마지막에 배치한 이유를 납득하게 된다. 음악 수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음악의 기원과 본질, 그것의 작용과 결과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키냐르는 은퇴 후 최고의 연주 기량에 달한 마랭 마레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자신이 물 위에 기보했노라고 믿었다. 흐름을 거슬러, 다시 근원을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불가능한 움직임으로” 이 문장과 바로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파스칼 키냐르가 엿본 음악의 비밀에 관한 암시가 설핏 비쳐진다.
결락과 상실을 안고 근원으로 회귀하는 목소리, 물결처럼 다시 되돌아오는 선율, 다시 멀리 사라지고 회귀하는 목소리들의 파장,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허물벗기. 이 근원으로의 의지가 반영되는 음악. 이것은 물 위에 기보된다. 첫 음을 새기기 전에 사라지는 기원의 흔적. 불가능한 욕망을 담은 불가능한 움직임. 표현할 수 없는 시원의 물결들. 작곡가는, 연주자는 물이 된다. 음악은 물이 된다. “그는 장대로 배를 밀며 떠났다.” 이 작은 책은 심연 앞에, 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