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미선나무에서 아카시아까지 시가 된 꽃과 나무
김승희 외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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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절기는 얼마나 절묘한 것인지

열흘이 지나도록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깊은 협곡에 사는 친구는

자두 나무에 봄 기운이 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마도 그만이 감지할 수 대기의 귀띔일 것이다.

내게는 자두 나무 대신

시집이 봄 기운을 가득 안고 도착했으니

아티초크 출판사의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에밀리 디킨슨의 식물 표본집에서

가져온 압화로 찍힌 꽃들로 디자인된

표지가 봄의 전령사인 듯

오는 봄을 고요히 마중하고 있다.

언어라는 것은 참으로 신묘해서

시집에 담긴 시들을 읽는 것만으로

마음이 말개진다.

가문 겨울을 보낸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도

용케 물이 돌듯

꽃과 나무를 노래한 시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버석버석한 내 마음자리에도

맑은 물이 찰랑이며 고인다.

김승희, 에밀리 디킨슨, 로르카, 페소아, 미스트랄 가브리엘라,

캐서린 맨스필드, 윌리엄 블레이크, 셰익스피어, 에머슨, 워즈워스,

윤동주, 이상, 이육사, 테니슨, 한용운, 휘트먼...

국내외의 시인들이 꽃과 나무에 어떻게 자신들의 마음을 투영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시인들에게 어떤 우정어린 말들을 걸어왔는지

꽃과 나무들과 나눈 시인들의 대화가 더없이 다채롭게 이어진다.

시집의 타이틀이 된

'모든 슬픔은 사라진다'는

김승희 시인이 노래한

'미선나무에게'라는

시의 주인공인 미선나무의 꽃말이다.

( '꽃말'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으로 의미를 붙인 말,

사람들은 예쁜 생각을 잘도 해낸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는 꽃말이 있는 꽃이라니.

이렇게 처연한 꽃말을 지닌 꽃이

우리 나라에서만 자라는 한국의 특산종이라니.

여리디 여린 꽃잎을 가진 미선나무도,

꽃말도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된다.

역설적인 꽃말이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3월에 가느다란 줄기에 아름다운 부채 모양의

미색 꽃잎을 수북히 여는 꽃.

3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여리디여린 미선나무 꽃의 만발을 보며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는 감상을 떠올린

모르는 이의 모습을 나또한 떠올려 본다.

계절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꽃잎을 터뜨리는 미선 나무를 보며,

그 모르는 이는 어쩌면 모든 떠나간 이, 떠나간 것, 떠나간 시간들을

떠올렸을지도.

계절과 함께 다시 찾아오는 꽃과는 다르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그리운 것들을

생각하며,

그는 어쩌면 '모든 슬픔이 찾아온다'라고 생각했을지도.

그 잔인함 진실에 압도당해,

차라리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고 노래했을지도.

이어지는 봄꽃들의 끝도 없는 행렬에

'어제의 비가 오늘의 비에게 편지를' 쓰듯

'내일의 비가 어제의 비에게 편지를' 쓰듯

세계의 슬픔이 또다른 슬픔에게 편지를 쓰는

모습을 발견해내는 김승희 시인의 마음이 

나에게도 포개진다. 

김승희 시인이 말한

'당신에게 못한 1인분의 사랑의 말',

그 당신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잊지 말아야 할,

수많은 당신들을 호명해낸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사랑의 고백들을

우리는 이제 볼 수 없는 그들에게

뒤늦게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어서 그가 연결해준 누군가에게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미선나무, 물푸레나무, 쥐똥나무, 매화, 생강나무, 산수유,

산벚나무, 앵두나무,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 철쭉..

수북한 개화의 행렬에

우리는 떠나간 이들을 맞이한다.

매일 매일 떠나고 떠나지만,

매일 매일 다시 돌아오는 그들을 맞이한다.

1일분의 사랑 고백과 함께.

봄에는 모든 슬픔이 살아난다.

봄꽃의 개화처럼 막을 수 없는 이 슬픔을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로

표현할 수 밖에 아득한 아픔들.

봄이나 아직 겨울의 묵직한 이부자리를

털어내지 못해 못내 무겁고 못내 사나운

2월, 3월의 스산함을

이 시집의 시인들과 시들이 함께 할 생각을 하니

마음에 노오란 아지랑이 같은 따스함이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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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유령 - W. G. 제발트 인터뷰 & 에세이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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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그의 마지막이 겹쳐진다. 먼저 접한 그의 작품들, 인터뷰에서 자연사와 역사, 우연과 침묵에 대해 말하던 그의 육성, 그리고 그 마지막. 세 개의 높낮이를 오가는 화음이 책을 읽는 내내 가을볕처럼 무심하게 낮은 배음으로 깔렸다. 


자연사의 관점에서 그는 인간사를 보려했던가. 가차 없음, 그가 우연이라고 표현한 것들. 그 자연사를 추동하는 힘이 우연이라고 착오되는 필연이라면. 생명 있는 육체로 기억의 유령들과 역사 속을 배회하던 제발트는 이제 육체마저 버리고 기억뿐만 아니라 현실 속을 여전히 배회 중일까. 그의 마지막을 생각할수록 이 책속의 제발트의 음성이 더 또렷하게 들리는 이유는 뭘까.

‘기억의 유령’에는 제발트와의 네 편의 인터뷰와 그의 작품들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가 실렸다. 인터뷰들은 제발트가 작품 속에 반복해 다뤘던 이슈들, 그 이슈들이 그에게 중요했던 이유들, 그의 독특한 글 스타일이 형성되어온 과정, 글쓰기와 재현의 윤리, 글쓰기의 어느 순간 직면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벽, 그의 글 속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의 출처와 의미들에 관한 이야기 등을 제발트의 음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양한 각도와 심도 있는 인터뷰어들의 질문들은 작가와 작품에 관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이슈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이끌어낸다. 세심한 문답들이 오가며 문학과 글쓰기에 관한 제발트의 사유가 드러난다. 더없이 흥미롭다.



작가, 제발트는 그의 작품(그의 글은 자주 길을 잃는 듯 보인다, 자주 독자를 안개 속으로 인도한다. 이것이 나에게 제발트가 각별한 이유다.) 만큼이나 나에게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전에 접해보지 않았던 낯선 스타일의 글들. 환영에 홀린 듯 따라가며 단번에 끝까지 읽고, 언제나 당연한 듯  첫 장으로 돌아가 점점 느려지는 물살을 타듯 천천히 문장을 곱씹게 되는 그의 글들. 그 글 속에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는 시간들, 장소들, 사람들.



안개 같은 존재들을 허공을 쥐어보려는 안간힘으로 언어로 옮기는 그의 문장. 작가의 헤맴을 그대로 느끼며, 그 안간힘에 떠밀려 작가와 함께 안개 속을 헤매는 독서. 이 기묘한 읽기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기묘한 중독. 미묘한 끌림을 분명히 자각하기에 그의 작품들을 읽을수록 이 작가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언어의 한계로 그의 인터뷰들을 접할 기회가 없어 그 동안 그에 관한 막연한 이미지와 생각들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통해 제발트의 인터뷰들을 읽으니, 아, 아, ... 수긍과 해소, 아... 놀라움, 그의 마지막을 알기에 안타까움.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쓴 제발트의 작품에 관한 에세이들은 다른 의미로 흥미롭다. 이 책에는 ‘이민자들’, ‘자연을 따라, 기초시’, ‘현기증, 감정들’, ‘토성의 고리’, ‘아우스터리츠’, ‘공중전과 문학’에 관한 에세이들이 실렸다. 각자 읽은, 같은 책에 관한 타인의 에세이들은 흥미로울 수밖에. 타인의 에세이들을 읽으니 이 책들에 관한 인상들이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전경으로 다가왔다. 같은 텍스트에 관한 결이 다른 비평과 에세이들. 타인의 생각의 주름이 만들어내는 음영을 음미하다 보면, 내 기억 속 텍스트의 풍경까지 한층 다채로워진다. 



제발트 작품에 관한 이 작가들의 비평들은 섬세하고 날카롭다. 비평들을 읽으니 시간과 기억의 무게에 짓눌렸던 제발트 작품의 결들이 한 올 한 올 다시 일어서는 것 같다. 에세이의 시선들은 유물 복원사의 붓 작업처럼 사려 깊다.



‘기억의 유령’. 이 책을 읽기 전 책장에서 해당 번역본들을 꺼내 쇼파 옆 테이블에 쌓아 놓았다. 책을 읽으며 언급된 번역본을 무릎에 올려 넘겨봤다. 그럴 수밖에. 책을 읽는 동안 작가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 언저리를, 내 기억 언저리를 내내 오간다. 작가가 본 것, 당신이 본 것, 내가 본 것, 그리고 작가의 마음, 당신의 마음, 나의 마음. 문학은 그 경계들을 이해와 오해 속에 넘나드는 거라는 걸, ‘기억의 유령’을 읽으며 새삼. 



인상적인 글들을 ‘쓴’, ‘사람’에 관심이 많다. 짧은 인터뷰라도 찾아 읽는 이유다.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사로잡는 글을 쓴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이 책이 소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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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 속의 유령 암실문고
데리언 니 그리파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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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 속의 유령 / 데리언 니 그리파 / 서제인 / 암실문고

재생산과 모성은 여성의 본질적 속성이다? 이 명제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 여성이 지속적인 재생산의 욕구를 가진다고 해서, 그 욕구가 타인에 의해 의심되거나 평가될 수는 없다. 이 책 “목구멍 속의 유령” 저자인 ‘데리언 니 그리파’의 목소리가 투영된 “나”는 자신의 욕구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아들을 셋 낳고, 이 책을 쓰는 동안 딸을 낳고, 남편이 정관 수술을 하기 전까지, 또 다른 출산을 욕망한다.



벌들, 윙윙거리는 벌떼들. 책의 마지막, “나”가 이사한 새 집 정원에 다채로운 꽃을 심어 벌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먹이듯, 그녀는 생명을 잉태하고,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자신의 쾌락에 충직하다. 파트너에 대한 욕망도 숨기지 않는다. 욕망, 출산, 수유, 양육으로 이어지는 “나”의 삶. 이 반복, 이 순환이 “나”에게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당신은 자신을 던져 버리죠...” (23P, U2의 노래, With or Without You)



11살의 소녀를 놔주지 않았던 저 노래 가사처럼, “나”는 “나”를 이끄는 것들에 나를 던져 버린다. 누군가는 시대착오적이라 비평할지도 모르는 지속적인 출산과 양육. 그녀는 그 반복에 몸을 담근다. 그렇게 정해진 매뉴얼대로 흘러가는 바쁜 일상. “나”는 “나” 자신조차 해명할 수 없는 강렬한 열망으로 200년 전 쓰여진 아일랜드의 시 한편, 그리고 그 시를 쓴 아일린 더브 니 호널이라는 여성에게 사로잡힌다.



누군가의 삶 안으로 들어가기.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무모한 일을 뛰어든다. “나”가 그렇다. 아이를 임신하듯, “나”는 아일린 더브의 생이 자라날 공간을 “나” 속에 늘려간다.



1773년 어느 화창한 날, 아일린 더브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는다. 그리고 그 애통함과 그리움, 쏟을 길 없는 남겨진 남겨진 사랑을 “아트 울리어리를 위한 애가”라는 시 한편에 남긴다.

“몰두를 통해 나는 그의 생각이 방향을 바꾸는 독특한 방식을 발견했고, 또 그의 언어 속에서 뛰는 맥박을 감지했다. 그렇게 나는 아일린 더브와 천천히 친밀해졌다” 60P



영아에서 유아로 딸아이가 성장하는 내내, 아직 작은 소년들일 뿐인 아들들이 자라는 동안, “나”는 아일린 더브가 살았던 장소들, 그의 부모, 그의 쌍둥이 자매, 그의 남편 아트 올리어, 그리고 그의 아들들, 손자들의 삶을 추적해 간다. 스스로도 이해시킬 수 없는 집요함으로, 식힐 수 없는 열망으로 자신을 던진다.



“나는 내가 아일린 더브의 작품에서 가장 소중하게 요소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 내가 좋아하는 그 요소는 텍스트 너머에서, 연과 연 사이의 공백에서, 번역할 수 없는 곳에서 맴돌았다. 그 공백에 난 계단 위에 서면 한 여자의 숨결을, 여전히 남아 있는 숨결을 느낄 수 있다” 61P



아일린 더브의 시 사이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는 시인의 숨결, “나”는 그 숨결을 느끼며, 동시에 “나”의 한숨들을 그 숨결 속에 섞는다. 숨결들, 시의 행간에 녹아드는 구분할 수 없는 시인과 “나”의 숨결들. 자신의 욕망을 안다고 여기고, 그것에 충실하고자 하는 “나”는 이 행간에서 거할 곳을 찾는다. 번역 할 수 없는 곳, 공백, 텍스트 너머란 바로 “나”의 숨겨진 방을 역설한다. “나” 안에서 번역되지 못하여, 발화되지 않는 이야기들.



"나는 이 여성을 누군가의 고모와 아내로, 남자들의 그림자에 가려진 빈약한 역할로 그려 내던 둔감하고 짧은 글들을 다시금 떠올린다. 아일린 더브가 자신이 알고 지내던 여자들의 관점에서 그려졌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 (104P)



“나”의 추적으로 드러나는 아일린 더브의 얇은 삶의 막들 위로 “나”의 과거, 현재들이 겹쳐진다. 가족을 버리고 남편을 선택하는 아일린 더브의 욕망, 해부학실에 놓여있던 시체들, 그 시체들의 장기들, 남편을 잃은 아일린 더브의 절망, 딸 아이의 탄생과 아이의 취약함, 수유, 육아, 사고의 목격, 방들을 삼켜버린 수몰, 육체의 이상 증후들. “나”는 아일린 더브의 욕망과 출산, 상실을 따라가며 “나는 내 딸 안에 어떤 어둠을 심어 놓게 될까, 나는 궁금해 한다.” (172P) 왜냐하면 “과거는 우리에게 자신이 맞이했던 결말을 계속 말해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맨 처음 내가 차에서 뛰어나간 건 나 자신을 던져 버리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219P)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욕망은 내가 가속하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225P)

“나 자신이 그토록 쓸모 있는 존재라는 느낌 속에는 일종의 즐거움이 남아 있다” (278P)

“나 자신을 다른 누군가에게 내던지는 의식은 너무도 달콤하니까. 나는 나 자신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280P)

“나는 그곳에서 나 자신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281P)



“나”는 이렇게 변주해 말한다. 타인에게 나를 던져 나를 무화시키는 일의 달콤한 쾌락. “나”는 이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자기 소멸이 잉태하는 생명들, 사건들, 삶들, 그것들의 소멸, 상실. 반복되는 이 세계의 거대한 율동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주는 “쾌락”



"우리는 우리가 내 놓은 메아리가 누구의 입을 통해 퍼져 나갈지 알지 못한다. 아일린 더브의 목소리를 반사해 우리 속으로 울려 퍼뜨린 사람은 노리였다. 그는 하나의 표면이자 진앙지였다.” (253P)



“나”의 일관된 투혼은 타인이나 사건에 나를 던져버리기, 타인의 목소리가 되어주기이다. 타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온 비명의 공명판이 되기로 기꺼이 결심하기. 그리하여 수몰된 누군가의 과거를 홍수 같은 구름으로 형상화하기로 결심하기.



“어쩌면 나는 좀 이상한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내 몸 바로 저편에서 들려오는 한결같은 콧노래를, 꿀벌만큼이나 진짜처럼 느껴지는 그 노래를 듣고 있었으니까. - 중략 - 그러니 그때 내가 확실히 알았던 건 하나뿐이다. 그곳이, 함께 모인 것들이 외쳐 대던 그 메아리 속이 안전하게 느껴졌다는 것” (282P)



탄생과 죽음의 이야기들, 메아리들. 반복되어 울리는 이 이야기들이 삶을 이루고, 세계를 지속시킨다. 꽃밭을 찾아드는 벌떼들처럼 분주히 야단스럽게 욕구하며 세계는 일렁인다. 이야기들의 복원, 그리고 이 이야기들에서 누락된 인물과 또 다른 이야기들. 그를 사로잡는 것은 이렇게 이 세계를 지속시키는 욕망들과, 그것들의 흥망성쇠, 그 거대한 순환의 반복이다.



목구멍 속의 유령은, 욕망하는 여성이다. 연인을 욕망하는 여성이며, 생명을 욕망하는 여성이며, 세계의 지속을 욕망하는 여성이다. 따라서 그 유령은 연인의 상실로 비탄에 빠진 여성이며, 세계의 사라짐을 두려워하는 여성이다. 그래서 결국 목구멍 속의 유령은 “나”에게 정원을, 벌떼들이 날아들어 떠나지 않을 정원을 가꾸도록 만든다. 지구라는 거대한 생명을 살리라고 속삭인다. 벌떼와 작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어 놀 수 있는 세계를 가꾸라고. 나는 목구멍 속의 여성들의 비명에 따른다. “나”의 몸 저편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에 나를 내어준다.




“모음으로 된 그 비명은 결국 잦아들고, 소리는 말들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고, 그 말들은 어째선지 그의 어머니의 목소리를,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의 목소리를 불러오고, 그렇게 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는 그 모든 여성의 목소리는 하나의 커다란 합창으로 변한다. 모두가 서로의 손을 잡고 있고, 모두가 이 순간의 고통을 말하면서 그 오래된 말들의 황홀경 속을 맴돈다. 어떤 마법 같은 힘이 이 내밀한 순간을 공적인 것으로 만든다” (200P)


출판사의 도서제공으로 읽고, 사적으로 기록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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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쳐 있는 - 실비아 플라스에서 리베카 솔닛까지, 미국 여성 작가들과 페미니즘의 상상력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지음, 류경희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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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미쳐 있는 / 산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 류경희 / 북하우스

이 시기(구체적으로 이 정권,,,이 세계의 신자유주의와 반지성주의의 광풍, 그 저류에 면면한 미소지니, 그리고 기후 위기)를 어떻게 미치지 않고 지날 수 있을까.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미션이다. 이때 마침 당도한 큰 언니들의 전언, 눈물이 핑 돌도록, 반갑다. 자상하게도 길기까지 하다. (그래도,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을 아쉽겠지)

전언의 타이틀, 에누리 없다. 여전히 미쳐 있는. 현실의 여전한 ‘폭력과 부조리함’, 그 현실을 사는 여성들의 불같은 ‘분노’, 그 현실에 짓밟히지 않겠다는 각오로서의 ‘광기’. 미친 현실에 두 눈 부릅뜨고, 화염처럼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결기. 현상과 증상으로서의 가부장제의 광기, 그에 대한 반응과 다짐으로서의 여성들의 광기. 미친 네이밍. 이런 작가들과 이런 글들이 계속 출몰하는 한, 전자의 광기는 후자의 광기에 소실되어 한 줌 재가 될 것이다.

트럼프 취임식 다음날 시위에 신체적 장애로 나가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다른 연대의 방법을 궁리하다가 이 책의 집필로 마음을 보태기로 했다는 두 작가의 담담한 고백은 감동적이다.

2017년 이 당시 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는 각각 대략 81세, 73세였다. 그리고 5년 후, 두 작가는 그 연대의 다짐을, 이렇게 멋진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으며 지켰다. 두 학자의 삶의 모습, 열정에 숙연하다.

작가들은 제2페미니즘의 성공과 실패에 당혹스러웠다며, 이 책의 집필 목적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우리가 여전히 분노로 미쳐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미래를 쌓기 위해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해 보기로 했다”

프롤로그에 거명된 #케이트쇼팽, #조라닐허스턴, #샬럿퍼킨스길먼, 에고, 오랜만에 이 이름들을 들으니, 마음이 뜨겁네. 목차에 있는 여성들은 또 어떤가. 새삼 앞선 많은 여성들의 그늘 안에, 내가 살고 있구나 싶다. 올 해 읽은 많은 여성 작가들의 글들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가슴이 따뜻해져.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안 이후,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여전히 그 여자는 미쳐있다. 프롤로그에서부터 두 작가는 그 여자에 대해, 그 여자가 사는 세계에 대해, 그 여자의 광기에 대해 침착하게 조근조근, 재치있게 유머를 잃지 않으며, 눈을 땔 수 없게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 요동칠 때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라고 독려해주는 듯한 작가들을 불러들였다. 우리는 그 저명한 여성들의 작품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애에도 끌렸다. 그들의 삶이 그 자신들이 피와 살을 지닌 현실 세계의 여성으로서 개인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삼을 때 직면했던 문제들을 극화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경합하고, 뒤흔들고, 지지해야 한다”

“ 세상이 요동칠 때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

이 책이, 이 책 속의 많은 여성 작가들이, 그리고 이 두 명의 위대한 작가,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가 전하는 격려이다.

이 책이, 이 책 속의 많은 여성 작가들이, 그리고 이 두 명의 위대한 여성, 작가,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가 미쳐가는 세계에서, 미치지 않으려고, 미친 척 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보내는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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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알라딘 한정판 북커버 에디션) - 엘제 라스커 쉴러 시집
엘제 라스커 쉴러 지음, 배수아 옮김 / 아티초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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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 엘제 라스커 쉴러 / 배수아


“내면에는 광폭하게 이글거리는 생의 불꽃이

도저히 다스릴 수 없는 감정들이

형체를 입고 들끓는 상상들이

이리떼처럼 나를 덮친다!” (3페이지, 욕망 중에서)





주체할 수 없는 생에 대한 사랑, 그 열기로 언제나 가슴이 뜨거운 이. 태양의 후예라 부를 만한 사람. 그런데 그런 그가 시인이라면, 그 생을 향한 열정과 사랑은 햇살처럼 작열하는 시어들로 쏟아져내릴 것이다. 엘제 라스커 쉴러, 그가 그렇다. 시집 전체에 빛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듯하다. 환희에 찬 사랑의 순간은 말할 것도 없고, 고독과 슬픔의 시간들조차 잠시 가려진 태양 없이 설명될 수 듯, 창백하게 불타고 있다.


관능적이고, 더없이 격정적인 삶을 시로 옮긴 엘제 라스커 쉴러는 1869년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양차 세계 대전의 화마 속을 살다 1945년 팔레스타인에서 사망한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걸출한 주역이었으며, 평론가들에게 독일의 사포라는 찬사를 받으며 당대 최고 문학상인 클라이스트상을 수상했다.


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서정 시인으로 칭송되던 그였지만, 폭력적인 역사는 그를 빗겨가지 않았다. 유대인, 여성, 전위 예술가, 관습에 굴복하지 않는 비타협적 성향, 보헤미안적 기질. 타인과 사회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독립적인 정신. 이런 라스커 쉴러의 생존은 전쟁의 광기 속에서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연보와 배수아 작가의 글에 의하면, 오로지 생존하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시기에, 그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유로 충만한 세계를 부단히 창조했고, 자신의 삶과 사랑, 예술을 다양한 정체성으로 연출했고, 실험했다. 이쯤 되면 그의 삶과 사랑, 예술 자체가 폭력적인 세계를 향한 저항이 아닌가.


이번 시집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는 관능적이고, 더없이 격정적인 시들로 시작한다.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데일 것 같은 시어들이다. “관능의 샘물”을 빨아 마셔 “도덕을 질식”시키고, “정신의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 마침내 “지옥을 응시”하는 형형한 눈빛. 두 번 다시 고향을 보지 못하리라는 각오로 거친 “죄의 땅”에 당도해 사랑하는 이가 열어젖힌 “멸망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나의 뜨거운 몸”


격정적인 사랑의 시들 다음으로 그 사랑이 떠난 후의 슬픔을 노래한 시들이 이어진다. 갈망과 그리움 “내 뺨은 네 피로 언제나 붉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나 네게로 향하는 곳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죽음, 죽음 “그날 이후 내 눈은 더 이상 세계로 향하지 않는다”, “너를 죽음으로 재우며 흐느낀다”. 그리고 이산, 디아스포라의 삶. “지금 흘러가는 구름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절벽 같은 고독. 세계에 대한 환멸 “영혼 없는 세계들이 마주 친다”, 종국에는 자신의 죽음을 애원하는, 예감하는. “어느 날 나는 최후의 데이지를 꺽는다... 그때 천사가 와서 내 수의를 지어 주었다 - 다른 세계에서 입어야 하므로”



“영원한 삶은 사랑을 많이 말할 줄 아는, 그런 자들에게만 -

사랑의 인간은 오직 부활할 수 있을 뿐!

증오는 뚜껑을 덮는다! 불꽃이 아무리 높게 타오를지라도

나는 너에게 많이 많이 사랑을 말하겠다 - ” (136, 가을 중에서)


평생에 걸친 떠남과 이별, 차별과 혐오. ‘사랑’으로 ‘사랑의 부재’를 살아낸 시인이 인생의 가을 이런 바람을 시에 남긴다. 마음이 아프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관능의 시어들, 투명하게 벼려진 슬픔과 고독의 시어들. 엘제 라스커 쉴러는 사랑의 시인이다. 이 시집은 사랑의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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