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미선나무에서 아카시아까지 시가 된 꽃과 나무
김승희 외 지음, 이루카 옮김 / 아티초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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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절기는 얼마나 절묘한 것인지

열흘이 지나도록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는

깊은 협곡에 사는 친구는

자두 나무에 봄 기운이 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마도 그만이 감지할 수 대기의 귀띔일 것이다.

내게는 자두 나무 대신

시집이 봄 기운을 가득 안고 도착했으니

아티초크 출판사의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에밀리 디킨슨의 식물 표본집에서

가져온 압화로 찍힌 꽃들로 디자인된

표지가 봄의 전령사인 듯

오는 봄을 고요히 마중하고 있다.

언어라는 것은 참으로 신묘해서

시집에 담긴 시들을 읽는 것만으로

마음이 말개진다.

가문 겨울을 보낸 바짝 마른 나뭇가지에도

용케 물이 돌듯

꽃과 나무를 노래한 시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버석버석한 내 마음자리에도

맑은 물이 찰랑이며 고인다.

김승희, 에밀리 디킨슨, 로르카, 페소아, 미스트랄 가브리엘라,

캐서린 맨스필드, 윌리엄 블레이크, 셰익스피어, 에머슨, 워즈워스,

윤동주, 이상, 이육사, 테니슨, 한용운, 휘트먼...

국내외의 시인들이 꽃과 나무에 어떻게 자신들의 마음을 투영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시인들에게 어떤 우정어린 말들을 걸어왔는지

꽃과 나무들과 나눈 시인들의 대화가 더없이 다채롭게 이어진다.

시집의 타이틀이 된

'모든 슬픔은 사라진다'는

김승희 시인이 노래한

'미선나무에게'라는

시의 주인공인 미선나무의 꽃말이다.

( '꽃말' 꽃의 특징에 따라 상징적으로 의미를 붙인 말,

사람들은 예쁜 생각을 잘도 해낸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는 꽃말이 있는 꽃이라니.

이렇게 처연한 꽃말을 지닌 꽃이

우리 나라에서만 자라는 한국의 특산종이라니.

여리디 여린 꽃잎을 가진 미선나무도,

꽃말도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된다.

역설적인 꽃말이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3월에 가느다란 줄기에 아름다운 부채 모양의

미색 꽃잎을 수북히 여는 꽃.

3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여리디여린 미선나무 꽃의 만발을 보며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는 감상을 떠올린

모르는 이의 모습을 나또한 떠올려 본다.

계절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꽃잎을 터뜨리는 미선 나무를 보며,

그 모르는 이는 어쩌면 모든 떠나간 이, 떠나간 것, 떠나간 시간들을

떠올렸을지도.

계절과 함께 다시 찾아오는 꽃과는 다르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그리운 것들을

생각하며,

그는 어쩌면 '모든 슬픔이 찾아온다'라고 생각했을지도.

그 잔인함 진실에 압도당해,

차라리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라고 노래했을지도.

이어지는 봄꽃들의 끝도 없는 행렬에

'어제의 비가 오늘의 비에게 편지를' 쓰듯

'내일의 비가 어제의 비에게 편지를' 쓰듯

세계의 슬픔이 또다른 슬픔에게 편지를 쓰는

모습을 발견해내는 김승희 시인의 마음이 

나에게도 포개진다. 

김승희 시인이 말한

'당신에게 못한 1인분의 사랑의 말',

그 당신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잊지 말아야 할,

수많은 당신들을 호명해낸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사랑의 고백들을

우리는 이제 볼 수 없는 그들에게

뒤늦게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어서 그가 연결해준 누군가에게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미선나무, 물푸레나무, 쥐똥나무, 매화, 생강나무, 산수유,

산벚나무, 앵두나무,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 철쭉..

수북한 개화의 행렬에

우리는 떠나간 이들을 맞이한다.

매일 매일 떠나고 떠나지만,

매일 매일 다시 돌아오는 그들을 맞이한다.

1일분의 사랑 고백과 함께.

봄에는 모든 슬픔이 살아난다.

봄꽃의 개화처럼 막을 수 없는 이 슬픔을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로

표현할 수 밖에 아득한 아픔들.

봄이나 아직 겨울의 묵직한 이부자리를

털어내지 못해 못내 무겁고 못내 사나운

2월, 3월의 스산함을

이 시집의 시인들과 시들이 함께 할 생각을 하니

마음에 노오란 아지랑이 같은 따스함이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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