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유령 - W. G. 제발트 인터뷰 & 에세이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3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읽는 내내 그의 마지막이 겹쳐진다. 먼저 접한 그의 작품들, 인터뷰에서 자연사와 역사, 우연과 침묵에 대해 말하던 그의 육성, 그리고 그 마지막. 세 개의 높낮이를 오가는 화음이 책을 읽는 내내 가을볕처럼 무심하게 낮은 배음으로 깔렸다. 


자연사의 관점에서 그는 인간사를 보려했던가. 가차 없음, 그가 우연이라고 표현한 것들. 그 자연사를 추동하는 힘이 우연이라고 착오되는 필연이라면. 생명 있는 육체로 기억의 유령들과 역사 속을 배회하던 제발트는 이제 육체마저 버리고 기억뿐만 아니라 현실 속을 여전히 배회 중일까. 그의 마지막을 생각할수록 이 책속의 제발트의 음성이 더 또렷하게 들리는 이유는 뭘까.

‘기억의 유령’에는 제발트와의 네 편의 인터뷰와 그의 작품들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가 실렸다. 인터뷰들은 제발트가 작품 속에 반복해 다뤘던 이슈들, 그 이슈들이 그에게 중요했던 이유들, 그의 독특한 글 스타일이 형성되어온 과정, 글쓰기와 재현의 윤리, 글쓰기의 어느 순간 직면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벽, 그의 글 속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의 출처와 의미들에 관한 이야기 등을 제발트의 음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양한 각도와 심도 있는 인터뷰어들의 질문들은 작가와 작품에 관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이슈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이끌어낸다. 세심한 문답들이 오가며 문학과 글쓰기에 관한 제발트의 사유가 드러난다. 더없이 흥미롭다.



작가, 제발트는 그의 작품(그의 글은 자주 길을 잃는 듯 보인다, 자주 독자를 안개 속으로 인도한다. 이것이 나에게 제발트가 각별한 이유다.) 만큼이나 나에게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전에 접해보지 않았던 낯선 스타일의 글들. 환영에 홀린 듯 따라가며 단번에 끝까지 읽고, 언제나 당연한 듯  첫 장으로 돌아가 점점 느려지는 물살을 타듯 천천히 문장을 곱씹게 되는 그의 글들. 그 글 속에 홀연히 나타났다 홀연히 사라지는 시간들, 장소들, 사람들.



안개 같은 존재들을 허공을 쥐어보려는 안간힘으로 언어로 옮기는 그의 문장. 작가의 헤맴을 그대로 느끼며, 그 안간힘에 떠밀려 작가와 함께 안개 속을 헤매는 독서. 이 기묘한 읽기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운 기묘한 중독. 미묘한 끌림을 분명히 자각하기에 그의 작품들을 읽을수록 이 작가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언어의 한계로 그의 인터뷰들을 접할 기회가 없어 그 동안 그에 관한 막연한 이미지와 생각들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통해 제발트의 인터뷰들을 읽으니, 아, 아, ... 수긍과 해소, 아... 놀라움, 그의 마지막을 알기에 안타까움.



평론가들과 작가들이 쓴 제발트의 작품에 관한 에세이들은 다른 의미로 흥미롭다. 이 책에는 ‘이민자들’, ‘자연을 따라, 기초시’, ‘현기증, 감정들’, ‘토성의 고리’, ‘아우스터리츠’, ‘공중전과 문학’에 관한 에세이들이 실렸다. 각자 읽은, 같은 책에 관한 타인의 에세이들은 흥미로울 수밖에. 타인의 에세이들을 읽으니 이 책들에 관한 인상들이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전경으로 다가왔다. 같은 텍스트에 관한 결이 다른 비평과 에세이들. 타인의 생각의 주름이 만들어내는 음영을 음미하다 보면, 내 기억 속 텍스트의 풍경까지 한층 다채로워진다. 



제발트 작품에 관한 이 작가들의 비평들은 섬세하고 날카롭다. 비평들을 읽으니 시간과 기억의 무게에 짓눌렸던 제발트 작품의 결들이 한 올 한 올 다시 일어서는 것 같다. 에세이의 시선들은 유물 복원사의 붓 작업처럼 사려 깊다.



‘기억의 유령’. 이 책을 읽기 전 책장에서 해당 번역본들을 꺼내 쇼파 옆 테이블에 쌓아 놓았다. 책을 읽으며 언급된 번역본을 무릎에 올려 넘겨봤다. 그럴 수밖에. 책을 읽는 동안 작가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 언저리를, 내 기억 언저리를 내내 오간다. 작가가 본 것, 당신이 본 것, 내가 본 것, 그리고 작가의 마음, 당신의 마음, 나의 마음. 문학은 그 경계들을 이해와 오해 속에 넘나드는 거라는 걸, ‘기억의 유령’을 읽으며 새삼. 



인상적인 글들을 ‘쓴’, ‘사람’에 관심이 많다. 짧은 인터뷰라도 찾아 읽는 이유다.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사로잡는 글을 쓴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이 책이 소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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