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알라딘 한정판 북커버 에디션) - 엘제 라스커 쉴러 시집
엘제 라스커 쉴러 지음, 배수아 옮김 / 아티초크 / 2023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 엘제 라스커 쉴러 / 배수아


“내면에는 광폭하게 이글거리는 생의 불꽃이

도저히 다스릴 수 없는 감정들이

형체를 입고 들끓는 상상들이

이리떼처럼 나를 덮친다!” (3페이지, 욕망 중에서)





주체할 수 없는 생에 대한 사랑, 그 열기로 언제나 가슴이 뜨거운 이. 태양의 후예라 부를 만한 사람. 그런데 그런 그가 시인이라면, 그 생을 향한 열정과 사랑은 햇살처럼 작열하는 시어들로 쏟아져내릴 것이다. 엘제 라스커 쉴러, 그가 그렇다. 시집 전체에 빛의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듯하다. 환희에 찬 사랑의 순간은 말할 것도 없고, 고독과 슬픔의 시간들조차 잠시 가려진 태양 없이 설명될 수 듯, 창백하게 불타고 있다.


관능적이고, 더없이 격정적인 삶을 시로 옮긴 엘제 라스커 쉴러는 1869년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양차 세계 대전의 화마 속을 살다 1945년 팔레스타인에서 사망한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걸출한 주역이었으며, 평론가들에게 독일의 사포라는 찬사를 받으며 당대 최고 문학상인 클라이스트상을 수상했다.


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서정 시인으로 칭송되던 그였지만, 폭력적인 역사는 그를 빗겨가지 않았다. 유대인, 여성, 전위 예술가, 관습에 굴복하지 않는 비타협적 성향, 보헤미안적 기질. 타인과 사회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독립적인 정신. 이런 라스커 쉴러의 생존은 전쟁의 광기 속에서 어떤 것이었을까.


그의 연보와 배수아 작가의 글에 의하면, 오로지 생존하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시기에, 그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유로 충만한 세계를 부단히 창조했고, 자신의 삶과 사랑, 예술을 다양한 정체성으로 연출했고, 실험했다. 이쯤 되면 그의 삶과 사랑, 예술 자체가 폭력적인 세계를 향한 저항이 아닌가.


이번 시집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는 관능적이고, 더없이 격정적인 시들로 시작한다. 눈으로 읽는 것만으로도 데일 것 같은 시어들이다. “관능의 샘물”을 빨아 마셔 “도덕을 질식”시키고, “정신의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 마침내 “지옥을 응시”하는 형형한 눈빛. 두 번 다시 고향을 보지 못하리라는 각오로 거친 “죄의 땅”에 당도해 사랑하는 이가 열어젖힌 “멸망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나의 뜨거운 몸”


격정적인 사랑의 시들 다음으로 그 사랑이 떠난 후의 슬픔을 노래한 시들이 이어진다. 갈망과 그리움 “내 뺨은 네 피로 언제나 붉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나 네게로 향하는 곳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죽음, 죽음 “그날 이후 내 눈은 더 이상 세계로 향하지 않는다”, “너를 죽음으로 재우며 흐느낀다”. 그리고 이산, 디아스포라의 삶. “지금 흘러가는 구름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절벽 같은 고독. 세계에 대한 환멸 “영혼 없는 세계들이 마주 친다”, 종국에는 자신의 죽음을 애원하는, 예감하는. “어느 날 나는 최후의 데이지를 꺽는다... 그때 천사가 와서 내 수의를 지어 주었다 - 다른 세계에서 입어야 하므로”



“영원한 삶은 사랑을 많이 말할 줄 아는, 그런 자들에게만 -

사랑의 인간은 오직 부활할 수 있을 뿐!

증오는 뚜껑을 덮는다! 불꽃이 아무리 높게 타오를지라도

나는 너에게 많이 많이 사랑을 말하겠다 - ” (136, 가을 중에서)


평생에 걸친 떠남과 이별, 차별과 혐오. ‘사랑’으로 ‘사랑의 부재’를 살아낸 시인이 인생의 가을 이런 바람을 시에 남긴다. 마음이 아프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관능의 시어들, 투명하게 벼려진 슬픔과 고독의 시어들. 엘제 라스커 쉴러는 사랑의 시인이다. 이 시집은 사랑의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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