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에서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딜런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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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다 내가고 텅 빈 공간을 돌아보면 전해오는 선득함. 공간의 무표정, 그 무심함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마치 그 집에서 일어났던 모든 한심한 일을 알고 있다는 듯 공간이 보내는 조소어린 침묵, 홀로 남겨진 이의 냉소어린 시선. 이 장소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었다는 돌연한 깨달음. 이 책은 얼마간 그 선득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장소와 사물을 관觀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와 사물이 우리를 관하고 있다는 낯선 사실을 일깨우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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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조금은 진저리치며 이 책에 빠져들 것을 알았다. 집. 사라지지 않을 집과 방들이 내게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어느 방에 들어서면, 나 또한 나만이 기억하는 방문을 열거라는 예감. 어떤 문장 위에 눈이 멈추면, 딸깍하고 어떤 방의 자물쇠가 열린다. 놀랍도록 그대로인 방의 조도와 공기의 수런거림.



작가가 자세히 묘사한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집House>이 장소가 품고 있는 기억을 물질로 조형했다면 작가는 기억의 장소성을 언어라는 도구로 정교하게 조형해낸다. 기하학적 구조물이 되어버린 기억. 언어의 건축가인 작가는 견고하면서도 부서지기 쉬운 기억들이 상호 투과되는 모순적인 장소를 구현한다. 작가가 구축한 기억의 조형물 안에서 독자는 배회하며 기억의 구조와 질감을 더듬는다. 현실과 환영, 실재와 부재, 집착과 회피, 억압과 강박. 그 경계의 넘나듦을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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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방문하는 장소 중 하나는 몸이다. 이른 나이에 질병으로 부모님을 잃고 자신도 진단이 어려운 이상 증상으로 고통 받았던 작가는 일찍부터 질병과 고통의 장소로서 몸을 감각한다. 몸은 자극을 수용하고 저장하는 동시에, 타자의 고통이 반영되는 장소(“나는 갈라지고 벗겨진 내 두피 위에 새겨진, 어머니의 고통이라는 유물을 간직하고 있었다.”)이자 나를 조형하는 장소(“피부가 나를 만들었지, 그 반대가 아니다.”)이다. 작가는 몸을 둘러싼 감각과 정동의 미세한 스펙트럼을 극세밀화로 기록한다. 고통 받는 몸처럼 낯선 장소가 있을까. 그러니 어두운 방은 해독 불가한 몸의 낯섦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 어떻게 장소의 상실로 이어지는지, 어떻게 삶이라는 장소의 가장 먼 가장자리까지 남겨진 이를 데려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이 흐른 후 남겨진 이는 그 가장자리에서 되돌아서서 자신을 이룬 감각의 연원을 찾아 잠가 뒀던 어두운 방들을 순례한다. 작가와 동행한 독자는 그 순례길에서 어느 방 앞에서는 망설이고, 어떤 방 안에서는 오래도록 머물고, 어느 방 초입에서는 책을 잠시 덮어야만 했다.



작가는 이 순례길에서 W.G. 제발트와 버지니아 울프, E.M. 시오랑과 리베카 솔닛 등 수많은 작가들과 동행한다. 문지기처럼 방을 지키는 작가들은 물리적 장소가 어떻게 마음의 장소로 이어지는지 너무도 잘 이해했던 이들이다. 작가가 이 동행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자주 독자를 멈춰 세운다. 이를테면 토마스 드퀸시의 이런 말, “인간의 정신에서 망각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참이라면 재앙인가, 축복인가. 그리고 돈 밴 블리트의 이런 말, “내가 세상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방식은 아주아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 세상이 날 너무 거칠게 건드리거든.” 무슨 말을 보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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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종착지에서 작가는 듣는다. 집의 노래를 듣는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리워해서 누군가를 애달프게 기다려온 집. 그 집이 온 몸을 진동하며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기억으로 짓눌린 집이 탈출을 감행하며 울부짖는다. “소중한 무언가가 이제 우리 삶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다고. 이제 그건 영원히 없는 거라고.” 이 책은 거대한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집을 버리고 떠났던 작가는 집이 되어 울고 있다. 한 순간도 작가를 떠난 적 없던 집은 어린 소년이 되어 울고 있다. 울음이 어두운 방을 가득 채운다.



PS


책의 만듦새가 아름답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을 품어왔던 집이 기억하는 몸짓, 목소리, 표정, 소음, 냄새, 그리고 이야기들. 기억의 입자들이 명멸하며 흐릿하게 반짝이는 장소. 고요한 소란이 책 표지에 가득하다. 활자마저 기억의 파편처럼 보이게 하는 디자인. 작가가 방문하는 수많은 장소들을 품는, 깊은 방이 되어버린 책. 방의 숨결을 구현한 책의 물성이 책의 이야기와 환하게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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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노은 옮김 / 다산초당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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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나는 세상이 낯설다. 이 낯설음의 기저에는 사회 전반에서 감지되는 정서의 변화가 있다. 최소한의 위선마저 벗어던진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 혐오의 만연, 이 혐오와 폭력을 지렛대 삼는 정치. 이 낯설음에 기름을 부은 것은 12.3 내란이다. 내란 이후 국내외 뉴스에 대한 체감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이든 가능한 세계라는 걸 경험한 후의 불안은 신체적이다. 12.3 내란은 일상의 안전과 안정에 대한 감각이 집단적인 무지와 기만에서 기인한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일깨웠다. 오늘 국내외 뉴스는 오늘 하루가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체감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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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어제의 세계>를 읽게 된 계기다. 진행 중인 침략 전쟁들, 요원해 보이는 내란 진상 규명과 청산(과연?), AI로 재편되는 경제구조. 내란 이후 몸에 입력된 불안은 현실을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인식한다. 낯섦과 기시감, 이 모순적인 감각을 이해해보고 싶은 마음이 이 책을 찾았다. 물론 현재의 국내외 정세와 20세기 초중반 유럽의 정세 사이에는 상이한 맥락이 있고, 작가의 어제의 세계와 나의 어제의 세계도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가 경험하는 시대의 징후와 거의 유사한 어떤 것들을 감지하고도, 결국은 고립감과 무력감 속에서 그것들을 혹독하게 겪어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기록한 증언은 거울상처럼 오늘의 세계에 대해 너무도 많은 것들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의 세계를 읽는 일은 오늘의 세계를 읽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평생 평전과 소설로 사랑 받아온 슈테판 츠바이크가 생의 마지막에 쓴 작품이 자신이 살아온 시대와 장소에 대한 평전, 동시에 자신의 회고록이라니. 그다운 마무리다.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쓸 수밖에 없던 책. 그래서인가 작가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 넣은 책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삶이 그에게 허락한 기억들, 그 날카로운 환희와 절망을 고스란히 책에 옮겨 놓으려는 절박함이 깊고 빼곡하다.



역사 비평과 세대 비평, 인물 비평 그리고 작가 자신의 회고가 맞물려 전개되는 이 책은 엄청난 흡입력으로 독자를 격변기 유럽 한 복판으로 빨아들인다. 사건들은 긴박하며 인물들은 흥미롭고, 통찰은 매섭다. 독자는 꼼짝없이 작가의 그물망에 걸려든다. 70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가 숨 가쁘게 넘어간다. 열을 식힐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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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중반 유럽을 짓누른 불안과 긴장의 압력, 그 과잉된 힘이 폭발하고 분출되는 과정이 작가의 펜으로 옮겨진다. 작가는 이성과 기술을 향한 맹목적 신뢰, 절정에 달한 낙관주의가 어떻게 재앙의 징후를 외면하고 붕괴와 폐허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기록한다. 대중의 공포와 불안 속에 틈입해 입지를 넓혀가는 파시즘의 용의주도함을 파고든다. 역사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나가는 사람들의 운명에 독자는 숨을 고르며 읽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어제의 세계에서 발견되는 오늘의 세계를 두려운 시선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어떤 페이지들은 주어만 다를 뿐 현실을 그대로 옮긴 것 같아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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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의 대가답게 작가는 재앙 직전 대기를 떠돌던 시대의 정신적인 분위기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두 전쟁 전후로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대중 심리, 극한 상황에서 발현되는 인간성의 만화경을 증언한다. 열광과 냉소, 맹신과 불신을 시소 타는 대중적 혼돈, 한계 상황으로 치닫는 혐오의 광기. 동시에 작가는 평화와 연대의 가능성을 찾아 고군분투했던 사람들의 양심과 실천 또한 잊지 않고 증언한다. 역사의 중심부와 주변부에 있던 인물들에 대한 날카로운 인물 비평은 역사 비평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이 책을 흥미롭게 하는 중요한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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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것은 격변기를 통과하는 츠바이크의 자신의 내면과 삶의 태도이다. 그가 가리키는 달, 그가 기록한 양차 대전 중의 유럽은 더할 나위 없이 여러 갈래의 통찰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증언하는 사람 츠바이크도 역시 각별한 깨침과 영감의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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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관한 집념과 거의 초인적인 기억력, 그리고 무엇보다 시종일관 윤리적 성찰을 견지하려는 지성의 힘. 경탄스럽다. 이 책의 집필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41년, 망명 중이던 뉴욕 호텔에서 시작됐다. 서문에서 작가는 자료 하나 없이 이 책을 쓰고 있다고 기록한다. 책의 초반부터 기록의 세밀함에 압도당한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글의 정치함은 더해간다.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이렇게 밀도 높은 증언으로 작가를 떠밀었을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기 삶의 반추 또한 계속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얻은 성공과 명성, 그 빛과 그림자, 평생 추구해온 가치가 철저히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는 무력감, 막바지의 고립감도 감추지 않는다. 책의 막바지 유대인이자 침략국 국민이라는 이중의 굴레로 유럽에서 완전히 뿌리 뽑혀 타국을 전전하며 버티다 결국 이 침착한 인물이 생에 대한 피로감을 내비친 대목은 먹먹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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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가 역사와 사람을 관찰하고 기억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극한의 격변 속에서도 작가는 거리두기를 유지한다. 흥분과 냉소에서 벗어난 냉철한 관찰은 이 증언록의 단단한 토대가 된다. 진실에 가깝도록 부단하게 자신의 관점을 교정해가는 신중함과 겸손함도 인상적이다. 그의 사유가 확장되는 젊은 날의 경험을 기록한 글들에서 보여지는 배움에 대한 열망, (아카데미 밖의 배움, 현실과 사람을 통한 배움, “끊임없이 배울 수 있었다.”) 비판적인 외부 관찰에 동반되는 자기 평가는 생의 종결부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츠바이크의 감동하는 능력, 사랑하는 능력, 그리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에 놀란다. “어떤 사람을 혼자서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두 배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법이다.” 시인 에밀 베르하렌을 향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한 말이다. 책을 덮으면 저 문장이 삶을 향한 츠바이크의 애정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로 다시 읽힌다.



사랑해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사랑해서 그토록 오래 기억하고, 정확하게 표현해내고야 마는 능력. 사람이든 어떤 순간이든, 그가 사랑한 대상을 묘사한 문장을 읽다보면, 독자까지 사랑에 빠진 기분에 물든다. 그렇기에 역사의 참극을 기록한 이 책을 읽고 독자의 마음은 마냥 절망스럽지만은 않다. 인간의 무참한 야만성과 취약성을 기록한 책을 읽고 나서, 여전히 환하고 따스한 마음을 봐버린 것 같은 느낌. 놀랍고 당혹스럽다. 어쩌면 츠바이크가 쓰고 싶었던 마지막 책이 바로 이 책 그대로가 아닐까도 싶다. 비극을 잊지 않게 전하되, 인간 안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존엄과 품위 또한 전하는 책. 책의 막바지에 이르면 일몰 직전 화려하게 쏟아지는 황혼의 광채에 자신의 삶을 마지막으로 비춰보는 애수가 문장에 깃든다.



이 책은 츠바이크가 사랑했고, 절망했던 20세기 초중반 유럽에 받친 추도사이자 자신의 길고 긴 유서다. “한 인간이 어린 시절 시대의 공기로부터 핏 속으로 받아들인 것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중략) 나는 내 어린 시절에 빛나던 저 오래된 별자리들을 자꾸 올려다본다.” 핏 속에 남은 환한 빛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오늘 오래된 별자리들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어제의 세계에서 그 별자리를 올려다본 사람과 만난다, 반짝하고 빛나는 별빛에서. <어제의 세계>는 그 별빛이 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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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이윤 리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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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 위에 서 있는 사람. 생의 이편과 저편 사이 난간 위. 그 위에서 바라보는 생사의 풍경들. 이편의 삶은 안개로 자욱하고, 죽음 저편은 암흑이고, 고요하고, 평안해 보인다. 어느 편으로도 내려서지 못하고 발붙이지 못한다. 이편과 저편의 경계가 사라진다. 세상은 적막하다.



태어남, 살아감, 죽음, 남겨진 채로 살아감,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안에 고갱이로 들어찬 고통. 고통을 살아가기. 그 모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와 살아지는 것의 기이함. 낙관도 비관도 아닌, 그저 그러한 것. 너무도 엄연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너무도 자명하여 나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것. 빗속에 서 있는 저 나무처럼.



작가는 “비극 안에서, 비극 밖에서, 그리고 비극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쓴 이유를 스스로를 “그 기이한 영역에서 분리해내고 동시에 안착시키기 위해서”라고 쓴다. 말하기는 의미 없는 삶에서 의미를 길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쓴다. 그러니 이 책은 아들 제임스를 위한 것이며 동시에 작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이미 작가는 이 책이 절반의 실패로 끝날 것임을 안다. 아무리 옳은 질문을 찾아 헤매도 ‘만약에’와 ‘왜’라는 질문은 언제나 되돌아 올 것이며, 언어는 결국 무력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책이 죽음에 관한 사실과 논리에 관한 책이라고 썼다. 죽은 이들을 향한 애끓는 애도 혹은 삶을 구원할 재생의 서사가 이 책의 지향이 아님을 작가는 밝힌다. “나는 애도하는 어머니가 아니다. 여생 동안 매일매일 빈센트와 제임스를 잃은 고통과 그 아이들을 키우던 기억을 안고 살아가게 될 엄마다” 대안이 있을 수 없는 자식의 죽음. 대안 없음을 우회하지 않고, 감내하고 사는 법을 알아가기 위해 작가의 펜은 나아간다.



의문과 가정, 추측, 그리고 기억으로 가득한 심연. 작가는 불가해한 그 어둠에서 사실과 생각과 감정을 구분하려 애쓴다. 부정할 수 없고, 바뀔 수 없는 사실이 현실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한다고 작가는 믿는다. 작가에게 사유는 감정이 범람할 때 자신을 알아차리는 의지처이며, 감정은 생각이나 사실로 둔갑해 현실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심연 속의 시시포스는 어떤 생각과 감정이 의미 있는 바윗돌인지, 하찮은 돌멩이인지 구분하려 오래도록 마음을 들여다본다.



자식들의 죽음이 남긴 저마다의 의미와 무게를 지닌 사실들. 작가가 직시해야할 사실들이 쌓여간다. 아들들이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 부모는 자식이 느끼는 세상의 광대함과 낯섦을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아이를 위해 내린 결정에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 부모는 자식의 목숨을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 사별 후의 시간은 시시포스의 바위가 되고 만다는 사실, 자식들은 죽고 부모는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 이 냉혹하고 견디기 힘든 사실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낯설어진 삶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작가는 쓴다.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에 대해 그렇게 잘 쓰면서 왜 우리를 낳았어?” 작가가 끝내 좋은 답을 내놓지 못했다고 쓴 첫 아들 빈센트의 질문이다. 작가는 둘째 아들 제임스가 죽고 나서야 “고통을 잘 겪어내는 방법을 배울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쓴다. 고통을 겪어낼 가치가 있는 것이 존재하고, 고통과 맺은 관계는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쓴다. 만약 빈센트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 같은 질문을 했다면, 나는 다르게 대답했을 것이라고 쓴다. 과거완료형이 되어버린 무수한 가정문의 세계. 한없이 무력한 세계. 



고통에서 더 이상 의미나 목적, 가치, 시비를 찾지 않게 되는 순간. 견디고 견디다, 견디는 것에 더는 힘을 들이지 않게 되는 순간. 버티고 버티다 붙잡고 있던 것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순간. 이름 붙일 수조차 없게 해진 감정들이 풍화되어 사라지는 순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철학적 사변과 언어의 요란함을 넘어, 고통이 자연으로 용해되는 순간은 온다.



그때 “고통은 존재 전체에 스며들고, 더는 저항하지 않게 된다.” 고통 속에 순연해 진다. 아주 잠시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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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이윤 리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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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내 없어진 아이의 방을 가득 채우고,

아이의 침대에 눕고, 나와 함께 걸어 다니며,

아이의 어여쁜 얼굴을 하고, 아이의 말을 되풀이하오.

슬픔이 아이의 그 모든 고운 면모를 떠올리게 하고,

아이의 텅 빈 옷을 그의 형상으로 채우오.

그러니 내가 슬픔을 사랑해야 마땅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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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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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인용한 세익스피어의 <존 왕> 중 일부분이다.

이어 이어지는 작가의 글이다.

너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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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서식지인 심연 속에 부러 슬픔의 자리를 배정하고 싶지 않다.

만약 슬픔이 그곳에서 자라기로 마음먹는다면

그것은 마치 제멋대로 피어나는 장미동자꽃이나 향기로운 제비꽃 혹은

매발톱처럼 자라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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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길고 투쟁은 진행 중 - 운동 좀 하던 할머니들의 현재진행형 인생 이야기
변정정희 지음 / 현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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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회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 시상식에서 이창동 감독은 영화 ‘가능한 사랑’이 “노동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영화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라고 소회를 밝혔다. 노동이 사라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AI에 의해 대체되는 직업군의 확산을 의미하는 걸까. 여전히 존재하지만 점점 비가시화 되는 노동의 ‘모습’을 의미하는 걸까. 둘 다일 것이다.



무엇을 먹고, 입고, 어디를 가고, 어떻게 자기를 계발하는지가 SNS의 중요 관심사다. 어디서든 소비자 정체성, 자본가(?) 정체성 (놀랍게도 자본 없는 자본가, 자기 신체가 유일한 자본인 자본가)은 환영받는다. 그러니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자본가는 꽤 만족할 것 같다. 노동자가 각자도생을 내재화해 서로 경쟁하기에 여념이 없고, 소비로 하루하루의 불안과 불만을 땜질하면서, 노동자 정체성을 스스로 녹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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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들이 기대하듯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에 관해 무지하고 무관심할까. 그럴 리가. 하지만 부의 양극화와 고용 불안정성이 이렇게 심화된 현실에서 노동 이슈가 뒷방의 쿰쿰한 곰팡이처럼 취급되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는 무엇일까. 무엇이 노동의 의미와 조건에 대한 질문을 지우고, 노동자들이 서로의 노동을 바라보지 못하게 시야를 가리는 걸까. 마른 가루처럼 흩날리는 노동의 미래의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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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복잡한 문제다. 특히, 여성의 노동은. 내 안에는 흘러가지 못하고 고여 있는 여성의 시간, 노동의 시간이 있다.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있다. 그래서 이 책 속 여성들의 얼굴이 반가웠고,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에게 노동은 무엇이냐고, 당신은 어떻게 저항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냐고. 밤마다, 한 명의 여성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들려준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감사했다.



맵고, 짜고, 시고, 쓰고, 단 여성 노동의 이야기. 그들 각자가 들려주는 노동과 삶의 이야기에, 내 인생의 여자들과 그들의 노동이 겹쳐지고, 내 노동의 시간도 겹쳐진다. 그러다보면 깊은 밤 정신이 말똥말똥 해졌다. 분리조차 어렵게 서로 얽히고설킨 여성들의 노동사. 서로 버티고, 지지하고, 밀고, 당기며 엮어온 여성들의 삶. 여성 노동자의 끈질긴 삶과 존엄. 마음이 얼얼해지고 말개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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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동자들의 육성은 자본의 모순, 가부장제의 모순, 정치권력의 모순이 어떻게 구조적으로 야합해 일터에서 여성의 노동을 착취해왔는지 증언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권위주의, 여성혐오 중, 그 어떤 것도 단독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서로가 있어야 완전체가 된다. 이 공고한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투쟁은 그 만큼 험난하다. 이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새삼, 고통스럽게 확인했다.



각자의 노동 현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중첩된 착취와 억압 속에 연대하고 맨 몸으로 싸웠다. 철벽같은 불평등과 불의의 벽들을 매우 힘겹게, 더디게, 조금씩 허물어갔다. 거대 담론의 틀 안에 박제된 하나의 사례가 아닌, 투쟁의 주체였던 자신의 목소리로 저항의 기억을 풀어놓는다. 당시의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상황들과 함께, 분노와 두려움, 혼란과 보람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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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동자 개인의 미시사를 읽다보면 정치경제의 거시사가 한 타래로 엮인다. 미시사는 거시사를 통해, 거시사는 미시사를 통해 선명해진다. 교과서나 역사책의 한 귀퉁이에서 반복해서 봐온 여성노동 운동사가 여성 노동자 본인의 육성으로 구술되니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전해진다. 흡수된다. 이것이 육성의 힘인가 싶다. 공부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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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묻는다. 당신의 노동은 안녕하냐고. 70년대 한국 여성 노동 운동의 정오, 가장 불같았던 그 현장에 있었던 여성들이 묻는다. 당신들의 노동은 제대로 대접받고 있냐고. 나는 선뜻 그렇다고, 50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더 좋아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남성 월 평균 임금의 64%에 미치는 여성의 월평균 임금(2024년, 성별 임금격차 OECD 평균의 3배), 남성보다 1.6배 높은 저임금 노동자수(2025년) 등 통계는 50년이라는 시간이 여성의 노동 지위를 충분히 견인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여성 노동의 현실은 어떨까. 이 책과 현재 사이를 오가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확고부동한 결탁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그것을 뿌리 뽑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몸서리치게) 확인한다.



하, 오해들마시라, 이 언니들은 비장하지 않다. 이 언니들은 담담하다. 모든 것을 넘어온 자의 초연함과 여유가 책 전편에 유유히 흐른다. 언니들은 고뇌하는, 멋있는, ‘~척’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껍데기들은 가라, 알맹이만 주련다! 책의 정서는 대략 이렇다. 비장해지는 건, 이 언니들이 머리에 띠 두르고, 투쟁을 외칠 때, 기저귀 차던 독자, 나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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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세월, 있는 자리와 외형만 바뀌었을 뿐, 이 여성들의 투쟁은 계속된다. 현실의 끈을 단단히 부여잡고 일상을 직조하며 톡톡한 삶의 무늬를 새겨 넣는다. “그만 좀 쉬어!”, “여행 다니고, 원 없이 놀아” 내 인생의 여자들에게 내가 가장 많이 해온 말이다. 책의 마지막, 나는 얼굴이 화끈했다. 산책하다가도, 설거지 하다가도 화끈거린다. 국공립기관들은 이 책을 필독서로 지정하라. 만국의 노동자여, 오늘 당신의, 노동의 안부를 묻는 이 책을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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