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에서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딜런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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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다 내가고 텅 빈 공간을 돌아보면 전해오는 선득함. 공간의 무표정, 그 무심함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마치 그 집에서 일어났던 모든 한심한 일을 알고 있다는 듯 공간이 보내는 조소어린 침묵, 홀로 남겨진 이의 냉소어린 시선. 이 장소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었다는 돌연한 깨달음. 이 책은 얼마간 그 선득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장소와 사물을 관觀하는 것이 아니라, 장소와 사물이 우리를 관하고 있다는 낯선 사실을 일깨우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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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조금은 진저리치며 이 책에 빠져들 것을 알았다. 집. 사라지지 않을 집과 방들이 내게도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어느 방에 들어서면, 나 또한 나만이 기억하는 방문을 열거라는 예감. 어떤 문장 위에 눈이 멈추면, 딸깍하고 어떤 방의 자물쇠가 열린다. 놀랍도록 그대로인 방의 조도와 공기의 수런거림.



작가가 자세히 묘사한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집House>이 장소가 품고 있는 기억을 물질로 조형했다면 작가는 기억의 장소성을 언어라는 도구로 정교하게 조형해낸다. 기하학적 구조물이 되어버린 기억. 언어의 건축가인 작가는 견고하면서도 부서지기 쉬운 기억들이 상호 투과되는 모순적인 장소를 구현한다. 작가가 구축한 기억의 조형물 안에서 독자는 배회하며 기억의 구조와 질감을 더듬는다. 현실과 환영, 실재와 부재, 집착과 회피, 억압과 강박. 그 경계의 넘나듦을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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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방문하는 장소 중 하나는 몸이다. 이른 나이에 질병으로 부모님을 잃고 자신도 진단이 어려운 이상 증상으로 고통 받았던 작가는 일찍부터 질병과 고통의 장소로서 몸을 감각한다. 몸은 자극을 수용하고 저장하는 동시에, 타자의 고통이 반영되는 장소(“나는 갈라지고 벗겨진 내 두피 위에 새겨진, 어머니의 고통이라는 유물을 간직하고 있었다.”)이자 나를 조형하는 장소(“피부가 나를 만들었지, 그 반대가 아니다.”)이다. 작가는 몸을 둘러싼 감각과 정동의 미세한 스펙트럼을 극세밀화로 기록한다. 고통 받는 몸처럼 낯선 장소가 있을까. 그러니 어두운 방은 해독 불가한 몸의 낯섦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 어떻게 장소의 상실로 이어지는지, 어떻게 삶이라는 장소의 가장 먼 가장자리까지 남겨진 이를 데려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시간이 흐른 후 남겨진 이는 그 가장자리에서 되돌아서서 자신을 이룬 감각의 연원을 찾아 잠가 뒀던 어두운 방들을 순례한다. 작가와 동행한 독자는 그 순례길에서 어느 방 앞에서는 망설이고, 어떤 방 안에서는 오래도록 머물고, 어느 방 초입에서는 책을 잠시 덮어야만 했다.



작가는 이 순례길에서 W.G. 제발트와 버지니아 울프, E.M. 시오랑과 리베카 솔닛 등 수많은 작가들과 동행한다. 문지기처럼 방을 지키는 작가들은 물리적 장소가 어떻게 마음의 장소로 이어지는지 너무도 잘 이해했던 이들이다. 작가가 이 동행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자주 독자를 멈춰 세운다. 이를테면 토마스 드퀸시의 이런 말, “인간의 정신에서 망각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참이라면 재앙인가, 축복인가. 그리고 돈 밴 블리트의 이런 말, “내가 세상과의 접촉을 유지하는 방식은 아주아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 세상이 날 너무 거칠게 건드리거든.” 무슨 말을 보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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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종착지에서 작가는 듣는다. 집의 노래를 듣는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리워해서 누군가를 애달프게 기다려온 집. 그 집이 온 몸을 진동하며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기억으로 짓눌린 집이 탈출을 감행하며 울부짖는다. “소중한 무언가가 이제 우리 삶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다고. 이제 그건 영원히 없는 거라고.” 이 책은 거대한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집을 버리고 떠났던 작가는 집이 되어 울고 있다. 한 순간도 작가를 떠난 적 없던 집은 어린 소년이 되어 울고 있다. 울음이 어두운 방을 가득 채운다.



PS


책의 만듦새가 아름답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을 품어왔던 집이 기억하는 몸짓, 목소리, 표정, 소음, 냄새, 그리고 이야기들. 기억의 입자들이 명멸하며 흐릿하게 반짝이는 장소. 고요한 소란이 책 표지에 가득하다. 활자마저 기억의 파편처럼 보이게 하는 디자인. 작가가 방문하는 수많은 장소들을 품는, 깊은 방이 되어버린 책. 방의 숨결을 구현한 책의 물성이 책의 이야기와 환하게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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