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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이윤 리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9월
평점 :
난간 위에 서 있는 사람. 생의 이편과 저편 사이 난간 위. 그 위에서 바라보는 생사의 풍경들. 이편의 삶은 안개로 자욱하고, 죽음 저편은 암흑이고, 고요하고, 평안해 보인다. 어느 편으로도 내려서지 못하고 발붙이지 못한다. 이편과 저편의 경계가 사라진다. 세상은 적막하다.
태어남, 살아감, 죽음, 남겨진 채로 살아감,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안에 고갱이로 들어찬 고통. 고통을 살아가기. 그 모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와 살아지는 것의 기이함. 낙관도 비관도 아닌, 그저 그러한 것. 너무도 엄연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너무도 자명하여 나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것. 빗속에 서 있는 저 나무처럼.
작가는 “비극 안에서, 비극 밖에서, 그리고 비극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쓴 이유를 스스로를 “그 기이한 영역에서 분리해내고 동시에 안착시키기 위해서”라고 쓴다. 말하기는 의미 없는 삶에서 의미를 길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쓴다. 그러니 이 책은 아들 제임스를 위한 것이며 동시에 작가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이미 작가는 이 책이 절반의 실패로 끝날 것임을 안다. 아무리 옳은 질문을 찾아 헤매도 ‘만약에’와 ‘왜’라는 질문은 언제나 되돌아 올 것이며, 언어는 결국 무력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책이 죽음에 관한 사실과 논리에 관한 책이라고 썼다. 죽은 이들을 향한 애끓는 애도 혹은 삶을 구원할 재생의 서사가 이 책의 지향이 아님을 작가는 밝힌다. “나는 애도하는 어머니가 아니다. 여생 동안 매일매일 빈센트와 제임스를 잃은 고통과 그 아이들을 키우던 기억을 안고 살아가게 될 엄마다” 대안이 있을 수 없는 자식의 죽음. 대안 없음을 우회하지 않고, 감내하고 사는 법을 알아가기 위해 작가의 펜은 나아간다.
의문과 가정, 추측, 그리고 기억으로 가득한 심연. 작가는 불가해한 그 어둠에서 사실과 생각과 감정을 구분하려 애쓴다. 부정할 수 없고, 바뀔 수 없는 사실이 현실에 질서와 논리를 부여한다고 작가는 믿는다. 작가에게 사유는 감정이 범람할 때 자신을 알아차리는 의지처이며, 감정은 생각이나 사실로 둔갑해 현실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심연 속의 시시포스는 어떤 생각과 감정이 의미 있는 바윗돌인지, 하찮은 돌멩이인지 구분하려 오래도록 마음을 들여다본다.
자식들의 죽음이 남긴 저마다의 의미와 무게를 지닌 사실들. 작가가 직시해야할 사실들이 쌓여간다. 아들들이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사실, 부모는 자식이 느끼는 세상의 광대함과 낯섦을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아이를 위해 내린 결정에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 부모는 자식의 목숨을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 사별 후의 시간은 시시포스의 바위가 되고 만다는 사실, 자식들은 죽고 부모는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 이 냉혹하고 견디기 힘든 사실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낯설어진 삶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작가는 쓴다.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에 대해 그렇게 잘 쓰면서 왜 우리를 낳았어?” 작가가 끝내 좋은 답을 내놓지 못했다고 쓴 첫 아들 빈센트의 질문이다. 작가는 둘째 아들 제임스가 죽고 나서야 “고통을 잘 겪어내는 방법을 배울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쓴다. 고통을 겪어낼 가치가 있는 것이 존재하고, 고통과 맺은 관계는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쓴다. 만약 빈센트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 같은 질문을 했다면, 나는 다르게 대답했을 것이라고 쓴다. 과거완료형이 되어버린 무수한 가정문의 세계. 한없이 무력한 세계.
고통에서 더 이상 의미나 목적, 가치, 시비를 찾지 않게 되는 순간. 견디고 견디다, 견디는 것에 더는 힘을 들이지 않게 되는 순간. 버티고 버티다 붙잡고 있던 것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순간. 이름 붙일 수조차 없게 해진 감정들이 풍화되어 사라지는 순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철학적 사변과 언어의 요란함을 넘어, 고통이 자연으로 용해되는 순간은 온다.
그때 “고통은 존재 전체에 스며들고, 더는 저항하지 않게 된다.” 고통 속에 순연해 진다. 아주 잠시라 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