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민 토킹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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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자의 연장으로 지배자의 집을 부술 수 없다”. 오드리 로드의 말이다. 이 한 문장은 거대한 자각이다. 망치와 해머이다. 이 연장은 억압과 착취 위에 세워진 폭력의 세계와 시대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붕괴된 자리에 새로운 세계와 시대를 건설한다. 오드리 로드의 자미와 미리엄 테이브스의 위민 토킹은 저 문장에 대한 증언이며 헌사이다. 두 소설은 저 문장이 내뿜는 주술이 어떻게 폭력적인 한 세계를 해체하고 평등하고 우애로운 세계를 창조하는지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각각의 소설들의 자세한 리뷰는 링크한 블로그리뷰를 참고해주세요. )

 

오드리 로드는 자미를 통해 백인, 남성, 이성애, 가부장 중심의 신화를 거부하고 흑인, 여성, 레즈비언으로서 스스로 신화를 써간다. 기득권의 언어로는 자기 삶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를 그녀는 외면하지 않는다. 그녀는 정면 돌파한다. 신화는 한 사회의 가치를 품은 신성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신화가 배제와 차별을 근간으로 한다면, 그 신화가 수호하는 가치와 신성함은 질문 받고 도전 받아 마땅하다.

 

오드리 로드는 남성 신들의 목소리에 가려 침묵을 강요받았던 여성 신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그에게 여성 신들은 신전에 고이 모셔져 있는 박제된 존재들이 아니다. 애증의 어머니, 신화 속의 신화로 늘 되돌아오는 친구, 생명과 사랑을 나눠준 연인들. 살아 숨 쉬는 여성들이 그의 여신들이다. 함께 웃고 울며 분노하고 체념했던, 다시 함께 일어서고 싸우고, 또 넘어졌던 수많은 여성들. 그가 사랑했고 떠났던, 그를 사랑했고 떠났던 무수한 여성들. 만남과 헤어짐 속에 그를 죽이고 다시 살렸던 여성들. 그들이 그에게 남긴 이야기들, 그들과 함께 했던 이야기들이 그의 신화이다. 왜냐하면, 그 여성들이야말로 그를 살리고, 변화시켰으며 삶의 신비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여신들의 이야기로 충만한 그의 신화는 에로틱한 에너지의 거대한 해류로 생명의 바다를 순환한다. 타인과 시공간을 초월해 생각과 경험, 언어와 몸을 섞는 성애의 에너지가 갖는 힘. 그 힘이 추동하는 삶의 조류. 그는 그 힘을 믿었으며, 그 힘을 온 몸으로 살았다. 책 속의 영원한 영혼으로 우리와 공존하는 지금, 그녀가 바라는 신화는 그런 것이다. 순환을 멈추지 않는 조류의 힘처럼 성애의 힘으로 언제나 다시쓰기를 멈추지 않는 생명, 그 자체인 신화. 이 책 자미가 그 증거이자 우리가 그 목격자이다. 그의 신화는 지금’, ‘여기’, ‘이 사람들을 떠나지 않는다. 그의 신화가 자기와 타인을 살리는 영감들로 충만한 이유이다. 현실의 단단한 힘이 되는 이유다.

 

미리엄 테이브스의 위민 토킹이 소설은 세계를 해석하고 창조하는 연장으로서 언어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언어와 자기 서사의 주권을 갖는 것. 이것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치밀한 이야기로 설득한다. 폐쇄적인 종교 공동체의 성경에 대한 유일한 해석권자는 성직자이다. 신의 언어를 독점적으로 소유한 성직자는 성인 남성, 유소년 남성, 여성, 가축 순으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서열화하고 이들을 지배한다. 폭력을 은폐하고, 기만으로 신도들을 길들인다.

 

경악할 만한 범죄가 일어난 후 피해 여성들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헛간의 볏짚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는다. 최초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주교와 남성의 언어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로 발언하기 시작한다. 성경에 대한 해석권을 누가 갖는가? 자신들은 동물인가? 가축과 얼마나 먼가? 신앙의 근본을 의심한다. 질문하기. 그녀들의 질문이 시작된다. 자신들의 신념 체계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 권위는 믿을 만 한 것인가. 강요된 신념 체계가 그들의 삶을 설명해내지 못하자, 그들은 새로운 질문으로 자신들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자각하기 시작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 정교해진 질문들은 신앙과 삶의 본질을 향해 돌질한다.

 

 

 

겹겹으로 둘러싸였던 억압의 문들을 열어젖히며, 질문들이 날카롭게 세공될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각한다. 기존의 공동체 신념이 그들과 그들 아이들의 안전, 자유, 생각할 권리, 믿음을 지켜 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떠나기로 결심한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떠난다. 공동체에서 강요하는 믿음과 용서, 사랑이 아닌, 그들이 발명해 낼 믿음과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그들은 길 위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녀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에피. 이 회의의 유일한 성인 남성 참석자. 추방자이자 돌아온 자, 그리고 목격자, 기록자로서 초대된 남성. 소설의 초반부 에피는 자살 방법을 찾으러 도서관에 간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여성사서와 짧은 대화를 나눈다. 공동체 신앙이 덧씌운 죄와 벌의 굴레로 방황하다 죽음을 결심한 그에게 여성사서는 그 자신을 용서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특별한 존재를 긍정하라고 얘기한다.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이름으로 폭력과 학대를 은폐했던 공동체의 남성 가부장들이 그를 죄와 벌로 옭매여 죽음으로 내몰았다면, 인간의 언어로 지어진 도서관이라는 장소에서 인간의 지혜를 돌보는 사서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 그에게 죄와 벌로부터의 해방을 얘기해 그를 삶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한다는 이 짧은 에피소드는 얼마나 상징적인가. 아름답고 감동스럽다.

여성 사서와 회의에 참석한 피해 여성들 한명 한명은 이미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여신들이다. 아버지의 연장을 버리고 자신들의 연장으로 미지의 지도 위에 최초의 길을 내는 여신들. 죄와 벌, 용서, 사랑. 기존 아버지의 언어들을 의심하고, 단어들을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하는 여신들. 후대의 아이들을 위해 길에서 죽을 각오로 옛 집을, 옛 언어를, 옛 신을 버리고 스스로 신화가 된 여성들. 신화 쓰기는 글을 읽고 쓰는 능력과 무관하다. 위민 토킹의 여성들은 그녀들의 몸으로, 삶으로 신화를 써간다

 

 

자미위민 토킹은 여성의 자기 신화 쓰기에 대한 이야기,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가는 이야기이다. 이 여성들은 여신의 자격을 남성 지배 질서에 묻지 않는다. 그들은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의 연장을 버리고, 자신들의 연장으로 자신들이 꿈꾸는 세계를 만들어간다. 서로를 살리고, 후대를 살리는 이 여성들의 신화야말로 여러 위기에 처한 지구와 인류를 구할 단서이다. “지배자의 연장으로 지배자의 집을 부술 수 없다수많은 자미들이 나눈 위민 토킹의 시작이자,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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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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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 오드리 로드 



지배자의 연장으로 지배자의 집을 부술 수 없다”. 오드리 로드의 말이다. 이 한 문장은 거대한 자각이다. 망치와 해머이다. 이 연장은 억압과 착취 위에 세워진 폭력의 세계와 시대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붕괴된 자리에 새로운 세계와 시대를 건설한다. 오드리 로드의 자미와 미리엄 테이브스의 위민 토킹은 저 문장에 대한 증언이며 헌사이다. 두 소설은 저 문장이 내뿜는 주술이 어떻게 폭력적인 한 세계를 해체하고 평등하고 우애로운 세계를 창조하는지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각각의 소설들의 자세한 리뷰는 링크한 블로그리뷰를 참고해주세요. )

 

오드리 로드는 자미를 통해 백인, 남성, 이성애, 가부장 중심의 신화를 거부하고 흑인, 여성, 레즈비언으로서 스스로 신화를 써간다. 기득권의 언어로는 자기 삶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를 그녀는 외면하지 않는다. 그녀는 정면 돌파한다. 신화는 한 사회의 가치를 품은 신성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신화가 배제와 차별을 근간으로 한다면, 그 신화가 수호하는 가치와 신성함은 질문 받고 도전 받아 마땅하다.

 

오드리 로드는 남성 신들의 목소리에 가려 침묵을 강요받았던 여성 신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그에게 여성 신들은 신전에 고이 모셔져 있는 박제된 존재들이 아니다. 애증의 어머니, 신화 속의 신화로 늘 되돌아오는 친구, 생명과 사랑을 나눠준 연인들. 살아 숨 쉬는 여성들이 그의 여신들이다. 함께 웃고 울며 분노하고 체념했던, 다시 함께 일어서고 싸우고, 또 넘어졌던 수많은 여성들. 그가 사랑했고 떠났던, 그를 사랑했고 떠났던 무수한 여성들. 만남과 헤어짐 속에 그를 죽이고 다시 살렸던 여성들. 그들이 그에게 남긴 이야기들, 그들과 함께 했던 이야기들이 그의 신화이다. 왜냐하면, 그 여성들이야말로 그를 살리고, 변화시켰으며 삶의 신비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여신들의 이야기로 충만한 그의 신화는 에로틱한 에너지의 거대한 해류로 생명의 바다를 순환한다. 타인과 시공간을 초월해 생각과 경험, 언어와 몸을 섞는 성애의 에너지가 갖는 힘. 그 힘이 추동하는 삶의 조류. 그는 그 힘을 믿었으며, 그 힘을 온 몸으로 살았다. 책 속의 영원한 영혼으로 우리와 공존하는 지금, 그녀가 바라는 신화는 그런 것이다. 순환을 멈추지 않는 조류의 힘처럼 성애의 힘으로 언제나 다시쓰기를 멈추지 않는 생명, 그 자체인 신화. 이 책 자미가 그 증거이자 우리가 그 목격자이다. 그의 신화는 지금’, ‘여기’, ‘이 사람들을 떠나지 않는다. 그의 신화가 자기와 타인을 살리는 영감들로 충만한 이유이다. 현실의 단단한 힘이 되는 이유다.

 

미리엄 테이브스의 위민 토킹이 소설은 세계를 해석하고 창조하는 연장으로서 언어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언어와 자기 서사의 주권을 갖는 것. 이것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것을 이 소설은 치밀한 이야기로 설득한다. 폐쇄적인 종교 공동체의 성경에 대한 유일한 해석권자는 성직자이다. 신의 언어를 독점적으로 소유한 성직자는 성인 남성, 유소년 남성, 여성, 가축 순으로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서열화하고 이들을 지배한다. 폭력을 은폐하고, 기만으로 신도들을 길들인다.

 

경악할 만한 범죄가 일어난 후 피해 여성들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헛간의 볏짚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는다. 최초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주교와 남성의 언어가 아닌, 자신들의 언어로 발언하기 시작한다. 성경에 대한 해석권을 누가 갖는가? 자신들은 동물인가? 가축과 얼마나 먼가? 신앙의 근본을 의심한다. 질문하기. 그녀들의 질문이 시작된다. 자신들의 신념 체계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 권위는 믿을 만 한 것인가. 강요된 신념 체계가 그들의 삶을 설명해내지 못하자, 그들은 새로운 질문으로 자신들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자각하기 시작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 정교해진 질문들은 신앙과 삶의 본질을 향해 돌질한다.

 

 

 

겹겹으로 둘러싸였던 억압의 문들을 열어젖히며, 질문들이 날카롭게 세공될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각한다. 기존의 공동체 신념이 그들과 그들 아이들의 안전, 자유, 생각할 권리, 믿음을 지켜 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떠나기로 결심한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떠난다. 공동체에서 강요하는 믿음과 용서, 사랑이 아닌, 그들이 발명해 낼 믿음과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그들은 길 위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녀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기록하는 에피. 이 회의의 유일한 성인 남성 참석자. 추방자이자 돌아온 자, 그리고 목격자, 기록자로서 초대된 남성. 소설의 초반부 에피는 자살 방법을 찾으러 도서관에 간다. 거기서 그는 우연히 여성사서와 짧은 대화를 나눈다. 공동체 신앙이 덧씌운 죄와 벌의 굴레로 방황하다 죽음을 결심한 그에게 여성사서는 그 자신을 용서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특별한 존재를 긍정하라고 얘기한다.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이름으로 폭력과 학대를 은폐했던 공동체의 남성 가부장들이 그를 죄와 벌로 옭매여 죽음으로 내몰았다면, 인간의 언어로 지어진 도서관이라는 장소에서 인간의 지혜를 돌보는 사서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 그에게 죄와 벌로부터의 해방을 얘기해 그를 삶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한다는 이 짧은 에피소드는 얼마나 상징적인가. 아름답고 감동스럽다.

여성 사서와 회의에 참석한 피해 여성들 한명 한명은 이미 자신들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여신들이다. 아버지의 연장을 버리고 자신들의 연장으로 미지의 지도 위에 최초의 길을 내는 여신들. 죄와 벌, 용서, 사랑. 기존 아버지의 언어들을 의심하고, 단어들을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하는 여신들. 후대의 아이들을 위해 길에서 죽을 각오로 옛 집을, 옛 언어를, 옛 신을 버리고 스스로 신화가 된 여성들. 신화 쓰기는 글을 읽고 쓰는 능력과 무관하다. 위민 토킹의 여성들은 그녀들의 몸으로, 삶으로 신화를 써간다

 

 

자미위민 토킹은 여성의 자기 신화 쓰기에 대한 이야기,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가는 이야기이다. 이 여성들은 여신의 자격을 남성 지배 질서에 묻지 않는다. 그들은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의 연장을 버리고, 자신들의 연장으로 자신들이 꿈꾸는 세계를 만들어간다. 서로를 살리고, 후대를 살리는 이 여성들의 신화야말로 여러 위기에 처한 지구와 인류를 구할 단서이다. “지배자의 연장으로 지배자의 집을 부술 수 없다수많은 자미들이 나눈 위민 토킹의 시작이자,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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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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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 오드리 로드 / 송섬별 / 디플롯

삶에 대한 앎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오드리 로드는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그 앎은 ‘성애의 힘’에서 온다고 말한다. 내 과거와 현재 이해하기, 내 미래의 밑그림 그리기는 ‘성애의 힘’, 즉 관계의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오드리 로드의 성애의 힘에 공감한다. 말을 주고받는 것, 경험을 섞는 것, 생각을 나눈다는 것, 삶을 섞는 것은 에로틱하다. 이런 이유로 관계가 깊어지면, 우정 또한 에로틱한다. 이 책 ‘자미’는 흑인, 여성, 레즈비언, 무산계급의 오드리 로드를 페미니스트 이론가, 활동가, 시인으로 거듭거듭 재탄생시킨 추동력인 그 성애의 여정, 관계의 여정을 본인의 육성으로 증언한다.

오드리 로드는 왜 기존 회고록이 아닌 자전 신화라는 생소한 형태를 이야기의 틀로 택했을까? 왜 그는 신화라는 신비로운 형태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여성들, 그들과의 사랑을 기록했을까?

시인인 오드르 로드에게 사랑이란 그것이 과거에 속한 일이라 해도, 회고록이라는 과거 시제로 묶일 수 없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그의 과거 모든 사랑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그를 생성, 변화시킨다. 기억과 글쓰기를 통해 그의 연인들은 여신들로 재탄생한다. 그 여신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그 앞에 출몰하며 그에게 말을 걸고, 함께 걷기를 청한다.

기억과 현재의 연금술로 끊임없이 재탄생 중인 그의 여신들은 그 또한 재생시킨다. 이 신비로운 재생과 성장의 과정은 회고록이라는 딱딱한 형식에 담길 수 없다. 오직 신화만이, 오드리 로드와 그의 여신들과의 영감으로 충만한 이야기들을 담을 수 있다. 이 대화들은 성애의 힘으로 출렁이며, 삶에 대한 통찰로 너울져 밀려와 결국 정치적 각성과 실천의 해안에 도달한다.

오드리 로드를 전사로 끊임없이 재탄생시키는 산모들은 이렇게 그의 여신들이다. 이 변화무상한 생성의 파노라마를 어떻게 회고록이라는 고답적인 형식에 담을 수 있겠는가. 여신들은 신화 속에서 맘껏 분열하고 폭발하고 발산하며 그 에너지를 독자들에게까지 전달한다.

애증의 기록인 어머니, 신화 속의 신화가 된 제니, 열정의 여신 진저, 관계의 실상을 공유한 비, 지의 여신 유도라, 영원까지 예감했던 운명 같았던 뮤리엘, 차고 기우는 삶과 성애의 리듬을 비로소 알게 해준 키티. 그리고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가장 제정신으로 벌써 오래전 그녀들에게 천기를 누설했던 엘라. 그리고 레아, 다이앤, 펠리시아, 폴리, 린.. 오드리 로드의 살갗이 되어준 사람들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타인의 흔적으로 주조된 나라니. 시시한가. 오드리 로드가 타인을 기리고, 그들의 흔적을 기리고, 그리하여 자신을 기리기 위해 쓴 이 ‘자미’라는 신화를 읽어보면, 타인의 흔적으로 이루어진 주체가 이렇게 풍요로운 체취와 다채로운 색감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타인’과 ‘그 흔적들’을 오드리 로드처럼 환대해야만, 그것들로 이뤄진 나자신도 비로소 환대할 수 있다. 타인과 맺는 성애의 힘은 나 자신과 맺는 성애의 힘으로 전환된다. 자기를, 자기 생을 사랑하고 싶은가, 그럼 먼저 타인을, 타인의 삶을 향해 문을 활짝 열라고 오드리 로드는 이 책 ‘자미’로 주문한다. 그렇게 열린 문으로 타인과 함께 미지의 나 또한 방문할 것이다. 문지방 바로 밖에 서 있는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내 삶은 점점 더 여성들의 터와 다리가 되어갔다’ 타인들의 장소가 된 내 삶이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오래된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새 생활. 내게 본질을 넣어준 여자들을 언어로써 다시금 창조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신들을 창조하고, 각자의 신화를 만들 수 있다고, 그 신화의 주인공이 되라고 ‘자미’는 에로틱한 주술로 노래한다.

내가 집이 되는 것. 타인의 장소가 되어 나도 타인도 다시 태어나는 것. 이 개방적인 만남의 순환. 이로 인해 풍요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영감으로 가득한 신화가 바로 자미이다.

진정한 만남은 실로 에로틱하여 떫고, 달디 달고, 쓰고, 시큼하고 때로는 거의 통증에 가까울 정도로 달콤하다. 맛을 전혀 예상 못할 열대 과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기 직전, 이 맛은 나의 어디까지 자극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만으로도 삶은 출렁이기 시작한다. 생명으로 넘실거리는 삶을 원하는가. 오드리 로드가 전하는 자미의 신화는 생명의 과즙으로 흥건한 금단의 열매를 쪼개 당신에게 건낸다. 맛보시라. 삶이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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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민 토킹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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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민 토킹 / 미리엄 테이브스 / 박산호 / 은행나무



메노파 공동체에서 추방된 후 가족이 해체되어 떠돌다 감옥까지 가게 된 에프. 출옥 후 자살할 방법을 찾기 위해 간 도서관에서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사서이며 여성이다. 공동체 신앙의 그늘 아래 청년기를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에게 사서는 그는 특별난 사람이며,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한다.

참 흥미로운 대목이다. 가부장적 남성 신이 죄와 벌로 신도들을 다스렸다면, 인간의 언어로 지은 도서관이라는 장소에서 인간 언어를 돌보는 여성 사서가 그에게 용서와 존재의 존엄함을 이야기하니 말이다.

성경에 대한 독단적 해석의 권력이 지배했던 중세가 저물고 문자와 서적의 공급이 죄와 벌로 상징되던 신앙의 감옥으로터 인간을 해방시킨 후 수세기가 지났음에도, 메노파 공동체는 여전히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억압한다.

그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으나 아직도 죄라는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 에프에게 죄를 벗으라고 말하는 여자 사서는 가부장적 남성 신에 대항하는 여성 신이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언어로 축적된 사유의 궤적을 관리하는 여성 신. 이 여성 신은 ‘존재하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는 에프에게 존재를 긍정하라고 말한다.

책의 도입 부분 에프와 사서와의 이 짧은 대화는 이 소설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죄와 벌이라는 중세적 가치에 묶여 있는 이들은 어떻게 자신들에게 가해진 죄를 해석할 것이며, 가해자들에게 죄에 합당한 처벌을 어떻게 내릴 것인가.

이 소설은 메노파 공동체의 강간 피해 여성들이 범죄 이후의 삶을 도모하기 위해 헛간 다락방에 모여 주고 받는 이야기의 기록지이다. 폐쇄적 신앙 공동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행된 남성 집단에 의한 집단적 성폭력은 종교와 죄, 벌이라는 문제와 함께, 성폭력과 관련된 주요 이슈들을 전면에 드러낸다. 성폭력 관련 원탁 회의장에 참석해 테이블 한 귀퉁이에 앉아 말없이 열띤 토론을 듣다 온 기분이다. 오가는 이야기들이 여전히 너무나 시의성이 있어 한마리라도 놓칠세라 집중해서 읽게 된다.

처음으로 남성 신도, 남성도 없는 공간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전통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이름으로 오랜 동안 자신들을 억압했던 폭력들을 낱낱이 분해해 가는 여성들. 볏짚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둘러앉은 그녀들을 수없이 많은 질문의 문들이 에워싸기 시작한다. 하나의 질문의 문을 열고 나가면, 그 질문과 연결되는 또 다른 문이 열린다. 그 문은 또 다른 문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그녀들은 겹겹으로 둘러싸인 질문의 문들을 지금까지 폭력의 장소였던 자신들의 몸으로 스스로 통과해간다.

종교적 신념 아래서 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종교가 죄책감으로 어떻게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가, 종교 공동체에서 피해자는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용서란 무엇인가, 가해자의 사과 없는 용서란 가능한가. 완벽한 감시와 폐쇄로 지배와 억압을 피해자가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피해사실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본능적 앎을 언어가 없을 때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자기 서사(내러티브)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익숙한 장소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한가. 싸움의 목적은 무엇이 되야할까. (파괴하기 위해 싸울 것인가? 얻기 위해 싸울 것인가?), 싸움의 대상은 어떻게 한정해야 할까. (메노파의 모든 남성인가? 메노파를 지배하는 특정 이데올로기인가(기독교적 가부장제) 돌봄의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가? 여성들의 안전과 남성들의 갱생 가능성 중 선택해야 한다면?, 신이 전능하다면 왜 강간을 막지 않았을까 (신앙에 대한 의심). 폐쇄적 종교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동력은? (고립과 스토리텔링, 잔인함) 기존 종교를 토대로 새로운 종교 만들기가 가능한가? 기존의 가족, 집, 안정, 안전이 사랑과 등치될 수 있는가? 이때 사랑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피해 이후 미래를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사건을 바라보기 위한, 즉 관점을 갖기 위한 거리두기가 왜 중요한가. 여성들은 이 공동체의 일원이었을까? (가축, 상품으로서의 자신들을 자각), 성경을 해석할 권리는 누가 갖는가. 성폭력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은폐했던 남성들에게는 죄가 없을까. 지속적인 성폭력의 가장 큰 배후는 무엇인가? 권위란 무엇인가? 성폭력 가해자들과 은폐자들 또한 메노파 교단의 피해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안정이 사랑이고, 사랑이 안정일까?, 교단 내에서 서열관계는 여성 지배를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권력 의지는 본능일까? 진보와 진화의 목적은 현세대를 위한 것일까. 괴로움과 죄책감은 어떻게 다른가? 도망치는 것과 떠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피해자다움이란 어떤 것일까? 왜 여성들은 추방자이자 남성인, 그리고 비밀을 간직한 에프에게 회의록을 작성하라고 했을까?

최초로 개인으로서 공동체와 미래를 위해 말하기 시작하는 여성들. 이어지는, 이어지는 질문들. 질문이 거듭될수록 질문은 정교해지고 투명해진다. 질문이 얇은 막처럼 세밀해질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자각한다. 물리적으로 메노파 공동체를 떠나기 위해 지도가 필요하듯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종교 공동체와 남성들을 떠나기 위해서도 그들에게 지도가 필요하다.

그 지도는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간다. 끝없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통해 그들은 현재의 좌표를 확인하고 걸어야 할 길들을 예측하며, 당도해야 할 장소를 설정해간다. 이 용감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지도를 만드는 힘 자체이자 지도 그 자체이다. 그들은 말하며 미지의 지도 위에 길을 만들어간다. 그 지도 위를 걸으며 미지의 미래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이 위민 토킹인 이유다. 말하는 그들은 이미 여신들이며, 그들의 회의록은 이미 신화이다.

@ehbook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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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그레이션 - 북극제비갈매기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서
샬롯 맥커너히 지음, 윤도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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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그레이션 / 샬롯 맥거너히

지구의, 생명의 경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 땅과 하늘, 바다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지쳐 이 곳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의 내면은 어떤 것일까. 인간들이 펼쳐놓은 불행들. 그것에 대한 민감한 감각 때문에 이미 풍화된 마음. 떠난 이들이 남긴 상실과 트라우마, 죄책감, 그리고 고립감, 자기혐오, 자기 파괴.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인간 세계와의 불협화음.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마이그레이션’의 프래니가 이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프래니가 지키고 싶어 하는 북극제비갈매기를 따라 바다를 항해하며 시작된다.

새장은 새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새장은 인간 중심적인 구조물이다. ‘필요’하다면 ‘본능’을 길들이는 것이 왜 나쁜가. 의문을 허용치 않는 이 반문. 이 의문이 가둔 것은 새만이 아니다. 21세기의 인간들이 자유의 수단이라며 향유하는 창궐한 자본주의와 디지털 기술 또한 보이지 않는 새장이다. 프래니와 사가니호의 선원들은 이 새장의 보이지 않는 창살들을 보는 사람들이다. 자연을 길들이고, 착취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것은 동식물뿐만이 아니라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자유(쇼핑몰에서 물건을 선택할 자유와는 다른 자유)와 본능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프래니 같은 이들에게 이 세계는 거대한 새장이다. 하늘을 날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어디 새뿐이겠는가. 인간들도 또 다른 의미로 날지 못할 때 생명력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프래니와 선원들은 육지에서 바다로 이주해온 이들이다. 바다 위에서의 삶은 프래니의 말처럼 다른 방식의 삶을 제공하니까.

“사가니호에 오른 선원들은 여느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처럼 다양하고 서로 다르지만, 나는 이들이, 여기 있는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똑같다고 말할 수 있다. 육지에서 이들의 삶은 어딘가 비어 있었고, 그래서 이들은 답을 찾아 나섰으니까. 그게 뭐든 간에 각자의 답을 찾았다고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다. 육지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삶의 다른 방식을 제공하는 이곳 바다에서의 삶을 사랑하고, 이 배를 사랑하고, 또 서로 다투고 싸우는 만큼이나 서로를 사랑하기에. 그리고 언젠가 이런 생활도 끝날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는 모른 채, 각자의 방식으로 슬퍼하고 있기에” p 140

북극제비갈매기를 따라 남극을 향해 나아가는 사가니호 위의 프래니는 미지의 미래를 향해 이주하는 동시에 4년 전, 8년 전, 12년 전, 19년 전으로, 그렇게 과거로도 하염없이 이주 중이다. 책 ‘MIGRATION'(이주,이동)은 생존을 위해 본능에 따라 이주 중인 새들의 이야기이자 역시 같은 이유로 이주 중인 프래니로 대표되는 인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엄마가 말한 삶을 살게 할 단서들을 찾기 위해 그녀는 과거로, 과거로 거듭 떠난다. 그 과거에는 어린 그녀가 어찌할 수 없었던 상실, 슬픔, 불가해한 부적응과 고독, 트라우마, 그리고 깨닫지 못했던 사랑이 있다.

삶의 발목을 잡던 그것들이 잘 들여다보고 소화해 내면, 삶을 해방시켜 주는 단서가 되는 아이러니를 이 책은 정교하게 짜여 진 이야기 망으로 잘 드러낸다. 마치 북극제비갈매기가 물어다 준 것같이 느껴지는, 과거에서 찾아온 삶의 단서들을 양식 삼아 그녀는 미래를 향해 이주 중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과거로, 동시에 미래를 향해 동시에 이주해야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안정과 정착을 견딜 수 없어 늘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과 그런 그를 사랑하는 사람. 이 두 사람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누군가 양보해야 해결될 문제일까. 떠나야만 숨 쉴 수 있는 사람과 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 사이의 허공. 하지만 이 둘 모두 새장을 열어 새를 날려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새장을 열어준 그 손길과 눈길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것 같지만 너무나 닮은 두 사람, 프래니와 나일. 북극제비갈매기를 이해했던, 사랑했던 연인들.

이주는 생존을 위한 본능이자, 강요된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이 선택한 삶으로의 적극적인 이동이다. 그리고 삶의 목적에 따라 이주의 이유와 목적지는 변경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에서 이주는 애도의 한 방식이다. 누군가를 애도하기 위해 자기 몫의 남겨진 삶을 남김 없어 살아내는 것. 이 이상의 애도가 있을까.

거의 모든 동물이 멸종된 세계에서 과학자들은 살아남은 몇 종을 보호하기 위해 토론하지만, 역시 지지부진하고 상충되는 의견들은 흥미롭다. 바다 생물의 멸종과 어업에 관한 엇갈리는 입장들, 절박한 상황에서도 여전한 기후 변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기후 변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위선. 몇몇 사람의 뒤 늦은 후회와 각성. 여성에 대한 폭력.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들이다.

인간들은 시혜적인 입장으로 자연과 동식물들을 호명하는데 익숙하다. 기후 위기 한복판에서도 자연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이야기 속에서 북극제비갈매기는 그들의 생존 본능 하나로 이주를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의 인물들은 이 작은 새에게 개입하지 않는다. (위치 추적기를 달기는 한다.) 그들을 따라가고, 지켜볼 뿐이다. 나일의 말처럼 변화된 환경에 동식물들을 적응시킬 것이 아니라 적응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인간이 하던 일(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여행, 더 많은 계발과 발전)을 하지 않을 때 기후 변화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다. 멸종되는 건 인간 외 동물들만이 아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인재로, 자의적으로. 그 사라짐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기술 만능 자본주의의 인간이란 종이 대거 이중 중인 세계는 살만한 곳인가? 이 거대한 이주 앞에 프래니와 선원들 같은 이들은 어디로 이주해야 할까. 이들에게 너무 큰 동질감을 느끼는 나 같은 사람들은? 북극제비갈매기는 언제까지 본능대로 이주하며 지구상에 머물 수 있을까.

책을 펴고 꼬박 밤을 새워 다 읽었다. 뒤가 궁금해서 덮을 수 없는 책. 그만큼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힘이 대단하다. 하지만 읽는 동안 자주 책을 덮고 쉬어야 했다. 프래니의 심리 묘사가 매우 세밀하고 설득력 있어 프래니의 마음에 자주 겹쳐지는 내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다 읽고 나니 아침 7시, 슬펐다. 첫 새가 발작적으로 첫 울음을 울고 난 뒤 집 앞 작은 동산의 새들이 이미 시끄럽게 아침 수다들을 나누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 아침에 저 청량한 지저귐을 들을 수 없다고. 상념 한 스푼 더. 그리고 오랫 동안 이 책을 책상 위 한편에 그대로 두었다. 마음이 아파서. 뭐라고 쓸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눈길이 가면 마음이... 그리고 오늘 다시 펼쳤다. 여전히 아프군. 수 없이 그어진 밑줄이 나에게 수없는 말을 걸어오는, 이미 친구가 된 프래니와 나일, 에스니, 샤무엘... 그리고 많은 이들. 그러니 나에겐 우정이 생긴 참 좋은 책이다. 인용하고 싶은 구절들이 많지만,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읽으실 분들을 위해 아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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