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민 토킹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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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민 토킹 / 미리엄 테이브스 / 박산호 / 은행나무



메노파 공동체에서 추방된 후 가족이 해체되어 떠돌다 감옥까지 가게 된 에프. 출옥 후 자살할 방법을 찾기 위해 간 도서관에서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사서이며 여성이다. 공동체 신앙의 그늘 아래 청년기를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에게 사서는 그는 특별난 사람이며,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한다.

참 흥미로운 대목이다. 가부장적 남성 신이 죄와 벌로 신도들을 다스렸다면, 인간의 언어로 지은 도서관이라는 장소에서 인간 언어를 돌보는 여성 사서가 그에게 용서와 존재의 존엄함을 이야기하니 말이다.

성경에 대한 독단적 해석의 권력이 지배했던 중세가 저물고 문자와 서적의 공급이 죄와 벌로 상징되던 신앙의 감옥으로터 인간을 해방시킨 후 수세기가 지났음에도, 메노파 공동체는 여전히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억압한다.

그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으나 아직도 죄라는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 에프에게 죄를 벗으라고 말하는 여자 사서는 가부장적 남성 신에 대항하는 여성 신이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언어가 아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언어로 축적된 사유의 궤적을 관리하는 여성 신. 이 여성 신은 ‘존재하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는 에프에게 존재를 긍정하라고 말한다.

책의 도입 부분 에프와 사서와의 이 짧은 대화는 이 소설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죄와 벌이라는 중세적 가치에 묶여 있는 이들은 어떻게 자신들에게 가해진 죄를 해석할 것이며, 가해자들에게 죄에 합당한 처벌을 어떻게 내릴 것인가.

이 소설은 메노파 공동체의 강간 피해 여성들이 범죄 이후의 삶을 도모하기 위해 헛간 다락방에 모여 주고 받는 이야기의 기록지이다. 폐쇄적 신앙 공동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자행된 남성 집단에 의한 집단적 성폭력은 종교와 죄, 벌이라는 문제와 함께, 성폭력과 관련된 주요 이슈들을 전면에 드러낸다. 성폭력 관련 원탁 회의장에 참석해 테이블 한 귀퉁이에 앉아 말없이 열띤 토론을 듣다 온 기분이다. 오가는 이야기들이 여전히 너무나 시의성이 있어 한마리라도 놓칠세라 집중해서 읽게 된다.

처음으로 남성 신도, 남성도 없는 공간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전통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이름으로 오랜 동안 자신들을 억압했던 폭력들을 낱낱이 분해해 가는 여성들. 볏짚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둘러앉은 그녀들을 수없이 많은 질문의 문들이 에워싸기 시작한다. 하나의 질문의 문을 열고 나가면, 그 질문과 연결되는 또 다른 문이 열린다. 그 문은 또 다른 문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그녀들은 겹겹으로 둘러싸인 질문의 문들을 지금까지 폭력의 장소였던 자신들의 몸으로 스스로 통과해간다.

종교적 신념 아래서 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종교가 죄책감으로 어떻게 피해자들의 입을 막는가, 종교 공동체에서 피해자는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자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용서란 무엇인가, 가해자의 사과 없는 용서란 가능한가. 완벽한 감시와 폐쇄로 지배와 억압을 피해자가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피해사실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본능적 앎을 언어가 없을 때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자기 서사(내러티브)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익숙한 장소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한가. 싸움의 목적은 무엇이 되야할까. (파괴하기 위해 싸울 것인가? 얻기 위해 싸울 것인가?), 싸움의 대상은 어떻게 한정해야 할까. (메노파의 모든 남성인가? 메노파를 지배하는 특정 이데올로기인가(기독교적 가부장제) 돌봄의 주체는 누구여야 하는가? 여성들의 안전과 남성들의 갱생 가능성 중 선택해야 한다면?, 신이 전능하다면 왜 강간을 막지 않았을까 (신앙에 대한 의심). 폐쇄적 종교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동력은? (고립과 스토리텔링, 잔인함) 기존 종교를 토대로 새로운 종교 만들기가 가능한가? 기존의 가족, 집, 안정, 안전이 사랑과 등치될 수 있는가? 이때 사랑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피해 이후 미래를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사건을 바라보기 위한, 즉 관점을 갖기 위한 거리두기가 왜 중요한가. 여성들은 이 공동체의 일원이었을까? (가축, 상품으로서의 자신들을 자각), 성경을 해석할 권리는 누가 갖는가. 성폭력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그것을 은폐했던 남성들에게는 죄가 없을까. 지속적인 성폭력의 가장 큰 배후는 무엇인가? 권위란 무엇인가? 성폭력 가해자들과 은폐자들 또한 메노파 교단의 피해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안정이 사랑이고, 사랑이 안정일까?, 교단 내에서 서열관계는 여성 지배를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권력 의지는 본능일까? 진보와 진화의 목적은 현세대를 위한 것일까. 괴로움과 죄책감은 어떻게 다른가? 도망치는 것과 떠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피해자다움이란 어떤 것일까? 왜 여성들은 추방자이자 남성인, 그리고 비밀을 간직한 에프에게 회의록을 작성하라고 했을까?

최초로 개인으로서 공동체와 미래를 위해 말하기 시작하는 여성들. 이어지는, 이어지는 질문들. 질문이 거듭될수록 질문은 정교해지고 투명해진다. 질문이 얇은 막처럼 세밀해질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자각한다. 물리적으로 메노파 공동체를 떠나기 위해 지도가 필요하듯 기만적이고 폭력적인 종교 공동체와 남성들을 떠나기 위해서도 그들에게 지도가 필요하다.

그 지도는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간다. 끝없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통해 그들은 현재의 좌표를 확인하고 걸어야 할 길들을 예측하며, 당도해야 할 장소를 설정해간다. 이 용감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지도를 만드는 힘 자체이자 지도 그 자체이다. 그들은 말하며 미지의 지도 위에 길을 만들어간다. 그 지도 위를 걸으며 미지의 미래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소설의 제목이 위민 토킹인 이유다. 말하는 그들은 이미 여신들이며, 그들의 회의록은 이미 신화이다.

@ehbook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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