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미 - 내 이름의 새로운 철자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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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 오드리 로드 / 송섬별 / 디플롯

삶에 대한 앎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오드리 로드는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그 앎은 ‘성애의 힘’에서 온다고 말한다. 내 과거와 현재 이해하기, 내 미래의 밑그림 그리기는 ‘성애의 힘’, 즉 관계의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오드리 로드의 성애의 힘에 공감한다. 말을 주고받는 것, 경험을 섞는 것, 생각을 나눈다는 것, 삶을 섞는 것은 에로틱하다. 이런 이유로 관계가 깊어지면, 우정 또한 에로틱한다. 이 책 ‘자미’는 흑인, 여성, 레즈비언, 무산계급의 오드리 로드를 페미니스트 이론가, 활동가, 시인으로 거듭거듭 재탄생시킨 추동력인 그 성애의 여정, 관계의 여정을 본인의 육성으로 증언한다.

오드리 로드는 왜 기존 회고록이 아닌 자전 신화라는 생소한 형태를 이야기의 틀로 택했을까? 왜 그는 신화라는 신비로운 형태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여성들, 그들과의 사랑을 기록했을까?

시인인 오드르 로드에게 사랑이란 그것이 과거에 속한 일이라 해도, 회고록이라는 과거 시제로 묶일 수 없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그의 과거 모든 사랑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그를 생성, 변화시킨다. 기억과 글쓰기를 통해 그의 연인들은 여신들로 재탄생한다. 그 여신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그 앞에 출몰하며 그에게 말을 걸고, 함께 걷기를 청한다.

기억과 현재의 연금술로 끊임없이 재탄생 중인 그의 여신들은 그 또한 재생시킨다. 이 신비로운 재생과 성장의 과정은 회고록이라는 딱딱한 형식에 담길 수 없다. 오직 신화만이, 오드리 로드와 그의 여신들과의 영감으로 충만한 이야기들을 담을 수 있다. 이 대화들은 성애의 힘으로 출렁이며, 삶에 대한 통찰로 너울져 밀려와 결국 정치적 각성과 실천의 해안에 도달한다.

오드리 로드를 전사로 끊임없이 재탄생시키는 산모들은 이렇게 그의 여신들이다. 이 변화무상한 생성의 파노라마를 어떻게 회고록이라는 고답적인 형식에 담을 수 있겠는가. 여신들은 신화 속에서 맘껏 분열하고 폭발하고 발산하며 그 에너지를 독자들에게까지 전달한다.

애증의 기록인 어머니, 신화 속의 신화가 된 제니, 열정의 여신 진저, 관계의 실상을 공유한 비, 지의 여신 유도라, 영원까지 예감했던 운명 같았던 뮤리엘, 차고 기우는 삶과 성애의 리듬을 비로소 알게 해준 키티. 그리고 제정신이 아니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가장 제정신으로 벌써 오래전 그녀들에게 천기를 누설했던 엘라. 그리고 레아, 다이앤, 펠리시아, 폴리, 린.. 오드리 로드의 살갗이 되어준 사람들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다. 타인의 흔적으로 주조된 나라니. 시시한가. 오드리 로드가 타인을 기리고, 그들의 흔적을 기리고, 그리하여 자신을 기리기 위해 쓴 이 ‘자미’라는 신화를 읽어보면, 타인의 흔적으로 이루어진 주체가 이렇게 풍요로운 체취와 다채로운 색감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타인’과 ‘그 흔적들’을 오드리 로드처럼 환대해야만, 그것들로 이뤄진 나자신도 비로소 환대할 수 있다. 타인과 맺는 성애의 힘은 나 자신과 맺는 성애의 힘으로 전환된다. 자기를, 자기 생을 사랑하고 싶은가, 그럼 먼저 타인을, 타인의 삶을 향해 문을 활짝 열라고 오드리 로드는 이 책 ‘자미’로 주문한다. 그렇게 열린 문으로 타인과 함께 미지의 나 또한 방문할 것이다. 문지방 바로 밖에 서 있는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내 삶은 점점 더 여성들의 터와 다리가 되어갔다’ 타인들의 장소가 된 내 삶이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오래된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새 생활. 내게 본질을 넣어준 여자들을 언어로써 다시금 창조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신들을 창조하고, 각자의 신화를 만들 수 있다고, 그 신화의 주인공이 되라고 ‘자미’는 에로틱한 주술로 노래한다.

내가 집이 되는 것. 타인의 장소가 되어 나도 타인도 다시 태어나는 것. 이 개방적인 만남의 순환. 이로 인해 풍요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영감으로 가득한 신화가 바로 자미이다.

진정한 만남은 실로 에로틱하여 떫고, 달디 달고, 쓰고, 시큼하고 때로는 거의 통증에 가까울 정도로 달콤하다. 맛을 전혀 예상 못할 열대 과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기 직전, 이 맛은 나의 어디까지 자극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만으로도 삶은 출렁이기 시작한다. 생명으로 넘실거리는 삶을 원하는가. 오드리 로드가 전하는 자미의 신화는 생명의 과즙으로 흥건한 금단의 열매를 쪼개 당신에게 건낸다. 맛보시라. 삶이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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