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그레이션 - 북극제비갈매기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서
샬롯 맥커너히 지음, 윤도일 옮김 / 잔(도서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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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그레이션 / 샬롯 맥거너히

지구의, 생명의 경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 땅과 하늘, 바다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지쳐 이 곳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의 내면은 어떤 것일까. 인간들이 펼쳐놓은 불행들. 그것에 대한 민감한 감각 때문에 이미 풍화된 마음. 떠난 이들이 남긴 상실과 트라우마, 죄책감, 그리고 고립감, 자기혐오, 자기 파괴.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한 인간 세계와의 불협화음.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마이그레이션’의 프래니가 이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프래니가 지키고 싶어 하는 북극제비갈매기를 따라 바다를 항해하며 시작된다.

새장은 새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새장은 인간 중심적인 구조물이다. ‘필요’하다면 ‘본능’을 길들이는 것이 왜 나쁜가. 의문을 허용치 않는 이 반문. 이 의문이 가둔 것은 새만이 아니다. 21세기의 인간들이 자유의 수단이라며 향유하는 창궐한 자본주의와 디지털 기술 또한 보이지 않는 새장이다. 프래니와 사가니호의 선원들은 이 새장의 보이지 않는 창살들을 보는 사람들이다. 자연을 길들이고, 착취하는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것은 동식물뿐만이 아니라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자유(쇼핑몰에서 물건을 선택할 자유와는 다른 자유)와 본능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프래니 같은 이들에게 이 세계는 거대한 새장이다. 하늘을 날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어디 새뿐이겠는가. 인간들도 또 다른 의미로 날지 못할 때 생명력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프래니와 선원들은 육지에서 바다로 이주해온 이들이다. 바다 위에서의 삶은 프래니의 말처럼 다른 방식의 삶을 제공하니까.

“사가니호에 오른 선원들은 여느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처럼 다양하고 서로 다르지만, 나는 이들이, 여기 있는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똑같다고 말할 수 있다. 육지에서 이들의 삶은 어딘가 비어 있었고, 그래서 이들은 답을 찾아 나섰으니까. 그게 뭐든 간에 각자의 답을 찾았다고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다. 육지에서 이주해 온 이들은 삶의 다른 방식을 제공하는 이곳 바다에서의 삶을 사랑하고, 이 배를 사랑하고, 또 서로 다투고 싸우는 만큼이나 서로를 사랑하기에. 그리고 언젠가 이런 생활도 끝날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는 모른 채, 각자의 방식으로 슬퍼하고 있기에” p 140

북극제비갈매기를 따라 남극을 향해 나아가는 사가니호 위의 프래니는 미지의 미래를 향해 이주하는 동시에 4년 전, 8년 전, 12년 전, 19년 전으로, 그렇게 과거로도 하염없이 이주 중이다. 책 ‘MIGRATION'(이주,이동)은 생존을 위해 본능에 따라 이주 중인 새들의 이야기이자 역시 같은 이유로 이주 중인 프래니로 대표되는 인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엄마가 말한 삶을 살게 할 단서들을 찾기 위해 그녀는 과거로, 과거로 거듭 떠난다. 그 과거에는 어린 그녀가 어찌할 수 없었던 상실, 슬픔, 불가해한 부적응과 고독, 트라우마, 그리고 깨닫지 못했던 사랑이 있다.

삶의 발목을 잡던 그것들이 잘 들여다보고 소화해 내면, 삶을 해방시켜 주는 단서가 되는 아이러니를 이 책은 정교하게 짜여 진 이야기 망으로 잘 드러낸다. 마치 북극제비갈매기가 물어다 준 것같이 느껴지는, 과거에서 찾아온 삶의 단서들을 양식 삼아 그녀는 미래를 향해 이주 중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과거로, 동시에 미래를 향해 동시에 이주해야 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안정과 정착을 견딜 수 없어 늘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과 그런 그를 사랑하는 사람. 이 두 사람은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누군가 양보해야 해결될 문제일까. 떠나야만 숨 쉴 수 있는 사람과 사랑하는 이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 사이의 허공. 하지만 이 둘 모두 새장을 열어 새를 날려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새장을 열어준 그 손길과 눈길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것 같지만 너무나 닮은 두 사람, 프래니와 나일. 북극제비갈매기를 이해했던, 사랑했던 연인들.

이주는 생존을 위한 본능이자, 강요된 삶의 방식을 거부하고 자신이 선택한 삶으로의 적극적인 이동이다. 그리고 삶의 목적에 따라 이주의 이유와 목적지는 변경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에서 이주는 애도의 한 방식이다. 누군가를 애도하기 위해 자기 몫의 남겨진 삶을 남김 없어 살아내는 것. 이 이상의 애도가 있을까.

거의 모든 동물이 멸종된 세계에서 과학자들은 살아남은 몇 종을 보호하기 위해 토론하지만, 역시 지지부진하고 상충되는 의견들은 흥미롭다. 바다 생물의 멸종과 어업에 관한 엇갈리는 입장들, 절박한 상황에서도 여전한 기후 변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기후 변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위선. 몇몇 사람의 뒤 늦은 후회와 각성. 여성에 대한 폭력.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들이다.

인간들은 시혜적인 입장으로 자연과 동식물들을 호명하는데 익숙하다. 기후 위기 한복판에서도 자연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이야기 속에서 북극제비갈매기는 그들의 생존 본능 하나로 이주를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의 인물들은 이 작은 새에게 개입하지 않는다. (위치 추적기를 달기는 한다.) 그들을 따라가고, 지켜볼 뿐이다. 나일의 말처럼 변화된 환경에 동식물들을 적응시킬 것이 아니라 적응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인간이 하던 일(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 더 많은 여행, 더 많은 계발과 발전)을 하지 않을 때 기후 변화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다. 멸종되는 건 인간 외 동물들만이 아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인재로, 자의적으로. 그 사라짐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기술 만능 자본주의의 인간이란 종이 대거 이중 중인 세계는 살만한 곳인가? 이 거대한 이주 앞에 프래니와 선원들 같은 이들은 어디로 이주해야 할까. 이들에게 너무 큰 동질감을 느끼는 나 같은 사람들은? 북극제비갈매기는 언제까지 본능대로 이주하며 지구상에 머물 수 있을까.

책을 펴고 꼬박 밤을 새워 다 읽었다. 뒤가 궁금해서 덮을 수 없는 책. 그만큼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힘이 대단하다. 하지만 읽는 동안 자주 책을 덮고 쉬어야 했다. 프래니의 심리 묘사가 매우 세밀하고 설득력 있어 프래니의 마음에 자주 겹쳐지는 내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다 읽고 나니 아침 7시, 슬펐다. 첫 새가 발작적으로 첫 울음을 울고 난 뒤 집 앞 작은 동산의 새들이 이미 시끄럽게 아침 수다들을 나누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 아침에 저 청량한 지저귐을 들을 수 없다고. 상념 한 스푼 더. 그리고 오랫 동안 이 책을 책상 위 한편에 그대로 두었다. 마음이 아파서. 뭐라고 쓸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눈길이 가면 마음이... 그리고 오늘 다시 펼쳤다. 여전히 아프군. 수 없이 그어진 밑줄이 나에게 수없는 말을 걸어오는, 이미 친구가 된 프래니와 나일, 에스니, 샤무엘... 그리고 많은 이들. 그러니 나에겐 우정이 생긴 참 좋은 책이다. 인용하고 싶은 구절들이 많지만,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읽으실 분들을 위해 아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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