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너져 내리다 : 피츠제럴드 단편선 ㅣ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7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보영 옮김 / 이소노미아 / 2020년 5월
평점 :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로 유명한 스콧 피츠제럴드. 그처럼 미국 그 자체인 작가도 드물다.
유럽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열등감, 성공에 대한 집착, 부에 대한 과시, 그리고 자유분방함 속의 불안감
출신성분이 귀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상인 집안의 유복했던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첫사랑이었던 시카고 금융업 부호의 딸 지네브라 킹에게 가난하다는 이유로 교제를 거절 당하고 그 컴플렉스를 한 평생 가지고 살아간다.
<위대한 개츠비> 속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했던 것처럼 그 역시 <낙원의 이편>이란 소설이 히트를 치고 많은 부를 갖게 되자 지네브라 킹에 맺힌 한처럼 그녀와 흡사한, 하지만 더 귀족적인 집안 배경을 가진 아내 젤다와 결혼하고 흥청망청 부를 과시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의 방탕했던 삶은 연이은 실패와 젤다의 신경쇠약, 본인의 알코올 중독 증세 등으로 무너져 내리는데.
이소노미아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에서 펴낸 피츠 제럴드 단편선은 1편의 자전적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와 6편의 단편이 시대순으로 실려있다. 때문에 마치 작가의 삶을 관통해 들어가는 듯한 구성이다.
'무너져 내리다'는 말년에 공들여 낸 소설이 실패하고 돈에 쪼들리며 하고 싶지 않았던 영화 시나리오까지 손대면서 굴욕적으로 살아가야 했던 피츠 제럴드의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알코올에 의존했던 온전치 못한 정신도 묻어 난다.
"구멍 난 자존심, 어긋난 기대, 불성실, 자만, 후회, 그리고 얼마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난 스물다섯도, 서른다섯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좋을 게 없었죠.
(중략)
그 정적 속에는 모든 의무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내가 지닌 모든 가치관의 하락이 담겨 있었습니다. 질서에 대한 열렬한 믿음, 선한 동기나 결과, 추측과 예언에 대한 경시, 장인 정신이 어느 세계에서나 존재하리라는 느낌, 그런 생각들이 하나씩 사라져갔습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하고 유연한 매개체라 확신했던 소설이 기계적인 집단 예술에 복속되어 가는 것을 보았지요.
할리우드 장사꾼이 만들었든 러시아 몽상가가 만들었든 그것들은 가장 진부한 생각과 뻔한 감정을 담고 있을 뿐인데 말이지요.
그들이 만든 건 결국 말이 이미지에 굴복하는 예술입니다.
그 피할 수 없는 공동작업의 진부한 틀 속에서 개성이란 닳아 없어지고 맙니다."
피츠 제럴드 <무너져내리다> p37~39 / 이소노미아
"그러므로 자존감의 바탕이 되는 '나'라는 존재는 이제 더이상 없습니다.
그저 노동에 필요한 무한한 역량만이 있을 것 같지 않게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아가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지만, 막상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이 큰 집에 혼자 남겨진 작은 소년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피츠 제럴드 <무너져내리다> p41~42 / 이소노미아
'구멍 난 자존심'은 피츠 제럴드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특히 1920년대에 쓴 단편들은 사랑 이야기라는 외피를 두르고 본질적으로는 어떤 열등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계급에 대한 열등의식과 부와 성공에 대한 강력한 집착,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도 유독 한가지 타입의 여성에게만 빠져드는 것 역시 청년 시절 무너져 내렸던 자존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같은, 부유하게 자라나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제멋대로이면서 과하게 물질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순수해보이기도 하는 그런 여성에 대한 동경은 이어지는 단편 면면에 녹아 있다.
1920년대 여성치고 굉장히 주체적이라는 점도 그가 그리는 여성적 특징이다.
특히 <겨울 꿈>이라는 단편은 개츠비의 완성하기 전 만들어진 시놉시스 같은 작품인데, 주인공 덱스터가 사랑하는 주디 존슨이 딱 그런 여성이다. 어떤 남자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금방 싫증을 느끼며,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가 더이상 자신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슬그머니 나타나 흔들어버리는. 그래서 덱스터도 정숙한 아내 아이린을 맞이한 뒤 느닷없이 나타난 주디의 무차별 유혹에 무너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치명적이었던 그녀도 자신을 막 대하는 나쁜 남자를 만나 예전의 아름다움을 잃고 시들어간다.
개인적으로는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라는 단편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사촌지간인 버니스와 마저리, 마저리는 자신의 집에 놀러온 매력 없는 버니스를 사교 파티에 데려가야 하는 게 골칫거리이다. 버니스에게 얼른 집에나 돌아가라며 막말을 퍼붓던 마저리는 인기를 얻는 팁을 알려주는데 마침 그 수가 너무나 잘 먹혀 들어가 뭇 남성들의 애정공세를 다 받게 된 버니스, 자신의 인기를 다 빼앗기게 된 마저리는 자신이 알려준 팁을 핑계로 버니스가 가장 마음을 준 남자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만들고, 버니스 역시 그 나름대로 복수를 하게 된다는 스토리.
피츠 제럴드는 어쩜 여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그토록 잘 이해하는지, 맹랑한 여자 주인공 둘 사이의 긴장관계가 마치 '가십걸' 같은 미드를 보는 듯, 지금 읽어도 너무나 세련됐다.
마지막 두 편 <다시 찾은 바빌론>과 <잃어버린 10년>은 1930년대인 말년에 쓰인 단편으로 쇠락해버린 명성과 망가져버린 관계 등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특히 <다시 찾은 바빌론>은 아내와 사별하고 딸을 아내의 언니에게 맡긴 남자가 딸을 되찾기 위해 자신이 부양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아내 젤다를 정신병원에 보내고 딸을 혼자 키워야 했던 피츠 제랄드 자신의 처지와 겹친다.
한 권으로 피츠 제럴드란 작가의 생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소중한 경험.
역시 이소노미아의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만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