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사람 - 교유서가 소설
김종광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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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농촌의 사관이고 싶었다"

- 김종광 <성공한 사람> 작가의 말 中


나의 유년시절 5할은 시골생활이 차지하고 있다. 지방 소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손주가 우리 밖에 없어 나와 동생은 수시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에 보내졌다. 할머니 뒷꽁무니를 쫓아 논과 밭을 오가고, 삼촌을 따라 소 여물을 주기도 했던 그때의 기억은 불편함보다 낭만으로 기억되나보다. 그래서 나는 도시 생활에 지칠 때면 시골의 삶을 떠올린다. 시골 생활이 '리틀 포레스트' 같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더 알지만, 그 곳은 아무 조건 없이 품어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작가 김종광의 <성공한 사람>은 시골의 삶을 적나라하게 담은 소설이다. 

그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지만 농부가 아닌 시골의 삶을 기록했다하여 이 책을 '농촌소설'이 아닌 '시골소설'이라고 명확히 구분짓는다.


시골의 삶이라니, 어느정도 환상을 품고 접근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에는 '리틀 포레스트' 류의 낭만은 1도 없다.

마치 관찰 카메라를 설치한 듯 리얼하게 벌어지는 시골 노인들의 대화와 소소한 에피소드, 그리고 그 안에 감춰진 지금 시골의 현실적 문제가 등장한다.



표제작인 '성공한 사람, 훌륭한 사람' 속 중학생 연구자 성빈의 발품을 판 조사에 따르면 시골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성공했다고 보지 않는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성공과는 먼 삶.

열심히 살수록 빚만 느는 삶. 도시의 풍요로움과 비교하며 정신적으로도 열등감에 빠지기 쉬운 삶.



'우리동네 큰면장'이라는 에피소드를 통해 수시로 바뀌어 재투자비용만 높아지고 있는 무분별한 축산정책과 젊은 인구 유출로 마을 일을 도맡아할 인력 부족 현상을 꼬집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서는 노인일자리 정책에 동원되어 무의미한 교육으로 허비되는 시간과 비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가금을 처분하라고?'는 효과도 입증되지 않은 예방적 살처분으로 작은 생명을 자식처럼 여기며 키워온 마을 사람들을 힘겹게 만든다. 간편한 말로 하달되는 처분 결정, 그걸 실행해야하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 생명을 죽이기 그렇게 쉽나? 왜 근본적인 해결은 없이 항상 손쉬운 방법으로만 막으려고 하나.



'코피를 흘리며'에서는 지방 의료 시스템의 붕괴를 보여준다. 특히 종합병원을 찾기 힘든 시골에 그나마 있는 종합병원도 숱한 오진을 쏟아내며 경쟁력을 잃은지 오래다. 육체노동이 더 잦은 시골민은 도시민보다 병원 갈 일도 많은데, 그럴때마다 믿을 수 있는 큰 도시 병원을 시간과 비용을 들여 가야하는 것이다. 이러니 지방의 인구는 더욱 줄고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 밖에. 이 에피소드를 보며 균형발전이라 부르는 정책들이 이런 기초적인 삶의 질도 개선하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착찹한 현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별호로 등장하는 오지랖 여사처럼 나를 고립시키지 않고 계속 밖으로 불러낼 것 같은 묘한 회복의 땅으로써 시골도 보여준다.


'학생댁 유씨씨'에서는 이른 임신으로 SNS상에서 온갖 추문에 시달리고 도망치듯 시골로 온 어린 신부 학생댁이 시골의 삶을 카메라로 담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농사꾼이 생겼다'는 모든 걸 잃고 고향으로 내려온 남자에게 자꾸 문을 두드려 안부를 묻고, 몸뚱이 하나만 있어도 새로 내딛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 되어준다. 그리고 그에게 시골은 예전에 젖동냥을 해주며 키워줬던 시골 여인네들의 따뜻한 품이다. 



"꼰대 너무 미워하지 마.

우리집엔 꼰대가 없어서 그런가 난 꼰대들이 재미있더라.

꼰대들하고 얘기하면 그분들 자체가 하나의 책 같거든.

성공한 책인지 훌륭한 책인지 그건 알기 어렵지만 아무튼 한 권의 책 같아."

김종광 <성공한 사람들> p109 / 교유서가



작가는 텔레비전에서 소비되는 도시 사람들이 보고 싶던 시골의 단면이 아닌 진짜 시골을 기록하고 싶어했다.

그러고보면 제목이 참 아이러니하다. '성공한 사람'은 눈 씻고 찾기 힘든 시골의 삶에 '성공한 사람'이라니.

아무튼 그의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되길, 그래서 사라져가는 시골에 대한 생생한 사관이 되어주길 바란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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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윌 : 도덕형이상학의 기초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2
임마누엘 칸트 지음, 정미현 외 옮김 / 이소노미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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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선한 의지만큼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불릴 만한 것이 없습니다."



도덕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단어여서 그 뜻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법률로 강제하지는 않지만 마땅히 지켜야할 사회적 규범 정도로 이해해왔다.


도덕은 선험적인 것일까, 경험적인 것일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후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칸트는 도덕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며 도덕의 정의를 다른 차원에서 전개한다.


<굿윌>이라는 만만해보이는 외피를 지닌 이 책, 사실 원제는 결코 만만해보이지 않는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이다. 

사실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이 책에 대해 내가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나마 최근에 채사장의 '지대넓얕' 시리즈를 통해 칸트 철학의 핵심만 쉽게 접했기에 칸트 철학의 의의가 뭔지, 정언명령이 대체 어떤 개념인지 약간의 감을 가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원문을 읽는다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이소노미아 편집부도 이런 독자들을 배려하여 번역의 방향성과 개념 정의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도입부에 깔아두었다. 그리고 각 장마다 핵심이 되는 내용을 써머리해주고 있다.

역시나 정성이 넘치는 편집이 감동적인 책이다. 

이렇게 든든한 무기를 장착하고 칸트를 정복해보겠다고 호기롭게 나섰으나, 몇 페이지 못가서 좌절하고 만다.


그래도 이해한 바를 끄적여보자면, 칸트는 이전의 경험론과 인식론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며 자신의 새로운 도덕철학을 펼치려고 했다. 이전까지 선함과 도덕을 개인의 성향과 경험의 영역에서 생각했다면, 칸트는 경험에 영향을 받는 것은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성적인 존재가 지켜야하는 계율인 '도덕법칙'은 경험 부분을 제거한 순수이성의 개념 안에 있는 아프리오리(경험에 앞선 선천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도덕은 사례를 나열하는 대중철학이 아닌 이성 인식으로 판단하는 형이상학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이에 나아가기 위해 '이성의 실천적 능력이 정하는 보편적인 규칙에서부터 그 능력에서 비롯되어 의무 개념이 생성되는 지점까지 명확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칸트는 밝히고 있다.


신의 의지는 이성이 선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이 필연적이지만, 인간의 의지는 주관적인 불완전성으로 그렇지 못하다. 이때 인간은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는 강제력을 받게 되고 이를 '양심의 구속'을 받는다고 표현한다. 양심의 구속을 부과하는 객관적인 원리를 '명령'이라 칭하는데, 모든 명령문은 조건적인 명령(가언명령)이거나 혹은 무조건적인 명령(정언명령)이다. 이 중에 정언명령은 도덕법률이다. 



"도덕이란 행위의 의지, 즉 준칙을 통해 보편적인 법률을 만들어 내는 자율성에 대해 행동이 갖는 관계입니다. 

의지의 자율성에 맞는 행동은 허용됩니다.

그렇지 않은 행동은 금지됩니다.

자율성의 법률과 항상 일치하는 준칙은 신성한 의지이며, 절대적으로 선합니다.

절대적으로 선하지만은 않은 의지가 자율성의 원리에 의존하는 것(도덕의 불가피성)은 양심의 구속이라고 합니다.

양심의 구속에서 비롯되는 행동의 객관적인 필연성을 의무라고 부릅니다."

임마누엘 칸트 <굿윌> p167 ~ 168 / 이소노미아


도덕법률은 모든 행동의 목적을 철저하게 배제해 마지막에 남은 형식이 근원이 될 수 있고, 모든 인간은 스스로 목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다룰 수 있는, 나에게도 꺼려지는 행동을 타인에게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보편 법률에 모순되는 어떤 준칙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되며, 의지의 자율성을 가지고, 스스로 입법자가 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의문이 생겼다. 

보편적인 법률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고, 그것은 어떻게 객관성을 띌 것인가. 


마지막 장에서 칸트는 정언명령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답한다. 하지만 이 논리가 전제되는 자유는 이성적 존재에게는 필연적인 결과이고, 그 타당성을 이성으로는 알아낼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식으로 전개하는 것 같아서 명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 장을 통해 앞서 품은 의문에 대한 답을 기대했지만, 결론적으로 머릿 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소노미아의 친절하고 대중적인 번역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문해력의 한계에 부딪혔고, 역시 철학은 남이 떠먹여주는 걸 읽어야 하나 자괴감에 빠지는 독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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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신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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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은 과거시제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거짓말의 공장이다."

엘레나 페란테 <성가신 사랑> p266 / 한길사




좋은연애 연구소 김지윤 소장은 어느 강연에서 '친구 같은 딸'이라는 말이 주는 족쇄에 대해 언급했다.


엄마와 딸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듯한 이 말은 딸이 엄마의 불안과 우울을 일방적으로 견뎌내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부모의 불화와 상호간의 불신이 야기한 폭력적인 상황, 외부에서 닥쳐온 고난 등 K장녀들이 감당해야 했던 집안의 남모를 사정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너무 일찍 조숙해져버린 K장녀들.

(물론 장녀인 나는 이런 모종의 책임감을 느낀 적이 없고 충분히 철없이 컸다. 이런 점에서 우리 부모님께 감사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엄마와 딸의 가장 거북하고 불편한 관계는 이 정도였다.

엘레나 페란테의 '성가신 사랑'을 읽기 전까지.



'성가신 사랑'은 엘레나 페란테가 3부작으로 완성한 나쁜 사랑 시리즈 중 하나이다.

읽고 나면 왜 '나쁜 사랑'인지 알 수 있을만큼 그 감정이 질척이다 못해 숨을 조인다.


40대가 된 장녀 델리아는 일찌감치 고향 나폴리를 떠나 로마에 정착해 살고 있다.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나폴리로 내려온다. 


어린 시절 가족들이 자주 가던 휴양지에서 고급 란제리만 걸친 채 발견된 어머니의 시신. 타살을 의심할 법도 한데 직전까지 어머니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못했고 시신에 어떤 폭력적 정황이 발견되지 않아 자살로 결론을 내린다. 


어머니의 집에 남아 마지막 흔적을 더듬어가던 델리아는 어머니가 과거 아버지의 동업자였던 카세르타와 최근에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델리아는 안그래도 의처증이 있어 자주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와 카세르타의 불륜을 고자질한 적이 있다. 이 사건으로 일적으로도 카세르타와 결별하려 했던 아버지는 카세르타를 죽을 만큼 때리고, 어머니와도 헤어졌다. 


델리아의 기억 속 어머니는 집 안에서는 검소하고 때로는 추레한 가정 주부이지만 바깥에만 나가면 발정난 암캐처럼 절제를 몰랐다. 남자들을 유혹하는 천박한 몸짓을 서슴없이 보이던 어머니. 아버지는 이런 어머니를 폭력적으로 단속하면서 모순적이게도 어머니의 나체를 그려 남자들에게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델리아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엄청난 불안을 느끼고, 자신의 작은 몸으로 어머니를 통제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은 델리아를 문득 문득 찾아온다.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 델리아는 자신의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어린 시절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에게 고했던 카세르타와 어머니 사이의 불륜도 사실은 자신이 겪은 끔찍한 일을 어머니가 겪은 것처럼 말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너무나 광폭하고 증오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쾌락을 갈망하고 싸움을 좋아하는데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어머니가 가끔가다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머니가 즐거워하는 것도 보기 힘들어했다.

그런 기미가 보이면 어머니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의심했다.

육체적인 배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나도 아버지가 자기 몰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할까봐 두려워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아버지가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버림받는 것이었다."

엘레나 페란테 <성가신 사랑> p200 / 한길사



혼란스러웠다. 중반부까지는 사실은 어머니가 일방적이고 무고하게도 남자들의 음란한 시선에 의해 성적 대상화되었을 뿐이고, 실제의 어머니는 달랐다는 진실이 델리아의 각성으로 터져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다만 델리아의 어머니를 향한 지독하고 성가신 사랑만 존재할 뿐이다.


그녀는 어머니와 닮아보이려 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했던 방식으로 요염하게 웃고, 어머니의 행동 하나하나를 흡수하며 자란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가하는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모순적이게 어머니의 자유를 구속하려 했던 아버지에게 동조한다. 이 모든 기저에는 어머니의 관심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삐뚤어진 소유욕이 자리 잡고 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았던 건 아버지 뿐만 아니라 자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델리아에게 언제든 자식을 버릴 수 있는 무책임한 존재로 보였고, 어머니에게 버림 받기 전에 자신이 어머니를 버림으로써 델리아는 자신을 뒤덮는 불안을 견뎌낸다. 



델리아가 나폴리를 떠날 때는 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지워내려 결심한 때이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언어와 어머니의 도시를 지우고,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와 온전한 자신이 되기로 결심한 델리아는 나폴리에 있는 동안 어머니의 망령이 몸에 씌워진 듯 자꾸만 동일시하게 된다. 


어머니를 닮고 싶다는 이유가 하나씩 사라진 영화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다, 자신의 신분증 사진 위에 사인펜으로 어머니가 과거에 했을 한물간 머리 모양을 그려 넣으며 자신의 모습에서 어머니를 찾는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끝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았던 걸까. 아니면 여전히 유년시절에 갇혀 있는 걸까.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오해로 점철되었던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끝내 마음으로 연대하는 부류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의 예상을 처참하게 깨는 지독한 이야기였다. 

여태껏 본 가장 거북하고 불편한 딸과 어머니의 이야기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목격한 트라우마 때문에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은 언제나 짙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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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용의 아트 내비게이션 - 대한민국 1호 도슨트가 안내하는 짜릿한 미술사 여행
김찬용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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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술 애호가일까?

한때는 유명화가의 전시나 특별전이 있으면 꼬박 꼬박 미술관을 찾았다.

대학 때 들은 교양 수업을 계기로 미술을 보는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같다'라고 쓰는 건 진정으로 재밌었는지, 지적 허영 때문인지 지금에 와서는 헷갈리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은 미술관을 거의 안갔다. 지방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탓도 있지만 지방에도 괜찮은 전시가 열리는데 굳이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전시나 여행지에서 접근 가능한 곳의 미술관은 종종 찾지만 전제는 '무료'일 경우에만 찾는다. 나를 발동시켰던 허영이 어느새 김새듯 사라져버린걸까.


오랜만에 미술사에 관한 책을 읽었다.

대한민국 1호 도슨트 김찬용의 책 <김찬용의 아트 내비게이션>. 이 책은 출발지를 근대 이후의 미술로 설정하고 우리를 미술과 한층 멀게 만드는 현대 개념미술과 삶 속에 예술을 스며들게 하는 공공미술까지를 목적지로 둔다. 인상파의 탄생부터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인기가 많은 고흐가 속한 후기 인상파, 마티즈의 야수파, 피카소의 인상파, 칸디스키의 청기사파, 마르셸 뒤샹의 다다이즘 등등 각 사조와 그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일화를 곁들여서 쉽고 재미있게 내용을 꾸려 놓았다.


이런 구성 덕분에 책의 제목처럼 미술 사조에 초행길인 살람들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재현한 근대 이전의 회화와 달리 사진이 등장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녹여내야하는 요구가 생기기 시작한 근대 이후의 미술은 기존의 것을 뒤엎고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한다는 강박이 더욱 심해진 것 같다.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던 미술, 그 과정에는 노이즈 마케팅도 주효했다.

혹평이든 찬사든 이슈화를 시켜야 작품의 가치가 높아지고 자신의 이름이 앞으로 '팔리는 작가' 군에 속하게 되니까.


​추상으로 점점 대중과 멀어져갔던 미술은 다시 팝아트와 같은 대중적인 장르로 회귀하게 되다 또 철학을 담은 개념미술로 멀어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삶과 일상 속에 예술을 구현하는 공공미술로 아주 가깝게 들어온다. 

이런 밀당 과정이 흥미로웠다. 앞으로의 예술이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공미술의 행보를 응원하게 된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계일 뿐이지만 그 안에 자신의 감정을 녹여내니 그 어떤 화려한 그림보다 은유적이고 시적으로 진한 감성을 전달하는 하나의 작품이 되었죠.

이러한 형태의 미술을 현대 미술계에서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라고 지칭합니다.

(중략)

우리 일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사전적 정의를 벗어나 새롭게 사고하고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 존재했던 미술은 이미 우리 삶,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와 있는 거죠.

우리의 목적지는 이곳입니다.

과거의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의 미술을 바라보며 나의 시대와 나의 인생을 응시할 수 있는 감상의 영역. 그 끝에 우리의 목적지가 있는 거죠."

김찬용 <김찬용의 아트 내비게이션> p234 / 아르떼



특히 어렵게 느껴지는 현대 미술에 대한 개념을 정리할 수 있게 된 건 큰 수확이었다.

레디메이드를 덩그라니 전시해둔 듯한 개념미술은 가끔은 불친절하고 인상이 찌푸려질만큼 난해하다 느껴졌는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철학적이라서 더욱 알고 싶어졌다.


"우리가 애호가로서 미술을 즐긴다는 건, 마치 여행을 떠나듯 하나의 정답이 아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내가 마주하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행위일 것입니다."

김찬용 <김찬용의 아트 내비게이션> p237 / 아르떼


한때 미술관에서 도저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불통의 작품 앞에서 무언가 읽어내려 고뇌하고 읽어내지 못하는 나의 무지함에 좌절하곤 했는데, 김찬용 도슨트가 건네는 '미술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말은 꽤 위로가 되었다. 읽는 건 전공자들이나 하면 되는거지, 나 같은 애호가는 내 느낌대로 감상하면 되는거다. 모두가 찬사를 보내는 작품도 내게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으면, 그건 그런 작품이라고 주눅들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주관적인 나의 감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작품을 단순히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들고 싶다'고 한 르네 마그리트나 '진정한 예술가는 영감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다'라는 살바도르 달리의 말처럼 초현실주의 작품이 내포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쉬이 떨쳐지지 않는다. 역시 미술에 있어서는 지적 허영이 자꾸 앞선다.


그래서 애호가와 깊은 애호가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책을 덮는다. 

하지만 이 독서 덕분에 오랫동안 말라있던 미술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다시 되살아난 것 같아 유쾌한 기분이다.

조만간 미술관 나들이를 가야겠다.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에서 출판사 도서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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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 내리다 : 피츠제럴드 단편선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 7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보영 옮김 / 이소노미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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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의 작가로 유명한 스콧 피츠제럴드. 그처럼 미국 그 자체인 작가도 드물다.

유럽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열등감, 성공에 대한 집착, 부에 대한 과시, 그리고 자유분방함 속의 불안감


출신성분이 귀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상인 집안의 유복했던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첫사랑이었던 시카고 금융업 부호의 딸 지네브라 킹에게 가난하다는 이유로 교제를 거절 당하고 그 컴플렉스를 한 평생 가지고 살아간다.


<위대한 개츠비> 속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했던 것처럼 그 역시 <낙원의 이편>이란 소설이 히트를 치고 많은 부를 갖게 되자 지네브라 킹에 맺힌 한처럼 그녀와 흡사한, 하지만 더 귀족적인 집안 배경을 가진 아내 젤다와 결혼하고 흥청망청 부를 과시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의 방탕했던 삶은 연이은 실패와 젤다의 신경쇠약, 본인의 알코올 중독 증세 등으로 무너져 내리는데.


이소노미아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에서 펴낸 피츠 제럴드 단편선은 1편의 자전적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와 6편의 단편이 시대순으로 실려있다. 때문에 마치 작가의 삶을 관통해 들어가는 듯한 구성이다.


'무너져 내리다'는 말년에 공들여 낸 소설이 실패하고 돈에 쪼들리며 하고 싶지 않았던 영화 시나리오까지 손대면서 굴욕적으로 살아가야 했던 피츠 제럴드의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 알코올에 의존했던 온전치 못한 정신도 묻어 난다. 


"구멍 난 자존심, 어긋난 기대, 불성실, 자만, 후회, 그리고 얼마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난 스물다섯도, 서른다섯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좋을 게 없었죠.

(중략)

그 정적 속에는 모든 의무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내가 지닌 모든 가치관의 하락이 담겨 있었습니다. 질서에 대한 열렬한 믿음, 선한 동기나 결과, 추측과 예언에 대한 경시, 장인 정신이 어느 세계에서나 존재하리라는 느낌, 그런 생각들이 하나씩 사라져갔습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가장 강력하고 유연한 매개체라 확신했던 소설이 기계적인 집단 예술에 복속되어 가는 것을 보았지요.

할리우드 장사꾼이 만들었든 러시아 몽상가가 만들었든 그것들은 가장 진부한 생각과 뻔한 감정을 담고 있을 뿐인데 말이지요.

그들이 만든 건 결국 말이 이미지에 굴복하는 예술입니다.

그 피할 수 없는 공동작업의 진부한 틀 속에서 개성이란 닳아 없어지고 맙니다."

피츠 제럴드 <무너져내리다> p37~39 / 이소노미아


"그러므로 자존감의 바탕이 되는 '나'라는 존재는 이제 더이상 없습니다.

그저 노동에 필요한 무한한 역량만이 있을 것 같지 않게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아가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지만, 막상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이 큰 집에 혼자 남겨진 작은 소년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피츠 제럴드 <무너져내리다> p41~42 / 이소노미아


'구멍 난 자존심'은 피츠 제럴드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특히 1920년대에 쓴 단편들은 사랑 이야기라는 외피를 두르고 본질적으로는 어떤 열등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계급에 대한 열등의식과 부와 성공에 대한 강력한 집착,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도 유독 한가지 타입의 여성에게만 빠져드는 것 역시 청년 시절 무너져 내렸던 자존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같은, 부유하게 자라나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제멋대로이면서 과하게 물질적이기도 하고 그래서 순수해보이기도 하는 그런 여성에 대한 동경은 이어지는 단편 면면에 녹아 있다.

1920년대 여성치고 굉장히 주체적이라는 점도 그가 그리는 여성적 특징이다.


특히 <겨울 꿈>이라는 단편은 개츠비의 완성하기 전 만들어진 시놉시스 같은 작품인데, 주인공 덱스터가 사랑하는 주디 존슨이 딱 그런 여성이다. 어떤 남자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금방 싫증을 느끼며,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가 더이상 자신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슬그머니 나타나 흔들어버리는. 그래서 덱스터도 정숙한 아내 아이린을 맞이한 뒤 느닷없이 나타난 주디의 무차별 유혹에 무너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렇게 치명적이었던 그녀도 자신을 막 대하는 나쁜 남자를 만나 예전의 아름다움을 잃고 시들어간다. 


개인적으로는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라는 단편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사촌지간인 버니스와 마저리, 마저리는 자신의 집에 놀러온 매력 없는 버니스를 사교 파티에 데려가야 하는 게 골칫거리이다. 버니스에게 얼른 집에나 돌아가라며 막말을 퍼붓던 마저리는 인기를 얻는 팁을 알려주는데 마침 그 수가 너무나 잘 먹혀 들어가 뭇 남성들의 애정공세를 다 받게 된 버니스, 자신의 인기를 다 빼앗기게 된 마저리는 자신이 알려준 팁을 핑계로 버니스가 가장 마음을 준 남자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만들고, 버니스 역시 그 나름대로 복수를 하게 된다는 스토리. 

피츠 제럴드는 어쩜 여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그토록 잘 이해하는지, 맹랑한 여자 주인공 둘 사이의 긴장관계가 마치 '가십걸' 같은 미드를 보는 듯, 지금 읽어도 너무나 세련됐다.



마지막 두 편 <다시 찾은 바빌론>과 <잃어버린 10년>은 1930년대인 말년에 쓰인 단편으로 쇠락해버린 명성과 망가져버린 관계 등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특히 <다시 찾은 바빌론>은 아내와 사별하고 딸을 아내의 언니에게 맡긴 남자가 딸을 되찾기 위해 자신이 부양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아내 젤다를 정신병원에 보내고 딸을 혼자 키워야 했던 피츠 제랄드 자신의 처지와 겹친다. 


한 권으로 피츠 제럴드란 작가의 생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소중한 경험.

역시 이소노미아의 '인류 천재들의 지혜' 시리즈만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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