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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신 사랑 ㅣ 나쁜 사랑 3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평점 :

"유년 시절은 과거시제로 영원히 머물러 있는 거짓말의 공장이다."
엘레나 페란테 <성가신 사랑> p266 / 한길사
좋은연애 연구소 김지윤 소장은 어느 강연에서 '친구 같은 딸'이라는 말이 주는 족쇄에 대해 언급했다.
엄마와 딸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듯한 이 말은 딸이 엄마의 불안과 우울을 일방적으로 견뎌내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부모의 불화와 상호간의 불신이 야기한 폭력적인 상황, 외부에서 닥쳐온 고난 등 K장녀들이 감당해야 했던 집안의 남모를 사정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너무 일찍 조숙해져버린 K장녀들.
(물론 장녀인 나는 이런 모종의 책임감을 느낀 적이 없고 충분히 철없이 컸다. 이런 점에서 우리 부모님께 감사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엄마와 딸의 가장 거북하고 불편한 관계는 이 정도였다.
엘레나 페란테의 '성가신 사랑'을 읽기 전까지.
'성가신 사랑'은 엘레나 페란테가 3부작으로 완성한 나쁜 사랑 시리즈 중 하나이다.
읽고 나면 왜 '나쁜 사랑'인지 알 수 있을만큼 그 감정이 질척이다 못해 숨을 조인다.
40대가 된 장녀 델리아는 일찌감치 고향 나폴리를 떠나 로마에 정착해 살고 있다.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나폴리로 내려온다.
어린 시절 가족들이 자주 가던 휴양지에서 고급 란제리만 걸친 채 발견된 어머니의 시신. 타살을 의심할 법도 한데 직전까지 어머니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못했고 시신에 어떤 폭력적 정황이 발견되지 않아 자살로 결론을 내린다.
어머니의 집에 남아 마지막 흔적을 더듬어가던 델리아는 어머니가 과거 아버지의 동업자였던 카세르타와 최근에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델리아는 안그래도 의처증이 있어 자주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어머니와 카세르타의 불륜을 고자질한 적이 있다. 이 사건으로 일적으로도 카세르타와 결별하려 했던 아버지는 카세르타를 죽을 만큼 때리고, 어머니와도 헤어졌다.
델리아의 기억 속 어머니는 집 안에서는 검소하고 때로는 추레한 가정 주부이지만 바깥에만 나가면 발정난 암캐처럼 절제를 몰랐다. 남자들을 유혹하는 천박한 몸짓을 서슴없이 보이던 어머니. 아버지는 이런 어머니를 폭력적으로 단속하면서 모순적이게도 어머니의 나체를 그려 남자들에게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 델리아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엄청난 불안을 느끼고, 자신의 작은 몸으로 어머니를 통제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은 델리아를 문득 문득 찾아온다.
그리고 충격적인 반전, 델리아는 자신의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어린 시절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에게 고했던 카세르타와 어머니 사이의 불륜도 사실은 자신이 겪은 끔찍한 일을 어머니가 겪은 것처럼 말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너무나 광폭하고 증오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쾌락을 갈망하고 싸움을 좋아하는데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어머니가 가끔가다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머니가 즐거워하는 것도 보기 힘들어했다.
그런 기미가 보이면 어머니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의심했다.
육체적인 배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나도 아버지가 자기 몰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할까봐 두려워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아버지가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버림받는 것이었다."
엘레나 페란테 <성가신 사랑> p200 / 한길사
혼란스러웠다. 중반부까지는 사실은 어머니가 일방적이고 무고하게도 남자들의 음란한 시선에 의해 성적 대상화되었을 뿐이고, 실제의 어머니는 달랐다는 진실이 델리아의 각성으로 터져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다만 델리아의 어머니를 향한 지독하고 성가신 사랑만 존재할 뿐이다.
그녀는 어머니와 닮아보이려 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했던 방식으로 요염하게 웃고, 어머니의 행동 하나하나를 흡수하며 자란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가하는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모순적이게 어머니의 자유를 구속하려 했던 아버지에게 동조한다. 이 모든 기저에는 어머니의 관심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삐뚤어진 소유욕이 자리 잡고 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았던 건 아버지 뿐만 아니라 자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델리아에게 언제든 자식을 버릴 수 있는 무책임한 존재로 보였고, 어머니에게 버림 받기 전에 자신이 어머니를 버림으로써 델리아는 자신을 뒤덮는 불안을 견뎌낸다.
델리아가 나폴리를 떠날 때는 어머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지워내려 결심한 때이다. 어머니가 사용하던 언어와 어머니의 도시를 지우고,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와 온전한 자신이 되기로 결심한 델리아는 나폴리에 있는 동안 어머니의 망령이 몸에 씌워진 듯 자꾸만 동일시하게 된다.
어머니를 닮고 싶다는 이유가 하나씩 사라진 영화관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다, 자신의 신분증 사진 위에 사인펜으로 어머니가 과거에 했을 한물간 머리 모양을 그려 넣으며 자신의 모습에서 어머니를 찾는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끝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았던 걸까. 아니면 여전히 유년시절에 갇혀 있는 걸까.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오해로 점철되었던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끝내 마음으로 연대하는 부류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의 예상을 처참하게 깨는 지독한 이야기였다.
여태껏 본 가장 거북하고 불편한 딸과 어머니의 이야기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목격한 트라우마 때문에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은 언제나 짙은 여운을 남긴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