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의 역사 - 늑대인간부터 지킬 박사까지, 신화와 전설과 예술 속 기이한 존재들의 흔적을 따라서
존 B. 카추바 지음, 이혜경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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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임없이 흐르고 바뀌는' 상태는 바로 셰이프시프터의 특징이다.

셰이프시프터는 자신의 표현 수단을 끊임없이 바꾼다.

셰이프시프터는 우리에게 무엇이 실재하고 무엇이 실재하지 않는지 불확실하니 

끊임없이 추측하라고 요구한다.

셰이프시프터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마치 불교 수도승처럼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존 B. 카추바 <변신의 역사> p302/ 미래의창




히어로이든 빌런이든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셰이프시프터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사람들은 왜 셰이프시프터에 매력을 느끼고 열광하는 걸까? <변신의 역사>는 신화와 전설부터 시작되었던 셰이프시프터의 흔적을 짚어내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보는 책이다.



셰이프시프터는 아주 오랜 옛날 선사시대부터 존재해왔다. 동물이 가진 힘을 두려워하면서 동경해왔던 인간은 사냥을 할 때 동물처럼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힘을 갖길 바라는 동물의 가면을 썼다. 박물관에서 이집트 유적을 마주할 때마다 접했던 동물의 탈을 쓴 반인반수의 신들, 당시 셰이프시프터는 신 또는 신의 대리자인 주술사, 사제 등만이 가능한 신비로운 영역이었다. 이들의 변신은 결코 정의롭기만 한 변신은 아니였는데,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제우스 신의 변신은 줄곧 상대를 유혹하고 강간하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신이나 신의 대리자에게 부여된 변신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절대적인 힘에 대한 동경에서 탄생했다.



그러다 점점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의 정신이 계몽해감에 따라 주술이나 마법,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흐려져 갈 때 인간에게도 '변신' 능력이 생겨났다. 신에 의한 저주가 아니라 신의 개입 없이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계 곳곳에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내적으로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믿는 의식들, 빙의 같은 것은 현재까지도 신비로운 경험처럼 존재하고 있다.


계몽의 결과라고 하기엔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는 게 아이러니하다. 야수에 빙의되어 아군도 적군도 구분없이 다 죽여버리는 베르나르크의 잔혹한 전사들이나 달빛을 쫓아 밤거리를 뛰어다니며 울부짖는 늑대인간 등의 스토리를 창조해내고 매혹되는 이유는 인간 속에 남아 있는 야만의 DNA 때문일까?


무한한 힘을 얻고 싶다는 욕망 뿐만 아니라 문명과 질서의 세계 속에 살며 억눌러야 했던 추악하고 부도덕한 본성을 표출하고 싶다는 욕구를 셰이프시프터에 투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저자는 마치 오래된 미드 <브이>와 같이 파충류처럼 생긴 외계인이 인간계로 내려와 오랫동안 동화되어 살고 있다는 렙틸리언 셰이프시프터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의 심리를 '전 세계에 만연한 혼돈과 무질서'의 배후를 '인간이 아닌 외계인 세이프시프터라고 생각하면 세상을 이해하기가 좀 더 쉽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며, 셰이프시프터를 만들어낸 심리의 기저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타자를 만들어 책임을 전가하려는 욕구도 덧붙인다.



이 책에는 각 나라에 존재하는 다양한 셰이프시프터의 전설들을 소개하는데, 대체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동아시아의 셰이프시프터부터 우리에게는 너무나 낯선 남미나 아프리카의 좀 잔혹하고 기괴한 이야기까지 흥미롭게 들려준다. 이런 전설 속 셰이프시프터는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이 크다. 때로는 겸손이나 분수를 지키는 삶에 대한 미덕을 가르쳐주기도 하지만 셰이프시프터가 등장하는 전설의 많은 메시지는 낯선 것에 대한 위험성이다. 셰이프시프터는 '언제나 미스터리한 이방인의 상징'이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을 투영하는 존재인 동시에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 역시 아이러니하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참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다양한 존재를 창조해온 것 같다.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무질서를 해석하고 통제하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었듯, 셰이프시프터도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발전해왔다. 그러면서도 셰이프시프터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 참으로 디테일한게 터무니없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개연성을 가진 사실이 어느정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15세기 동유럽에 실존했던 잔혹하기로 유명한 블러드 3세 공작에게서 드라큘라의 원형이 되는 스토리를 찾고, 뱀파이어가 가진 신체 특징을 죽은 시신이 보이는 반응에서 포착한다던가, 자신이 늑대가 되었다고 믿는 일종의 정신착란 상태의 낭광병 환자가 취하는 모습들이 늑대인간에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들이 그러하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은 한 챕터를 부여할만큼 비중있게 다뤘는데, 현상에 대한 다채로운 설명은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왜 하필 이런 셰이프시프터를 인간은 창조해왔을지에 대한 좀 더 깊은 고찰이 진행되지 않은 점은 이 책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 우리는 셰이프시프터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넘어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에 대한 대변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 같다. 최근에 만들어지는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속 셰이프시프터는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형태는 다양하며 미지의 존재에게도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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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밤에 대하여 - 우리가 외면한 또하나의 문화사
로저 에커치 지음, 조한욱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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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혼자 자취를 하던 동네에는 여성안심귀가zone이란게 있었다. 으슥한 골목이 많은 오래된 동네여서 시에서는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환경 정비 사업을 통해 일부러 밝은 가로등을 여러대 설치해뒀다. 실제로도 꽤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빛이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통제하고, 어둠은 인간의 잔혹함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무대가 되는 것일까?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라는 제법 낭만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산업화 이전 유럽과 미국 사회에서 밤은 어떤 역할이었으며, 사람들은 밤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조명의 발달로 밤을 잃어버린 현재와 어떻게 다른지를 미시적인 사료를 가지고 살펴본다. 이 책이 가진 미덕은 거대한 역사의 줄기를 보여준다기 보다 '밤'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뻗어나가는 가지를 통해 아주 큰 풍경화를 조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과거에 발생한 개개인의 아주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다루면서 문체가 굉장히 문학적이다. 역사서를 읽는다기보다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은 열전을 보는 기분이랄까. 


밤은 낮과 달리 시각이 제한되어 두려움과 위험이 증폭하는 시간이었다. 밤의 습한 공기는 해로운 어떤 것으로 취급받았으며, 성서에서는 어둠을 악령이나 사탄과 동일시했다. 밤의 공포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인 도깨비불, 마녀, 악령 등의 초자연적 존재는 어둠과 그림자가 가져다주는 스산한 배경과 어울려 아이들에게 조심해야할 규범을 전하는 이야기로 구전되었다. 


밤은 사고나 범죄가 일어나기에도 좋은 시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지형에서 사람들은 물이나 꺼진 땅에 빠지거나, 넘어져 큰 부상을 입었다. 양초나 랜턴 등의 인공조명은 낮의 시간을 약간 연장해주며 인간의 활동을 좀 더 원활하게 지속해줬지만, 아직 발전되지 못한 형태는 화재의 위험을 품고 있었다. 타기 쉬운 재질로 만들어진 집은 인공조명을 부주의하게 다룬 탓에 쉽게 불타올랐고, 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갔다. 그래서 고의적인 방화는 사형에 이를 정도로 무거운 범죄 행위가 되었다. 

절도와 강도 같은 범죄의 위험도 만연했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밤의 으슥함 이용해 벌어지는 범죄는 그래서 낮의 범죄보다 더 중하게 취급되었다. 


하지만 밤이 항상 이렇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만은 아니다. 밤은 낮에는 누리지 못하는 일탈의 시간이었다.

낮에는 남들의 시선에 둘러싸여 지켜야했던 사회 규범이 밤에는 그 경계가 흐려졌다. 귀족들은 자신이 지켜야할 품위와 예의범절에서 벗어나 밤에 가면이라는 익명성에 기대 저급한 쾌락에 취하거나, 음탕하고 충동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평민들은 낮의 고단한 노동에서 벗어나 술집에서 방탕하게 즐기거나, 여성들의 경우 노동을 하며 공동체와의 유대감을 쌓는 모임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때로는 이러한 일탈은 집단적인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밤에 일어나는 범죄들은 유난히 충동적이었다.  


하지만 국가적인 체제 내에서 밤은 '휴식해야할 시간'이다. 내일의 노동을 위해 활동을 통제해야하는 시간. 그래서 밤을 '문을 닫아야 할 시간'으로 명명하며, 밤에 벌어지는 활동을 더욱 위험한 것으로 치부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70년대까지 통행금지를 둬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해왔다. 밤에 일어나는 범죄나 사건사고를 막기 위함도 있겠지만 그 속에는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이 늘어나게 되면서 잠은 경계해야할 나태함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현대의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 지금같이 낮처럼 밝은 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날이 어두워진 시간부터 잠들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예전에도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질병이나 주변 환경 등으로 불면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잠을 자지 못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고통스러웠다. 


이 책에서는 산업화 이전 사람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이 현재의 일상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물론 밤에도 낮처럼 환해 동일하게 활동할 수 있는 지금은 예전보다는 사회적 규범의 경계가 덜 흐려진 것 같지만, 밤은 여전히 낮보다 충동적이고, 감성에 젖기 쉬운 시간이다. 밤에 더 흥청망청 흐트러지기 쉽고, 새벽의 고요는 상상력을 더 키워주기도 하니까. 게다가 밤이 빚은 무질서에서 기인한 범죄와 폭력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밤을 잃어버렸나? 마법과 같은 미신을 더 이상 믿지 않기에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 그리고 저자가 말한대로 '밤하늘에 남아 있는 아름다움, 어둠과 빛이 바뀌는 주기, 낮의 빛과 소리의 세계로부터의 규칙적인 안식처'는 밝아진 조명 탓에 손상됐다. 


달과 별을 바라보며 길을 찾았던 여행자의 낭만도 이제는 더 이상 누릴 수 없다.어둠 속에서 즐겼던 은밀한 사생활도 밤에 유모나 할머니 곁에서 듣던 무서운 이야기도 소멸했다.


책을 덮으며 빨래터에서 고된 노동과 폭력의 시간을 비슷한 처지의 아낙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잊어가는 밤이 눈 앞에 그려졌다. 친밀한 공동체, 우리가 잃은 건 밤이 아니라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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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1~4 세트 - 전4권 - 특별합본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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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길산으로 허명이 있다 하나 이것은 조선 팔도 방방곡곡의 백성들이 역병과 굶주림에 죽고 싸우며 이룬 이름이지 내 이름이 아니다. 

비록 이 작은 육신이 네게 죽어 썩어져버린다 한들 

너는 장차 수없이 생겨날 장길산과 활빈도를 어찔할 터인가."

황석영 <장길산 4권> p934 / 창비


“극적(劇賊: 큰 도둑) 장길산은 몹시 사나워 여러 도를 왕래하면서 도당을 많이 모으고 있다. 이미 10년이 경과했는데도 아직 잡지 못했도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대가 포위해 잡으려 했지만 끝내 잡지 못했으니 그 음흉함을 알만하다.”(p944)



역사 기록에서 장길산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마지막 대단원의 4권. 길산의 최후는 어떻게 될지 몹시도 궁금한 마음이었다. 



4권에서는 여환을 주축으로 실패해버린 역모와 관군과 맞설 자금을 마련하는 길산의 혈당들 이야기, 그리고 숙적인 최형기와의 마지막 대결이 그려진다. 



미륵의 뜻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모인 사람들. 길산의 활빈도, 운부 대사가 꾸린 각지의 승병들, 오계준을 중심으로 한 해서의 무계, 여환이 조직하는 지방의 미륵교도, 양주의 검계와 이경순. 여환과 검계의 정원태는 왕조가 망하고 미륵이 도래하여 용화세계를 만든다는 신서를 퍼트리고, 백성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들의 섣부른 활동은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데, 확장된 자신의 세와 일어난 민심을 믿고 기존에 약조했던 거사 일정을 앞당겨버린 것이다. 결국 거병을 함께 일으키기로 했던 다른 세력들은 실패를 예감하고, 참여했던 백성들을 구하고 다시 새로운 역모를 계획하기 위해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잘라 버린다. 결국 여환이 일으킨 거사는 마치 사이비 교주가 만들어 낸 분란처럼 취급되어 가담했던 자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여환과 원향의 애달픈 사랑은 신비로우면서도 안타까웠다. 오누이처럼 자라나 뿌리가 하나된 연리지처럼 영혼까지 함께 한 두 사람. 마지막 이승에서 진정으로 부부가 되어 맺어질 때의 모습이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한편 박대근은 인삼 재배에 성공하여 이를 바탕으로 청과의 금지된 거래를 터나가고 언진산에 새롭게 터를 잡은 길산의 활빈도는 잠채를 통해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이는 기존에 지방 부호들이나 탐관오리를 털었던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빈을 도모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청에서 유황과 함석을 들여오면서 관군에 대항할 총포와 화약들로 무장하고, 사주전으로는 관에 타격을 주고, 각 상단을 거점으로 사람을 모으고, 마을을 이뤄 황민들의 생계를 꾸릴 기반을 마련해주는 방식으로 활빈을 이어가는 길산의 혈당들.



역시... 처음부터 못미더웠지만 명은 참 길었던 고달근이 화근이 되었다. 그는 큰 이익을 꾀하다 관가에 검거되고, 최형기의 꼬임에 넘어가 밀정 노릇을 하게 된다. 이 얄미운 인간은 그 덕에 선달까지 되지만 길산이 그를 편하게 살게 놔두지 않지. 배신한 그는 처단 당한다. 


구월산을 토벌할 때와 마찬가지로 길산을 잡기 위해 촘촘한 포위망을 만들고 조여오던 최형기. 가장 아픈 고리인 가족들을 몰살시키고 길산의 주변 심복들을 죽여나가는데, 악귀가 따로 없다. 길산에게는 끔찍한 악몽 같은 최형기도 결국은 길산의 손에, 아니 길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백성들의 한 앞에 운명을 다한다.


기대했던 길산의 운명은....? 

그의 이름은 전설처럼 조선을 떠돈다.

억압과 고통 속에 놓인 백성들에게 해방의 이름으로 길이 길이 남겨진 장길산.


거의 4천페이지에 육박하는 대하소설을 읽으며, 황석영 작가의 필력에 새삼 감탄한다. 마치 그 시대를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엿본듯 생생한 양민들의 농짓거리, 얼이 살아있는 재인들의 굿판, 무예를 가진 이들의 서늘한 액션 활극,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추격전 등을 아주 종합세트로 부려놓는다. 거기에 구전 설화와 민담 등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재미 포인트이다. 


상상력은 또 어떠한가. 이 소설 속에서는 묘옥과 이경순을 제외하고는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실존인물들이라는 데, 역사 속 이름 한 두 줄을 바탕으로 팔딱팔딱 뛰는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들을 빚어냈으니 실로 놀랍다. 마치 그 시절을 함께 산듯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감정과 풍경 묘사 덕분에, 책을 다 덮고 나서도 조선의 핍박 받는 백성이 된 듯 아련하게 장길산을 떠올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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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사랑 나쁜 사랑 3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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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수천 가지 일을 해낸다.

힘겹게 일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공부를 하고, 꿈을 꾸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러다 지쳐 쓰러진다.

그러는 동안 가슴은 커지고 질은 부풀어 오른다.

몸 안에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생명체 때문에 온몸이 욱신거린다.

그 생명체는 나의 것이고 나의 인생이지만 끊임없이 내 몸에서 뛰쳐나가려 한다.

내 뱃속에 살지만 정작 내게는 관심이 없다.

나는 묵직하고 유쾌한 생명체를 격렬하게 사랑하지만 때로는 그 생명체가 혈관 속에 주입된 벌레의 독처럼 혐오스럽기도 하다."

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사랑> p59 / 한길사



모성은 자연스러운 본능인가,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감정일까.

이 논쟁은 이제 후자 쪽으로 많이 기운 것 같다. 여자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모성을 하나의 폭력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성적으로는.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모성이 없는 여성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사회면을 장식하는 비정한 엄마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우리는 모성의 신화에 기대 가치 판단을 내린다. 아이를 학대하는 행위는 모성을 떠나 약한 개체를 대하는 어른으로서 명백히 잘못된 것이지만, 방임의 경우 그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무관심은 지적하지 않는다.  아이를 지극한 정성과 마음으로 돌보는 어머니는 여전히 우리에게 당연한 사실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엘레나 페란테의 나쁜 사랑 3부작 마지막인 <잃어버린 사랑>은 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모성애보다 자신의 삶을 더 사랑했던 레다의 삶을 작가는 '나쁜 사랑'으로 보고 있는걸까?



레다는 올해 마흔 여덞이다. 이른 나이에 결혼해 두 딸을 낳은 그녀는 성년이 된 딸 비앙카와 마르타를 전 남편 잔니가 있는 캐나다로 보내고 삶이 보다 윤택해진 느낌과 함께 해방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해 여름 휴가를 이오니아 해안에서 보내기로 한다. 


휴가지에서 레다는 나폴리에서 온 대가족을 본다. 레다는 모래사장에서 딸 엘레나와 사랑스럽게 인형 놀이를 하고 있는 젊은 엄마 니나에게 불쾌감을 느낀다. 엘레나와 함께 인형을 가지고 항상 사랑을 듬뿍 주는 엄마와 사랑 받는 아이에 대한 역할 놀이를 하고 있는 모녀가 그토록 꼴보기 싫었던 걸까. 레다는 남편과 언쟁하느라 니나가 엘레나를 방치하고, 엘레나가 혼자만의 놀이에 빠지느라 인형을 버려둔 사이 인형을 훔쳐 간다. 



인형을 잃어버린 엘레나는 감당하기 버거운 아이로 돌변한다. 시종일관 떼를 쓰며 엄마 니나를 힘들게 만든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니나는 힘겹게 모성의 끈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아이를 볼 때 예전처럼 사랑스러운 눈길이 아닌 짜증과 피로감이 섞인 표정이 된다거나, 아이를 다른 가족들에게 맡기고 비치하우스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 지노와 밀회를 즐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니나의 모습에서 레다는 점점 묘한 유대감을 느낀다. 레다 역시 '비뚤어진 엄마'였기 때문이다.


레다는 아이들이 한창 어릴 때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는 충동에 남편과 아이들을 떠난 적이 있다. 학자로써 자신의 커리어를 쌓으며 자신의 일을 인정해주는 권위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 전부터 레다는 자신의 삶을 잠식하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보며 불행을 느껴왔다. 자신의 삶과 모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모습까지 보였던 엄마 레다. 여성과 엄마 사이에서 헤매며 딸의 젊은 남자친구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레다의 혼란한 정체성.



"비앙카와 마르타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를 길들이려는 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때 내게는 딸들의 염원보다 딸들이 없는 바깥세상에서 비춰드는 삶의 광채가 더 밝게 느껴졌다.

새로운 색상, 새로운 육체, 새로운 지식, 드디어 나만의 진정한 언어로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언어의 광채가 더 눈부시게 느껴졌다."

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사랑> p187 / 한길사




그러는 사이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모든 책임을 레다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무너진 균형, 한쪽에만 몰린 희생.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삶을 찾아 가족을 버리고 사랑하는 남자와 여행을 즐기고 있는 영국인 브랜디란 여자의 존재는 레다의 내면에 억눌렀던 욕망을 폭발시킨다.


아이들을 떠나 레다는 충만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3년 후 다시 가족의 곁으로 돌아간 이유에 대해서, 레다는 니나에게 '아이들과 함께할 때보다 아이들이 없을 때 내 자신이 더 쓸모없게 느껴지고 더 절망적이었다'고 했던 말은 진심일까? 


아무튼 레다는 돌아왔고, 남편 잔니는 이제는 내 차례라는 듯이 가족을 떠나 캐나다로 가버린다. 그 후 레다는 다시 아이들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엄마'의 삶에 갇혀버린다. 엘레나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인형처럼.


마치 니나에게 강요된 모성을 제거해준듯 인형을 훔친 뒤 엘레나에게는 엄마의 공백이 생기고, 이를 니나의 시누이이자 임산부인 로사리아가 채운다. 그리고 레다는 그녀에게 시종일관 혐오를 느낀다. 아이에게 무조건적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레다에겐 아직 아이를 낳아서 키워보지 않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선인 것이다. 



"깨닫지 못했을 뿐 그때 나는 이미 불행했다.

어린 비앙카는 아름다운 출산의 경험 뒤에 갑자기 변해버렸다.

비앙카는 나를 배신하고 내 모든 힘과 기운과 상상력을 앗아가 버렸다.

남편은 자기 일에 너무 바빠서 자기 딸이 내 뱃속에 있을 때와는 달리 게걸스럽고, 까다로운 데다 성격이 밥맛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두 번째 임신을 첫 임신 때처럼 기쁘게 감내할 만한 힘이 내게 없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이성이 육체에 잠식당하고 말았다."

엘레나 페란테 <잃어버린 사랑> p226 / 한길사



레다 역시 첫 아이 비앙카를 임신했을 때만해도 모든 상황이 행복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뜻대로 자라주지 않았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자신은 '욕망이 거세된 죽은 몸뚱이'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두 번째 임신은 강장동물이 자신의 몸을 점령하는 듯 끔찍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어쩌면 이것도 굉장히 폭력적일 것이다)에서 레다는 너무나 불편한 존재이다. 아이들을 증오하는 엄마의 마음을 보기가 버겁다. 하지만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이 그러하듯 이런 불편한 상황을 내내 마주하게 하며 당연하다 느꼈던 감정을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가끔은 너무 비호감이라 인물에 완전하게 이입되긴 어렵지만, 어느 정도 이 삶을 이해하게 된다. 

이번 소설도 불편하지만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어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모성이란 이름의 폭력을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는 죽었지만 잘 지낸단다'

마지막에 딸들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레다의 답변은 오랫동안 짊어져왔던 모성에서 스스로 해방된 느낌이다. 나쁜 사랑 3부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자아 찾기'가 이번에도 흥미롭게 펼쳐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질문에 빠져들게 만드는 이 불편한 소설의 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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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산 1~4 세트 - 전4권 - 특별합본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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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을 구별하여 사람끼리의 정마저 끊는 자들이 과연 누구겠는가.

개천은 그것이 틀림없는 양반 사대부들의 짓이라고 여겼다.

저희들만 대대손손이 귀하게 살아보려고 구별을 만들고는, 아랫것들에게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도록 억누르는 것이 아닌가."

황석영 <장길산 3권> p431 / 창비



3권에서는 당시 조선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참혹함이 두드러진다. 조선 각지에서 대기근이 이어지고, 거듭되는 흉작에 세곡을 납부하고 나면 백성들은 일을 하고도 굶주려야 했다. 일할 힘도 없이 해바라기처럼 볕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이들은 분노할 힘도 없이 구휼만은 기다리는데. 

길산의 녹림당은 백성들의 가슴 속에 사그라졌던 삶에 대한 의지를 일깨워주는 듯하다.



이렇게 온 백성이 고통받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가산만을 불리는 부패한 관리들과 무도한 양반들이 있으니, 이들이 녹림당의 타깃이 된다. 이들의 재물을 털어 백성들에게 고루 나눠주는 활빈 활동이 이어진다. 활빈 활동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오션스' 시리즈나 영화 '도둑들'을 보는 듯 박진감이 넘친다. 제각기 매력있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녹림당 일당들. 김기와 강말득은 기찰조로 한편의 멋드러진 연극을 꾸미며 자신들의 타깃 속에 깊게 침투해 들어간다. 이어 나서는 건 마감동, 오만석, 강선흥 등 힘 깨나 쓰는 무리들. 특히 마감동의 검술 대결은 무협지를 보는 기분이 든다. 


길산은 대결에서 두드러지진 않지만 활빈의 마무리를 감동적으로 장식한다. 인간답게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그는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어루만지고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 독려한다.


3권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신분제를 뒤집으며 세상을 바꾸겠다는 무리가 일어나는데, 이런 역모 사건과 관련하여 한양 조정에서 일어나는 정세 변화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제 역사에서 있었던 정원태를 중심으로 한 검계 무리와 양반가 사노비들을 중심으로 뭉쳤던 살주계, 이들은 부호와 양반가를 덮치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게 되고, 본인 역시 무뢰배 생활을 해서 그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포도종사관 최형기는 이들을 토벌하러 나선다.


살주계는 최형기에 의해 거의 와해되고, 검계 마저 은거지를 들킬 찰나에 모신이 꾀를 써서 한양 조정 내 노론과 소론의 분열 과정을 잘 이용하여 최형기를 파직하게 만든다. 우대용에게 배를 대주는 걸로 잠시 나왔던 모신, 이 사람도 보통 사람이 아니다. 김기와 합치면 최고의 모사를 만들어 낼 듯!


최형기는 그렇게 직에서 물러나 장사치로 재산을 불려나가고 있는 가운데, 장길산의 활빈이 조정에까지 소문이 나자 급히 황해도 관찰사로 파견한 승지 신엽에게 발탁되어 구월산 녹림당을 토포하는 토포장이 된다. 그 역시 만만치않게 영리하고 전략적이어서 지박령으로 이미 은거지를 옮긴 장길산을 잡지는 못했지만, 길산과 녹림당의 식솔이 있는 탑고개와 마감동과 오만석이 다스리는 된목이골은 초토화되고, 마감동은 최형기와의 격투 끝에 운명을 달리한다.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짓누르는 양반가들의 폭압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애달픈 백성들이 더욱 눈에 띄는 3권이었다. 조선은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아 부렸던, 세계사적으로 이례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겉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들끼리 한 무리를 마치 가축처럼 부리는 야만. 생명에 귀천이 있다고 믿은 오만. 양반의 일은 죄가 되지 않고, 양민의 일은 너무도 쉽게 죄가 되는 부조리함. 여태 읽었던 흑인 인권에 대한 책 속 비참한 삶과 조선 노비나 무고한 양민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음이 너무나 충격이었다.  


장길산에게는 정적으로 등장하는 최형기의 존재는 그래서 특별하다. 그의 부모는 아전출신으로 양반이 되지 못하지만 그에게는 출세욕이 그득하다. 하지만 그가 일생 양반으로부터 받은 멸시는 속에 양반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자리잡게 했다. 그래서 구월산 녹림패를 토벌하며 마주치는, 버려진 백성들의 한과 나보다 어려운 이들을 돕겠다는 이들의 강한 신념은 그를 흔들어놓는다. 


"최형기의 마음속에 잠깐의 동요가 일어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한 줌도 못되는 감정일 뿐이었다. 

그는 벌써 예전에 벼랑의 저쪽으로 건너뛰어버렸던 것이다. 

최형기에게는 저쪽은 전혀 상상이 닿질 않는 전인미답의 세계였다. 

(중략)

이 나라는 내가 선택한 사람들의 나라이다. 

지금 나는 뚫어지고 금이 가기 시작한 집의 담벽을 수리하러 파견된 자가 아닌가. 

더욱 견고하게 빈틈없이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형기는 어쩐지 마음이 허전하고 참을 수 없도록 답답하였다. 

정말 내가 택한 사람들은 하늘이 용납한 자들인가? 

하늘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수백 년간이나 굳건하게 수천 리의 국토를 다스려왔던 것일까. 

최형기는 그의 전립 꼭대기로 아득하게 뻗어나간 조정의 불가항력적인 힘과 높이를 가늠해보는 것이었다.

"무도한 도적들은 반드시 평정되어야 한다" "

황석영 <장길산 3권> p921~922 / 창비



앞으로 최형기는 어떻게 변할까?

또 하나의 매력적인 캐릭터 마감동, 대결마다 무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의 아름다운 검술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큰 희생을 치룬 구월산 녹림패, 이들의 다음은 어떻게 될지 4권이 기대된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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