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유서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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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홀로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나의 존재적 정체성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밤의 유서> p163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 안나지만 책을 읽고 있던 그 순간의 공기와 분위기가 선명하게 기억되는 책들이 있다. <소피의 세계>가 나에겐 그런 책인데, 쏟아져 들어온 노란 빛줄기에 방의 묵은 먼지가 뿌옇게 부유하고 있는게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던 어느 나른한 오후, 벽에 기대 책장을 넘기던 나는 어떤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만큼 엄청난 몰입감을 느꼈던 책이어서 <소피의 세계> 저자 요슈타인 가이더의 신작에 당연한 관심이 생겼다.



<밤의 유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 알버트가 오두막에서 보낸 이틀 간의 시간을 담았다. 알버트는 신경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희귀병을 선고받고,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는 비참한 삶을 사느니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족과 자신에게 남길 유서를 쓰기 위해 호숫가의 오두막으로 향한다. 오두막은 알버트와 에이린의 시작을 함께 한 곳이자, 두 사람 관계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다시 사랑을 확인한 곳이기도 하다. 스무살 시절 에이린과 첫데이트에선 주인 몰래 무단침입을 했지만, 그들이 결혼을 하고 십여 년이 흘렀을 때 우연히 매물로 나온 오두막을 발견하고 지금껏 소유하고 있다. 오두막을 매입하던 당시 아이였던 아들 크리스티안이 결혼하고 손녀까지 낳을 정도로 세월이 흐른 지금, 알버트는 손녀딸이 그림을 그려둔 오두막의 방명록에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며 용서를 비는 유서를 남긴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박테리아를 학회에 발표하기 위해 오스트렐리아로 간 에이린이 돌아오기 전에 이 생을 마치려고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생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여긴다. 우주를 동경해왔던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일견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죽음은 인간에게 필연적이고, 우주의 티끌로 돌아가는 것 뿐이라고.


고요한 오두막에서 그는 에이린과의 운명 같았던 첫 만남과 크리스티안을 낳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소원해졌던 그들이 오두막을 매입하며 다시 관계를 회복했던 시절과 손녀 사라와의 아름다운 추억, 그리고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는 과거의 잘못을 회상한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우연하게 탄생한 존재인지, 삶을 그래서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지를 우주적인 사유를 통해 깨닫는다. 



이틀 간의 시간을 담고 있어 매우 심플한 스토리지만, 주인공의 사유가 변하게 되는 과정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에게 죽음은 그저 두려울 뿐이지 고통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삶이 고통이다. 모든 감각이 멀고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자신과 자신을 돕느라 희생하는 가족들을 떠올리면 그에게 남은 생을 견뎌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남겨질 가족은 어떠한가. 자신의 부재가 아내 에이린에게 얼마나 깊은 슬픔일까. 소중한 존재의 부재는 남겨진 이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가. 결국 알버트의 결심은 무너지고 만다.



사실 처음부터 알버트의 병이 드러나지 않고 과거 회상과 현재를 오가는 구성에 우주와 인간의 존재 등 사유가 확장되고 있어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뒤에 덧붙여진 강신주 작가의 해설은 오아시스 같았다. 나의 존재와 가치, 존엄보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주인공의 자살을 멈춘 것이라고. 이렇게 보니 굉장히 로맨틱한 소설 같다.  



한때 나도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망하면 죽지 뭐'라고 목숨을 그다지 아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욕망대로 저질렀던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가족이 생기고 특히 아이를 낳고 나니 내 존재와 정체성이 나 하나로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 존재한다. 나의 목숨도 온전히 내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당장 내가 사라지면 내 아이는 많은 어려움에 처할 것이기에 별로 신경쓴 적 없던 내 건강을 염려하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까만 밤, 그리고 밤하늘을 닮은 까만 호수를 노 저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아주 작게 그려진 표지가 다시 보였다. 끝없는 우주에 홀로 남은 듯 고독해보였는데, 노 젓는 손이 새삼 분주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남자가 가는 방향 끝엔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에서 출판사 도서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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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코딩지식 - 디지털 시대,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EBS <코딩, 소프트웨어 시대>, <링크, 소프트웨어 세상> 제작팀 / 가나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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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직장생활 동안 나의 업무는 줄곧 온라인과 관련이 있었다. 온라인 세계를 구축할 줄은 모르지만 운영은 해야했기에 어쭙잖게 소스 코드들을 몇가지 주워 먹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코딩의 '코'자도 모른다. (이젠 이 말도 구닥다리 용어가 된 것 같지만) 솔직히 나는 '컴맹'에 가깝다.  

왜 최소한의 공부도 하지 않았을까? 

항상 과거는 후회 투성이지만 숱하게 지나친 배움의 기회들이 아쉽기만 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디지털 네이티브로 살아가게 될 아이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제야 공부할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 아픈 코딩을 그나마 쉽게 접근했을 것 같은 이 책을 펼쳤다.


이 책은 다큐 맛집으로 소문난 EBS의 <코딩, 소프트웨어 시대>, <링크, 소프트웨어 세상>을 종이에 옮겨 엮었다. 


TV를 통해 해당 다큐를 보진 못했지만 한 편 한 편 핵심적인 메시지로 뭉클한 스토리를 쌓아 올리는 '지식e'와 같은 숏폼 다큐였다. 숏폼 다큐의 아쉬움이라면 몰입도 높은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느라 상세한 부가 설명은 생략해서 깊이 있는 이해는 어렵다는 것인데, 책으로 엮어내며 이런 부분을 보완했다.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복잡한 디지털의 세계를 문과생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쉽게 설명하기 위한 제작진의 고심도 엿보인다.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은 소크라테스의 논리학이 어떻게 디지털 세계의 이진법 언어로 발전했는지, 컴퓨터와 웹은 어떻게 탄생했는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검색 포털은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찾아 보여줄 수 있는지, 디지털 시대가 만들어낸 변화와 앞으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등이다. 소프트웨어, A.I, 사물인터넷 등 익숙하게 들어서 다 안다고 생각했던 용어들을 제대로 정의해줘서 이해의 폭이 한층 넓어진 것 같다. 


특히 인상적인 내용은 디지털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만들어낸 혁신과 변화를 다룬 것이었다. 전쟁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나라에 의료지원이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커뮤니티 맵핑, 인간이 하기 힘든 3D(지루하고, 더럽고, 위험한)를 처리해주는 '인류를 구할 로봇' 이야기, 창의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서비스를 발굴하기 머리를 맞댄 개발자들의 해커톤 등.


그 중에서도'잭의 컴퓨터'란 챕터는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진단비도 비싸며 진단 확률도 지극히 낮은, 조기 발견이 어려워 사망률이 높았던 췌장암, 그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 이웃 아저씨를 생각하며 오랜 연구 끝에 값싸고 정확한 췌장암 진단 키트를 만들어낸 십대 소년 잭. 그토록 창조적인 결과물의 바탕이 된 유일한 발명도구 '인터넷'. 잭은 인터넷에 등재된 여러 논문들 속에서 해답을 찾아냈다. 


"자, 지금 당신은 컴퓨터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이 챕터는 세상을 변화시킨 잭의 컴퓨터와 게임 중독에 빠진 한국의 많은 청소년들의 컴퓨터를 비교대상에 놓는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터넷의 가치는 완전히 달라진다. 상상과 열정을 가지고 접근하면 인터넷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멋진 도구가 될 수 있다. 난 컴퓨터 앞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왔던가. 이제라도 생산적인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욕구도 샘솟았다. 물론 내일이면 또 동태눈이 되어 쓸데없는 기사나 보고 있겠지만.


사실 책을 보기 전까진 <최소한의 코딩 지식>이라는 제목에서 프로그래밍 언어나 코딩의 기초부터 알려주는 책일꺼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런 기술적인 설명은 없다. 그렇다해서 실망스럽진 않았다. 수학 공식 외우려 했다가, 공식이 만들어진 수학의 개념 원리를 배웠달까. 이 책을 읽고 나니 밑바탕이 탄탄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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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 몬테소리 육아대백과 - 아이 시간표대로 어메이징 몬테소리 교육의 힘 몬테소리 육아대백과
시모네 데이비스.주니파 우조다이크 지음, 조은경 옮김, 정이비 감수 / 키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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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난 지 벌써 3개월에 접어 들었다. '교육'이라는 단어와 영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오다보니 아이가 성장해감에 따라 필요한 자극을 혹시 내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커져만 갔다. 나의 무신경함이, 나의 소홀함이 혹여나 아이의 발달에 저해되지 않을까, 아이가 가진 가능성과 잠재력을 갉아먹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1분 1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영유아 다중지능 발달에 좋다는 전집과 교구를 찾아보고, 사악한 가격에 깜짝 놀라 우물쭈물 후기만 읽어가며 구매를 망설이고 있던 중 들어는 봤지만 정확히 뭔지는 몰랐던 '몬테소리'에 꽂히고 말았다.


빌 게이츠,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등 글로벌 기업의 수장들을 길러낸 몬테소리식 교육법. 사실 국내에는 아이의 다양한 발달을 촉진한다는 알록달록한 원목의 교구들로 더 많이 알려져있다. 나 역시도 왠지 내 아이가 천재가 될 것만 같은 환상을 품고 흔한 장난감보다는 더 스마트해보이는 몬테소리 교구에 끌렸다. 


하지만 이 책 <베이비 몬테소리 육아대백과>를 읽으며 몬테소리의 본질에 대해 제대로 접근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몬테소리식 교육에 대한 자잘한 팁이나 기대하며 읽었던 나에게 이 책은 훨씬 큰 세계에 입문하게 만들어줬고, 더 넓은 시야로 육아에 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을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아이가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일은 절대 도와주지 말라."

"불필요한 모든 도움은 아이의 발달에 장애물이다."

"몬테소리의 진정한 목표는 교구나 도구가 아니라 아기를 능력 있는 존재로 보고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부드럽게 대하는 법을 찾는 것"

"우리의 역할은 아기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 책은 임신부터 생후 1년까지 몬테소리식 육아법을 디테일하게 담아내고 있다.


임신 중 안정적으로 애착을 형성하는 것부터, 몬테소리식으로 집안을 꾸미는 법, 발달 단계에 따른 몬테소리 활동, 몬테소리 방식의 양육법, 그리고 실전 육아까지. 몬테소리식이라는 일관된 철학이 흐르고 있지만 아기를 처음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유용한 팁들이 가득하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인 저자들의 실제 사례와 각 국에서 몬테소리를 실천하고 있는 가정들의 모습과 인터뷰는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여주고 있어 참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의미있게 다가온 부분은 '몬테소리 방식의 양육법'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내 육아 마인드를 재정립했다. 한국의 부모들은 대개 아이에게 그 어떤 역경과 고난도 겪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시행착오 없이 자신들이 깔아놓은 탄탄대로 위에 올려놓는다. 날 때부터 수유텀이나 먹놀잠의 패턴에 집착하며 자신들이 짠 시간표에 맞춰 컨트롤하고,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것들로 아기의 24시간을 가득 채운다. 아이의 본능에 맡기자고 다짐했던 나 역시 가끔 '내가 아이에게 무심한 것 아닌가?' 초조해졌는데, 몬테소리식 교육을 접하며 아이가 가진 자신만의 발달 시간표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아기를 보는 관점도 바뀌었다. 책 속에서는 아기를 눈과 손과 입으로 세상을 탐색하는 탐험가로 상정한다.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아기들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존재, 존중해줘야할 하나의 인격체이다. 부모는 절대 아기의 '지배자'나 '하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컨트롤해서도, 아기의 모든 것을 대신해줘서도 안된다. 아직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기지만 자신의 의사표현을 할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기저귀를 가는 반복적 행동도 아기의 의사를 묻는 존중의 태도를 보여야한다는 것. 그동안 무의식 중에 아기를 미성숙한 존재, 나의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여리고 약하기만 한 존재로 여기며 아기를 일방적인 태도로 대해온 것은 아닐까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내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니 과연, 아이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가 어떤 상황이 싫다면 억지로 밀어붙일게 아니라 한템포 여유를 갖고 다른 방식을 찾아보게 된다. 


똑똑한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어쩌면 조금 속물적 바람으로 이 책을 펼치게 되었지만, 몬테소리식 교육은 자기 통제력과 주도성을 키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낼 수 있는 아이로 만들어 줄 교육법이란 생각이 든다. 언제나 존중받은 기억을 가진 아이는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타인을 존중할 줄 알며, 실패를 하더라도 금세 털고 일어나는 높은 회복 탄력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내 아이가 그렇게 자랐으면 한다. 이런 교육은 교구 몇번 가지고 논다고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부모의 신뢰를 받으며 자라야 한다. 내 아이의 선택을 믿어주고, 아이의 독립을 돕자는 육아의 대원칙이 변하지 않도록, 이 책을 곁에 두고 반복해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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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 신데렐라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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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마법 능력이 없어도 해방자가 될 수 있었어.

해방자란 다른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도록 돕는 사람이야."



'신데렐라' 스토리는 나에게 언제나 매력적이었다. 페로의 동화 원형보다 재가공한 스토리는 특히나 더욱 그랬다. 왕자인지 모르고 우연히 시장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신데렐라'도 그렇고, 똑똑하고 현명한 신데렐라를 내세웠던 드류 베리모어 주연의 영화 '에버 애프터'는 나의 최애 영화 중 하나다.


내가 이 스토리를 그토록 좋아한 건 남자 잘 만나 신분상승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결말이 아니라, 나를 특별한 존재로 변신 시켜주는 마법과 마법으로 인해 겉은 초라하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인간이 주목 받고 발견되어지는 쾌감 때문이었다. 평범한 나도 언젠간 반짝 반짝 빛나는 특별한 존재로 인정 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게 해줬달까.


2000년 대까지만 해도 흔한 드라마의 성공 공식이었던 '신데렐라 스토리'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남녀 평등이 당연히 추구해야 할 올바른 가치가 된 지금에서는 낡고 성차별적인 요소가 다분한, 그래서 이제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멋쩍어진 동화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스토리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모양이다. 전작 <남자는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통해 미국 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적인 폭력의 민낯을 폭로했던 리베카 솔닛이 정말 기가 막히게 근사한 <해방자 신데렐라>를 만들어 냈으니까.


리베카 솔닛은 19세기의 일러스트레이터 아서 래컴의 실루엣 일러스트 '신데렐라'를 자신의 재창조된 동화 속에 삽입해 더욱 아름답고 독특한 분위기를 내는 '신데렐라'를 탄생시켰다.



리베카 솔닛의 <해방자 신데렐라>는 집안에 갇혀 가사 노동에 혹사 당하는 재투성이 소녀지만 대모 요정의 마법으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한다. 근사한 드레스도, 왕자를 통한 화려한 신분상승도 그녀가 꿈꾸는 미래가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세상 밖으로 나가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자신의 일을 꾸려 가는 것. 


그녀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에게도 변화가 찾아온다. 허영심 많은 의붓 언니들도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간다. 왕자 역시 답답한 성에서 탈출해 해보고 싶었던 농사 일을 시작한다. 이 얼마나 창의적인 결말인가.  


리베카 솔닛은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여성을, 그리고 이를 이뤄줄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결말에 담아 내며 자신이 정한 재해석의 방향성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긴다.


"신데렐라는 누더기 옷을 입었지만 활기가 넘치고 씩씩하게 노동을 하고 진심을 다해 뛰어놉니다. 곤경에 처했지만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맞게 신데렐라 이야기를 하려면, 혹사와 모멸적 노동의 해결책이 왕자비가 되어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어 일을 안 하고 사는 것일 수는 없고, 대신 존엄을 지킬 수 있으며 스스로 하고 싶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47)


과연 그녀의 말처럼 우리 시대에 맞는 신데렐라가 탄생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빚은 신데렐라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동물 친구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시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 너무 급진적인 페미니즘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보편적으로 감동할 수 있는 해방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라면 누구에게도 들려 주고 싶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가 자기 스스로 하고 싶은 의미 있는 미래를 그려나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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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토끼를 따라가라 - 삶의 교양이 되는 10가지 철학 수업
필립 휘블 지음, 강민경 옮김 / 흐름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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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에게 이상한 나라가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진실은 이상하면서 신기하다.

우리는 그게 다 무엇인지도 모른 채 놀랄 뿐이다." (p422)



중학교 1학년 때 나는 처음 철학적인 질문에 빠져들었다. 책을 좋아했던 작은 삼촌이 나에게 선물해 준 '소피의 세계'를 펼치면서 생전 듣도보도 못한 고대 철학자들을 만났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여러 질문들을 접했다. 특히 소피가 자신의 은신처에서 펼쳤던 편지 속에 '너는 누구니?'라는 메시지는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살아왔던 나의 세계가 흔들리는 경험이었다. 나라는 존재는 그리고 인간의 의식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이 책의 제목 <하얀 토끼를 따라 가라>를 접하고 나는 철학을 쉽게 풀어 쓴 교양서일 줄 알았다. 독일 <슈피겔> 선정 철학 분야 10년 연속 최고의 스테디셀러라니 많은 사람들이 철학 입문서로 선택한 책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입문서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미 시대순으로 정리된 철학 교양서를 한 권 제대로 읽고 하이데거니 비트겐슈타인이니 후설이니 하는 현대철학자들을 접하며 머리를 쥐어 뜯을 때 읽으면 좋은 책이다.



이 책은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10가지를 꼽아 제시한다. 느끼다, 말하다, 믿다, 꿈꾸다, 행동하다, 알다, 즐기다, 생각하다, 만지다, 살다는 우리 삶 그 자체이며,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답이 없다고 여겨지지만 한번쯤 품어봤던 의문들이다.


감정은 선천적일까? 

언어는 선천적일까? 

꿈은 무슨 기능을 하는 걸까? 

의식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신은 정말 존재할까?



특히 인상적인 장은 꿈을 논하는 3장과 의식에 대해 논하는 8장이었다. 꿈은 우리 무의식에서 오랫동안 욕망하던 것의 발현이라고 우리는 흔히 알고 있지만, 렘수면 단계에서 나타나는 기억의 조합일 뿐이다. 하지만 왜 영화와 같은 스토리가 있는 꿈을 꾸는 것인지, 대체 꿈이 우리 삶에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인지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답을 찾을 수 없다. 



의식 역시 답을 찾을 수 없기에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다. 인간의 뇌는 모든 감각을 느끼게 하고 경험을 축적하게 하여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뇌와 같은 구조로 만들어진 컴퓨터나 인공지능에게 우리와 같은 의식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의식은 그 정의를 내리는 것도 어렵기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논하기가 어렵다. 이렇듯 꿈과 의식은 아직 답을 찾을 수 없고 현재 진행형인 논쟁이기에 이 책에서 소개한 다양한 가설과 실험 결과가 더욱 흥미로웠다.



저자가 서문에 언급하듯이 우리가 철학을 접하는 방식은 '오랜된 문헌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다. 영혼과 도덕과 정답이 없는 듯한 추상적인 질문에 대한 위대한 철학자들의 답을 꾸역 꾸역 주워먹다보면 철학이 내 삶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뜬구름 같을 때가 많아서 괜히 어렵게 느껴졌다. 사실 철학을 계보대로 정렬시켜 공부하는 건 철학이 앞선 이의 주장에 반박과 대안이 거듭되어 왔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철학은 어떤 주장의 근거가 타당한지 따져보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뭇 다른 철학 수업을 펼친다. 



이 책은 자연 철학이나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이원론으로부터 시작하는 전통적인 철학 교양서와는 궤를 달리한다. 다루고 있는 주제부터 다르다. 지나간 고대 철학자들의 현실적 문제와 괴리된 영혼이나 도덕 같은 주제보다는 여전히 현존하는 인간을 이루는 10가지 문제에 대해 다루는 데다가, 그 방식이 사뭇 과학적이다. 논리학이나 뇌피셜 같은 사고실험보다 연구와 검증으로 구해보려했던 실험 결과를 풍부하게 가미했다. 과학적인 실험 속에서 철학적 주제를 찾는 재미도 발견할 수 있다. 아마 철학이 던지는 정답 없는 질문에 길을 헤맸던 사람이라면, 이 책은 이상한 나라에 진입하기 위한 선명한 길잡이 '하얀 토끼'가 되어 줄 것이다. 


★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출판사 지원으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한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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