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유서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손화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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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홀로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나의 존재적 정체성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의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밤의 유서> p163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 안나지만 책을 읽고 있던 그 순간의 공기와 분위기가 선명하게 기억되는 책들이 있다. <소피의 세계>가 나에겐 그런 책인데, 쏟아져 들어온 노란 빛줄기에 방의 묵은 먼지가 뿌옇게 부유하고 있는게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던 어느 나른한 오후, 벽에 기대 책장을 넘기던 나는 어떤 공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만큼 엄청난 몰입감을 느꼈던 책이어서 <소피의 세계> 저자 요슈타인 가이더의 신작에 당연한 관심이 생겼다.



<밤의 유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 알버트가 오두막에서 보낸 이틀 간의 시간을 담았다. 알버트는 신경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희귀병을 선고받고,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는 비참한 삶을 사느니 죽음을 앞당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가족과 자신에게 남길 유서를 쓰기 위해 호숫가의 오두막으로 향한다. 오두막은 알버트와 에이린의 시작을 함께 한 곳이자, 두 사람 관계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다시 사랑을 확인한 곳이기도 하다. 스무살 시절 에이린과 첫데이트에선 주인 몰래 무단침입을 했지만, 그들이 결혼을 하고 십여 년이 흘렀을 때 우연히 매물로 나온 오두막을 발견하고 지금껏 소유하고 있다. 오두막을 매입하던 당시 아이였던 아들 크리스티안이 결혼하고 손녀까지 낳을 정도로 세월이 흐른 지금, 알버트는 손녀딸이 그림을 그려둔 오두막의 방명록에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며 용서를 비는 유서를 남긴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박테리아를 학회에 발표하기 위해 오스트렐리아로 간 에이린이 돌아오기 전에 이 생을 마치려고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생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여긴다. 우주를 동경해왔던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일견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죽음은 인간에게 필연적이고, 우주의 티끌로 돌아가는 것 뿐이라고.


고요한 오두막에서 그는 에이린과의 운명 같았던 첫 만남과 크리스티안을 낳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소원해졌던 그들이 오두막을 매입하며 다시 관계를 회복했던 시절과 손녀 사라와의 아름다운 추억, 그리고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는 과거의 잘못을 회상한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우연하게 탄생한 존재인지, 삶을 그래서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지를 우주적인 사유를 통해 깨닫는다. 



이틀 간의 시간을 담고 있어 매우 심플한 스토리지만, 주인공의 사유가 변하게 되는 과정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에게 죽음은 그저 두려울 뿐이지 고통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삶이 고통이다. 모든 감각이 멀고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자신과 자신을 돕느라 희생하는 가족들을 떠올리면 그에게 남은 생을 견뎌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남겨질 가족은 어떠한가. 자신의 부재가 아내 에이린에게 얼마나 깊은 슬픔일까. 소중한 존재의 부재는 남겨진 이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가. 결국 알버트의 결심은 무너지고 만다.



사실 처음부터 알버트의 병이 드러나지 않고 과거 회상과 현재를 오가는 구성에 우주와 인간의 존재 등 사유가 확장되고 있어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뒤에 덧붙여진 강신주 작가의 해설은 오아시스 같았다. 나의 존재와 가치, 존엄보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주인공의 자살을 멈춘 것이라고. 이렇게 보니 굉장히 로맨틱한 소설 같다.  



한때 나도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망하면 죽지 뭐'라고 목숨을 그다지 아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욕망대로 저질렀던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가족이 생기고 특히 아이를 낳고 나니 내 존재와 정체성이 나 하나로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둘러싼 관계 속에 존재한다. 나의 목숨도 온전히 내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당장 내가 사라지면 내 아이는 많은 어려움에 처할 것이기에 별로 신경쓴 적 없던 내 건강을 염려하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까만 밤, 그리고 밤하늘을 닮은 까만 호수를 노 저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아주 작게 그려진 표지가 다시 보였다. 끝없는 우주에 홀로 남은 듯 고독해보였는데, 노 젓는 손이 새삼 분주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남자가 가는 방향 끝엔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에서 출판사 도서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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