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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작은 새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고정아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미국의 작은 산업도시 스파타. 과거의 영광은 가고 황폐함만이 남은 이 곳에서 창녀(조이 크럴러)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용의자로 지목된 두 사람은 죽은 여자의 남편(델레이 크럴러)과 고객(에디 딜). 사건과 연관됐단 이유만으로 파멸되기 시작하는 두 집안, 그 곳에 제 아버지의 무고함을 믿는 소녀(크리스타 딜)와 소년(애런 크럴러)이 있다.
문제가 있다는 걸 감지한, 피 냄새를 맡은, 누군가 탓하고 싶은 아이들만큼 잔인한 이는 없다. _96
500여쪽이 넘는 긴 이야기의 화자는 마지막 몇 페이지를 제외하고 '아이'의 시점이다. 이제 열댓살이 된 소녀 크리스타 딜. 그녀의 눈에 비친 아빠의 자존심, 아빠의 외도, 아빠의 파멸, 엄마의 히스테리, 정의되지 않을 성적인 욕망. 그녀보단 어른에 가깝(다 자부하)지만 아이일 수 밖에 없는 소년 애런 크럴러. 그에게 인식된 어머니 조이의 죽음, 분노의 표출, 변화될 수 없다는 자괴감. 아이들의 눈을 통해 보여진 스파타는,
긴박하지 않다.
심각하지 않다.
무력하지만 여전히 어디에선가는 활기를 띠고 있다.
긍정적이다. (여전히 무언가 희망하고 있다.)
그래서 잔혹하다.
순수하고 아름다울줄만 알았던 그림동화가 사실 잔혹했듯이. 그럭저럭 살만했다고 느껴졌던 스파타도, 그들의 삶도 사실은 엉망진창 진흙탕이었다. 현실은 참담했다.
그렇게 사건 후 십수년이 지나고 크리스타와 애런은 만나서 사건의 진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용의자였던 두 사람의 아버지가 모두 죽은 후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밝혀진 진실 앞에서 그들은 숨겨왔던 욕망을 분출한다. 아득하고 격력한 욕구 해소의 끝에서 크리스타는 읊조린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 이 남자가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얼굴은 아름답지 않았다. 마구 깎아놓은 얼굴, 거친 얼굴, 냉혹할 수 있는 얼굴, 고집과 남성적 어리석음이 어린 얼굴. 하지만 내게는 아름다운 얼굴이었고, 나는 그 경이에 황홀했다. 남자의, 남성성의 아름다움이 나를 덮쳐 나는 힘을 잃고 방향 감각을 잃었다. _547
우리는 스파타의 낭만이었다. _547
하지만 정확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돌 더미 흩뿌려진 공터는 고대 폐허처럼 낯설게 타오르는 망가진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이곳은 기념은 고사하고 명명조차 하지 않은 폐허였다. 기억, 정체가 없는 폐허였다. _539
찢어발겨 잊어도 될 고약한 과거의 망령, 누구에게도 득이 될리 없는 기억. 그러나 소녀는 그 잔해를 아름답다고, 자기들은 스파타의 낭만이었다고 말한다. 그 땅을 떠나면서도 기억은 아름다움으로 포장해 챙기는 마지막 행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작은 새가 죽은 자들,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