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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기록 그리고 실존. 당신은 무엇을 믿는 사람인가요?
내가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두 사람은 아마도 실존보다는 기록을 숭배하는 사람들인가봅니다. 여자는 기록이 곧 자신의 존재이유였고, 남자는 제 몸이 깎여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기록을 마쳤으니 말입니다. 여자는 영혼을 기록하는 '이진'입니다. 남자는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를 사랑했던 '이현'이구요. 현대판 사랑과 영혼이라도 찍냐구요? 궁금하면 이야기를 시작해보지요.
천상의 아름다움을 지닌, 살구내음을 풍기는 여인의 결혼식을 기억하는 중년 남자 '이현'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일하는 사무실 지하 매점에서 추억 속 여인과 똑 닮은 사람을 보게됩니다. '이진'이죠. 서로의 이익에 따라 둘은 3년간의 계약 결혼을 시작합니다. 이진과 똑 닯았던 그녀의 엄마와 결혼했던 장인은 이현에게 경고를 합니다. 이현은 자신은 잘할거라며 코웃음을 치죠. 결혼생활은 큰 무리없이 지나갑니다. 되려 행복해보이기까지 했죠.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는 열릴 운명이었던가 봅니다. 영혼 기록 노트를 보면 안된다는 이진의 충고를 무시하고 이현은 노트의 책장을 넘겨버립니다. 결말은... 모든 비극이 그러하듯 다소간의 충격을 주며 주인공의 불행으로 끝나버립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한 편의 동화가 끝나버리죠.
이야기는 돌고 돈다고 누가 그랬던가요?
이진과 이현의 사랑 이야기도 네버 엔딩 스토리입니다(주인공은 바뀌겠지만요). 혹시나 하는 생각이지만, 정말 이 세상 어딘가에 이진과 이현이 있을 것만 같단 생각이 듭니다. 혹은 이진의 아이의 아이의 아이가 말예요.
그런데 영원히 계속될 거라 여겨졌던 순환고리에 이현은 도전장을 내밉니다. 자신의 실수로 새로이 돌게 된 수레바퀴를 멈출거라 장담은 못하지만 최소한 이전과는 다르기 위해 노력할거라 선언합니다. 고통 속에서 끌어올리는 손 하나. 그건 판도라 상자에 남은 실낱같은 희망 덩어리라고 봐도 무관하겠죠.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현의 연애>는 신화를 차용한 아름다운 비극의 사랑 이야기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쉬움이 남으니 조금 더 썰을 풀어보지요.
기록과 실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형태가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라면 실존은 기록에 앞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형태가 사라진 후에는요? 몇백년 전의 역사를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해서 알아내던가요? 우리가 아는 과거는 단지 기록에 불과합니다. 작성자에 따라서 기록의 진위가 달라질 순 있겠지만 우리는 일단 기록을 믿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죠. 이진의 기록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게 되어버리는 이유입니다. 읽는 자에게 기록은 곧 진실이 되어버리니까요. 쓰는 행위란 퍽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쓰고 있는 걸 보면 기록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픈 사람의 욕구는 대단한 듯 합니다. 세상의 모든 기록쟁이들을 위해 건배.
이제 이진과 이현의 사랑으로 돌아와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랑은 비극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이 거절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뿐, 아름다웠다 추억할 수 있다면 그럭저럭 성공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현의 고통에 대해서라면 이진의 대범한 복수라고 해두죠.
아... 이 책을 읽고나면 살구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