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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영화 아이다호를 난 이렇게 기억한다. 한 남자가 하늘과 땅의 경계가 모호한 먼 허공에 시선을 주고 있는 장면으로. 혹은 그러한 길을 걷고 있는 모습으로. 그래서였는지 먼 곳 바라기를 하는 한 여자의 뒷모습(혹은 옆모습)이 담긴 표지 그림이 낯설지 않았다. 왠지 <세계의 끝 여자친구>(문학동네.2009)는 돌이킬 수 없는 기억에 대해 담고 있을 것 같았다. 아이다호가 돌아오지 않는 청춘의 모습을 그려냈듯이.
예감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지나간 기억으로 인해 몸부림친다. 기억을 찾아 떠나기도 하고, 잊기 위해 바보같은 짓을 하며, 고통받다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요컨대 지나간 시간을 위해 행동을 취한다. 장소를 찾고, 사람을 찾고. 흔적을 뒤쫓는 이야기는 얼마쯤은 고독하다. 그리고 평화롭다. 딱 표지그림만큼의 여자가 주는 느낌만큼.
'기억할 만한 지나침'의 소녀는 그러나 기억을 잊고싶어 검은 바다로 뛰어들어간다. 이제 막 소녀로서의 자신과 안녕을 고한 과거를 그녀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자신이 피했던 소년의 품에 어정쩡하게 안기는 소녀. 그건 그녀가 마주칠 새로운 삶과의 서투른 인사는 아닐까. 내가 다른 내가 되는 순간의 경계를 단편은 매혹적으로 풀어낸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버리면 사람들은 삶에 익숙해진다. 변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유일한 위안거리는 기억을 곱씹는 일 뿐. 사람들은 해결되지 않은 과거를 들쑤시면서 현재를 잊는다. 혹은 시간이 지난 후 자연스레 과거를 포옹하면서 또 다른 자신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어떤 방식으로건 기억이 지금의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조금은 모호한 채, 원하는 기억을 덧붙인 채.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의 여자도 기대치 않은(기대 이하인) 서른 살 생일을 맞으면서 우연찮게 탐탁찮은 전 애인과 만난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가운데 그녀는 위로를 느낀다. 예기치 않던 위로. 기억의 힘이다.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도 있는 법.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노인은 자신이 짊어져야 했던 젊은 날의 기억으로 인해 괴로워한다. 그걸 잊기 위해 수백, 수천 권의 책을 봤지만 답은 하나.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고 그는 평생 기억 속의 눈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점. 결국 과거의 한 순간은 노인을 죽음으로 내몬다. 한 사람의 평생을 좌지우지하는 흉기. 그 또한 기억의 위력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을 살아가야 한다. 때론 기억이란 녀석 때문에 흔들릴지라도. 그러니 작가의 말이 정답일지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사람일수도 사물일수도 장소일 수도 있다. 사랑한다는 건 곧 미워한다는 말일 수도 있고. 풀이하자면 삶을 사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하는걸거다. 아무리 강력해도 그걸 만들어내는 사람이 만들어진 기억 따위에 질 수야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