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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교사
재니스 Y. K. 리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번역자는 이 책을 검토한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욕심난다." 책을 다 읽은 나는 이렇게 말해야겠다. "읽어보면 안다." 한인 2세 재니스 리의 첫 작품 <피아노 교사>(문학동네.2009)에 쏟아진(?) 찬사다. 실제로 출간 전부터 화제를 낳았다는 이 책, 피아노 교사는 어떤 기막힌 사연을 들고 우리를 찾아올까?
1940년대 초, 영국 식민지하의 홍콩. 무엇이든 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말괄량이 아가씨 트루디가 있다. 한 눈에 그녀와 연인이 된 영국인 윌이 있다.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일명 하이클래스. 전쟁 전의 홍콩에서 그들은 하인들을 부리며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스럽게 호화로움을 만끽하며 살아간다.
1950년대 초 전후상황. 영향력 있는 중국인 부부의 딸을 가르치기 위해 영국인 피아노 교사가 등장한다. 처음엔 단순한 피아노 교사였던 클레어는 그러나 점점 하이클래스의 내부에 빠져든다. 파티에 어울리다 우연히 만난 한 영국인 윌. 그저 불륜의 상대라고만 생각했던 윌은 혼자 갖고있기엔 너무 큰 과거의 짐을 지닌 사람이었다. 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되는 숨겨진 이야기가 조금씩 드러난다.
다시 1940년대 초 전시상황. 전쟁이 터지고 홍콩은 일본인들에 의해 짓밟혀진다. 영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수용소에 갇히고, 중국인이라해도 제대로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 윌은 수용소 내에서 나름대로의 의기를 발휘하며 매일을 견뎌낸다. 한편 평생을 공주님같이만 살아온 트루디는 사촌인 도미닉과 함께 일본 권력에 붙어버린다. 사랑한다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관에 결국 멀어짐을 느끼는 트루디와 윌. 그리고 전쟁은 끝난다.
삶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트루디처럼 '살아남기 위해 노력' 할 수도 있고, '생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윌의 말처럼 그 순간에도 정신적인 가치를 더 중히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시절이 모두 끝난 후에야 깨닫게 된다. 어떤 방식도 온전히 옳을 수 없다는 걸, 정답은 없었단 걸. 윌은 전쟁이 끝나고 사랑하던 트루디를 잃고 난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옳지 않았음을, 다르게 행했다면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있었으리라 후회하면서 말이다.
우리 또한 끊임없이 역사를 되돌아보며 한 순간의 자기 이익을 위해 권력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고 배신이라고,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를 위해,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쳤던 트루디를 보며 나는 욕할 수 없었다. 못된 년이라고, 지 살길만 찾는다고 매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밖에 살아가는 방식을 몰랐으니까.
그러나 나쁜 놈은 분명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건 전쟁, 죽음, 배고픔 등의 특수 상황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나쁜 놈은 그냥 나쁜 놈인거다. '탐욕과 부정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에요, 전쟁이 있거나 없거나. (p.298)' 라는 말 그대로. 소설 속의 악질은 오랜 시간 베일에 감추어져 있다 결국 드러나고야 만다.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그에 대한 역사적 판결은 읽는 이에 의해 잔인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어쩌면 그게 작가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징벌이었을지도.
도덕적인 논의는 제외해두더라도 이 책은 읽을만한 재미가 충분한 책이다. 주연, 조연은 물론 단역 인물들에게까지 넘쳐나는 개성은 장면을 보다 활기있는 3차원 세계로 이동시킨다. 과거와 현재가 오가는 구성은 읽는 지루함을 줄여주고.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터운 책이지만 몇 십년 전의 홍콩 모습을 마치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전해줄 것이다.
참! 뜻하지 않게 과거의 무거운 기억 덩어리들을 떠안게 된 한낱 피아노 선생은 어떻게 되었냐고? 더 이상 어줍잖게 현실에 안주하며 살 수 없겠다고 집을 박차고 나간다. 낯선 이국 땅에서의 정착. 그러나 그녀는 씩씩하다. 낯선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진리를 배웠으니까. '이 모든 것을 통해 그녀를 지탱해주는 것은 단순한 깨달음이다. 일단 저 거리로 나서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러면 그녀는 거리 풍경 안으로 녹아들고, 거리의 리듬에 흡수되어 어렵지 않게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 (p.470)' 결국 모든 기억은 또 다시 거리 속에서 희석되고 만들어지는 것.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추악한 비밀도 안타까운 비밀도 다 세상의 일부가 되고, 그 자양분으로 우리는 또 살아갈거란 말씀!